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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만 조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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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회상과 문화적 기억


테오 순더마이어|독일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


한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0년대였습니다. 개발독재시대 고난 받던 민중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서 생성했던 민중 신학, 민중의 고난과 소망을 형상화했던 민중미술을 통해서였습니다. 독일 신학자에게 그 만남은 놀라움이었습니다.

그 후 이방인으로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큰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톨릭 조각가 이춘만과의 만남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새롭고 깊은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다가오는 놀라운 힘과 표현의 깊이 때문에 나는 중립적으로 작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아시아적 미학과 조화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삶의 강인함과 충만함으로 가득찬 그녀의 작품은 긴 대화에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춘만이 여성 조각가라는 사실입니다. 아시아에 여성 예술가가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오늘의 인도의 그리스도교 예술, 특히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연약하며, 어떤 동경과 혼합되어 있으며 이상적인 여성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춘만의 작품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한국도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였고, 여성은 민중 가운데 민중이었습니다. 여성은 역사의 짐,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여성은 한 사회의 하부구조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춘만은 여성주의가 아직 등장하기도 전에 그녀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고난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직접적으로 여성주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죽은 아들을 무릎위에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여성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징화합니다. 물론 여성의 고난만이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상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적 삶의 강팍함 입니다. 그녀는 그러나, 힘든 삶의 강팍함 만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위대함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위대함은 언제나 ‘자기비움’, ‘자기포기’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녀 작품의 형상들은 대부분 거칠고 보통 이상으로 커다란 손과 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손과 발은 지식인이나 상류층의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의 것입니다. 망치와 끌로 돌에 형상을 부여하고, 쇠를 부어 생명을 불어 넣는 노동을 하는 이춘만, 그녀 자신의 손과 발입니다. 생명의 길을 지시하면서 그녀는 불의를 거부하지만 또한 위로를 줍니다. 세상을 긍정하면서 포옹하는 몸짓이 그것입니다.
그녀에게 종교와 일상성은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근본 주제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매우 이질적인 것들을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그녀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녀 개인의 회상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억, 그녀가 함께 살면서 극복하려고 했던 시대의 집단적 기억의 표상입니다.
내 책상에는 지금도 그녀가 선물한 작은 돌멩이가 있습니다. 그 돌 위에는 명상하는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리스도는 붓다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의 뒤편에는 유다교를 상징하는 7개의 촛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대립적인 것들을 그녀는 한 자리에 초대합니다. 그녀에게 예술은 대립적이고 모순 되는 것들의 통합니다. 그리고 그 통합이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충만함인데, 그녀는 그 길을 자기비움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채 수 일|한신대 신학과 교수


예술평론가나 예술관계자가 아닌 한 개신교 신학자가 카톨릭 신자로서 그의 신앙세계를 담아내는 조각가 이춘만의 전시회에 부쳐 글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격에 맞는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은 작년에 한국 신학대학원에서 개설했던 ‘미술과 신학’세미나를 계기로 비교적 짧고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춘만의 작업세계와 그녀의 예술에 대한 생각, 작업 과정에서 감동을 받았고, 감동은 함께 나눌수록 커진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춘만의 최근 작품은 종교적 경계를 초월해 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그리스도의 형상 조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시도를 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토착화에 대한 관심 이상의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 삶이 제기하는 궁극적 관심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입과 귀를 막아야 들리고, 눈을 감아야 볼 수 있고, 비워야 채워지는 전혀 다른 현실을 향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런 현실을 경험하고 형상화하기 위해 그녀가 속한 현실과 두려움 없이 단절하고자 노력합니다. 작업하는 그녀는 경건하며 수도자보다 엄격해 보이는데, 그녀의 예술이 계시사건이 되는 시점과 유사한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갑자기 드러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불현듯 초월적 의미를 갖게 되면서, 작품이 서 있는 공간 앞에서 마치 우리가 공간이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힘입니다.




조각은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공간이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돌이건 흙이건 쇠붙이건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물질 앞에서 이춘만은 그것이 무엇이 될 지 드러나기를 기다린 후에 작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 과정은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새로운 공간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대부분 매우 단순한 형태와 선으로 형상화됩니다. 이춘만은 가부좌한 붓다의 형상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자유, 단순성과 긴장감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춘만의 작품의 형태와 선의 단순성은 인체의 소멸성과 영원성, 망각과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을 더욱 격렬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이춘만은 ‘상징’성을 사용하여 그녀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상징은 암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로 들어가는 문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것을 통하여 현실 속으로 들어오는 문이기도 합니다. 이 암호를 해독하기 위하여 이춘만은 일상적인 것, 세속적이 것을 포기합니다. 그녀에게 예술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다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춘만은 보이는 것에 개의치 않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드러나는 그녀의 언행 때문에 잦은 오해도 받지만 본질적인 것에 관여하고 있다는 기쁨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렇다고 이춘만의 작품세계가 평범한 삶의 일상과 악의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모순과 악의 현실 때문에 상처받고 망가지는 몸과 영혼도 우리는 그녀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춘만은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는 노동자라고 말합니다. 흙과 돌과 쇠를 만지는 조각이라는 작업의 특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춘만에게 예술은 노동입니다. 예술과 학문이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면서부터 단순한 기술과 재치로 전락한 우리시대에 이춘만은 노동으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노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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