유준상
무엇보다도 먼저 무색무형의 하얀 素地(소지)가 있다. 무색무형이라는 것은 지금 보고 있는 이동엽의 화면인 被視 (피시체)의 恒常性(항상성)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리들의 시각이 그것을 그처럼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눈은 단순한 물리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무색무형이라는 것은 따라서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직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공간은 그 무한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닫혀진 하나의 통일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공백이란 있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무언가가 도처에 있다 한 알의 흙으로부터 풀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여운이 흐르고 산들이 굽이치며 푸른 하늘이 있고 무한한 저편에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바꿔말해서 무언가가 우리들의 눈으로 비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령 자연이라고 하자. 또는 그렇게 비쳐 들어온 그 무엇들을 마치 그물처럼 聯想綱(연상강)으로 짜서 색으로 배열하고 형으로 구성한 하나의 풍경화라고 하자. 거기에는 어떤 공백도 없다 .
공백이라는 것이 미술의 문제로 제기된 기원은 동양에서였다. 흔히 여백이라는 말로도 표현되고 있는 이 인식의 패턴은 멀리 伏羲帝(복희제)까지 소급되는데 그것은 우주(세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데서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의 미술계주변에서 자주 인용되던 노자의 「타오(TAO)」인 空白(공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공백을 이름(말)이 없는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非在(비재)이며 들을 수 없는 沈默(침묵)이며 만질 수 없는 虛(허)라고 했다. 이러한 무색무형이 元始(원시)이며, 이로부터 음양이 상대되는 두 개의 에너지를 중개로 해서 그 원시가 틀 잡아나간다고 했다. 원시를 틀 잡는다는 건 균형을 잡는다는 뜻이며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발라스트이고 공자 말씀을 따르면 중용이라는 게 되겠다. 공백은 따라서 자신의 개별성이라던가 名儀(명의) 또는 주체성을 잃고 원시의 단순함으로 회저하여 침묵(공백)속에서 우주와 융합하고 동시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게 된다.
이러한 우주관은 물론, 논리적 추리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그것을 터득할 때 지시하는 건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에게 목표는 있지만 인간생명과 직결되는 가치관은 없다. 그래서 20세기 전후의 세계미술은 이러한 원시로부터 귀납적으로, 새로운 표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거며, 현대미술의 발상이 동양사상으로부터 다른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고도 말해지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공백은 연상이 가능한 한계의 넓은 범위로 마치 공기가 충만하듯이 번져나가려는 힘인 것이며 이것의 파악은 직시적이지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70년 후반의 한국현대미술의 한 주류가 이러한 번짐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이동엽이 있었다.
그의 하얀 화면의 중추에 임의로 세워진 수직축이 있는데 그것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묘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까지의 경과는 무언지 모르지만 하얀 소지의 중심부에 쪽 바른 수직축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의 눈(각막)을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뇌는 그 형상에 관해서 무엇도 보고하는 게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수직축이 미묘한 진동을 보이고 있다고 한 건, 세워진 하나로 주욱 그어진 수직의 윤곽이 미묘한 차이의 濃淡(농담)으로 서있기 때문에, 마치 수직의 강철을 쳤을 때 한동안 좌우로 진동하면서 여음을 내고 있는 현상처럼도 느껴지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음을 「도」라고 했을 때 그 음파와 음의 감각은 전혀 다르다. 다르게 말해서 「도」라는 음의 음파의 기호이며 동시에 그 음의 기호라는 뜻이다.
회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배열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기호들의 배열로서 이룩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동엽은 그 기호를 생성의 단계에서, G•바슈랄의 견해처럼,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간구조 속에서 원시적으로 환기해보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뒤틀려진 나무의 이미지는 그처럼 뒤틀리면서 자라나는 생성의 이마쥬넬의 파악이라는 비유이다. 앞에서 인용한 복희제는 하늘을 보고 하나의 선을 그어, 태극기의 陽極(양극)처럼 기본적인 상징기호로 삼았는데 이동엽은 그 「態動的完全(태동적완전)」을 나타내는 기호를, 앞의 음과 음파의 관계처럼 그것이 태고로부터 잉태해 온 秘義(비의)의 진동으로부터 전수한다는 태도로부터 자신의 예술표식을 환기해 온 작가였다. 그래서 십 년 전의 초기단계의 그의 작업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었으며 오늘까지 이 일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초기단계로부터 비교적인 우주인식의 고원한 메아리를 뒤쫓았던 것이어서 멀고 넓고 깊으며 어려웠다.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세는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배제하려는데서 야기되고 있지만, 바로 이 배제된 영역이야말로 현대미술이 해명해야 될 중요부분임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김현도
먼저 문외한처럼 이 그림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해야 할까?
표면적으로 우리는 하얀 화면에서 푸른 빛깔의 묽게 희석된 색 띠를 보게 된다. 또한 그 色域(색역)을 가르는 미세하게 트인 틈새를 보게 된다. 그게 전부다. '이게 다예요?' 우린 그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그것은 일단 우리가 하나의 완성된 그림에 대해 기대하는 열렬한 화가의 노력을 철저히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그런데 이 작업이 한 화가가 30년에 가깝게 고수해 온 형식이라면 어떨까. 적어도 우리가 그 배반의 근원에 대해서 다소나마 궁금증을 표시해야 할 듯싶은 의무감이 우러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금 수직-또는 수평-의 엷은 붓 자국만으로 하나의 그림이 성립한다는 특정 현상이 가능해지기 위한-70년대 이후-우리 화단의 문예적 조건을 돌이켜 보는 일은 물론 면밀한 학구적 작업을 요한다. 하지만 거칠게 보더라도. 여기서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자율성이 이식된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양상 속에 전통적 정신 영역으로의 회귀라는 동기가 부가된 매우 복합적이고 희귀한 형식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가령, 혼돈 속에 스스로의 행위를 던져 넣고 매체와 주체와 객체가 종잡을 길 없이 혼합되고 마는 식의-초기 추상작업으로부터 제3기 추상에 이르는-한국 현대회화의 대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볼 때도 매우 특이한 사례인 것이다. (평면 지상주의의 분위기 속에서도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경이로 비쳤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화폭에 이식된 모더니즘 회화의 한계를 엿본다는 표현은 합당치 않다. 마땅히 우리는 이곳에서 문명의 접촉을 특징짓는 극한치를 마주본다.
약간 비약해보자. 문화적 근본주의의 문제를 예술적 전통과 근성의 문제로 좁혀보자. 가령, 현대예술에서 적멸과 같은 개념의 문화 지형적 위치를 가정한다. (이 개념을 수용한 동서의 차이를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고려해 보자.) 예컨대, 케이지의 침묵과 소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라든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라우센버그의 백색회화가 서쪽에서는 일종의 사회적 희롱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소지를 내포한다면, 아마 여기서는 적어도 그런 흐름이 도의적 진지함으로 수용된다는 점이 문예적 전통의 실질적으로 다른 측면이라고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비교적 그것을 질과 가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역시 이동엽의 회화에 나타난 '사이'에 관한 것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렇다. 우리는 이 좁은 틈새를 통해 우리가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의 무한대를 재인식할 수 있다. '가령, 그건 무한대를 겨냥한 가늠자다. (어쩌면 그 최소한의 의미는 정신적 영역의 축소에 상응해서 점점 증폭되거나 고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시위로 보인다. 한번도 그의 작업은 그러한 지표로부터 벗어난 일이 없다. 다시 말해 그의 화폭은 한번도 즉물적인 평면이 아니었다. 그 점에서 그의 작업은 70년대 형식주의의 와중에서도 내용적으로는 당시의 유행에서 비껴서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무한으로 통하는 극히 좁은 문을 가리키는 그림이다.
따라서 이동엽의 관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백색과 허상에 관해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을 때 가능한 가장 극대의 표현형식을 발견해야 마땅하다. (또한 그건 무기질의 내용실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이러한 형식을 28년 동안이나 고수해온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상아탑에 귀속된 적도 없으며 줄곧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 왔다.) 어쩌면 그가 이 작업을 지속해온 것은 그 상징성이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길 정도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추상작업은 줄곧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를 강조함으로써 음성적인 사회비판의 형식이 된다. 다시 말해, 은연중에 상업주의와 아카데미즘에의 저항을 바탕에 깔고 있다.) 여하튼 그것은 이 작업의 표현력과 문화예술적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나름대로의 이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그것이 70년대 한국화단의 자율적 명예에 사로잡힌 다소 완고한 정신위생의 일종인가 아니면 회화의 본질적 문제가 녹아 있는 아직도 유효한 전위의식의 산물인가는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동엽의 일관된 작업은 예술적 환원주의의 근본에 가장 극한적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그 검증의 핵심적 증거로 남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그의 지난 20여 년 동안의 회화작업의 성격을 특징짓는 사회적 불화는 한결 같이 결백한 화면으로 여전히 조율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