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원하는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불러낼 수 있었던 도깨비 방망이를 기억한다. 귀에 익은 이 노래를 기억하는가? “금 나와라 와라 뚜욱 딱! 은 나와라 와라 뚜욱 딱!” 알라딘의 램프처럼 그 도깨비방망이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석기시대를 끝내고 청동기,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연금술의 확보는 곧바로 권력과 지배를 의미했다. 아마도 그 도깨비들은 야금술을 확보한 새로운 지배계급의 상징일 것이다. 금속도구와 무기의 등장이 새로운 역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근대로 접어들면서 강철과 유리는 수직의 도시를 세웠고 번성하는 현대문명을 일구어왔다. 특히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철은 절대적인 물질, 새로운 도깨비방망이가 되었다. 허버트 리드는 현대조각을 일컬어 “신철기시대 New Iron Age”라고 말한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기생산과 관련해 금속조각이 광범위하게 유행했는데 그 중심에 용접조각이 있었다. 분리된 두 금속을 손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이 용접기술은 철의 사용을 무한히 확장시켰고, 조각가들은 이러한 기술을 미술에 도입하여 전혀 새로운 개념의 조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언제나 당대의 과학수준은 미술의 사고와 영역과 비례해왔다. 용접은 서로 떨어져 있는 금속을 불로 녹여서 연결하는 것이다. 용접은 기술상으로 청동주조와 같은 기존의 금속조각에서는 표현이 불가능했던 거대하고 복잡한 형상제작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형태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다양한 변화 역시 제공해주었다. 그로인해 조각이 회화에 버금가는 폭넓은 표현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아울러 철과 불로 내면의식을 표출할 수 있었던 용접조각은 전후의 실존적 의식과 부합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조라고도 불리는 이 용접조각은 기존의 조각 개념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20세기 전반기 현대조각의 주요한 혁신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움직임의 도입’, ‘오브제의 사용’, 그리고 바로 ‘용접기술이 도입’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용접조각은 조각의 재료가 돌이나 나무, 청동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깨뜨렸을 뿐 아니라 조각의 영역을 깍아내기나 살붙임의 차원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방법의 조형언어를 만들어냈다. 단단한 덩어리만이 조각이 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개념이 와해되면서 공간 자체가 적극적인 조각의 표현매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조각이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조각 내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매스를 부정하고 공간 속에 자유롭게 존재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마치 추상회화에서 깊이감이 없어졌듯 조각에서도 3차원적인 입체감이 없어진 것이다. 공간의 새로운 가치개념이 그것인데 여기서 공간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고 하나의 볼륨으로 작동하게 된다. 특히 용접으로 제작된 작품은 서로 다른 여러 부분이 조립된 것으로서, 표면이 하나로 이어지는 덩어리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형태의 조각이 되며, 여기에서 얻어진 형태들은 공간을 점유한다기 보다는 공간을 수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1960년대 한국 조각계에 처음으로 수용된 이 용접조각은 점토로 인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던 당시 조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가 자신의 의식과 감정에 부합하는 표현의 방편이 다름 아닌 용접의 불대touch와 철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자각시켰다. 아울러 철의 물질감을 강조하는 것 역시 이후 한국 용접조각의 독특한 조형적 특성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단순한 형태를 추구하면서 물질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여기서 조각은 덩어리 자체와 덩어리들이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정의되었다. 돌이나 나무, 청동과는 다른 철만이 지닌 독특한 물질감을 드러내는 한편 기하학적인 형태가 반복되어 있다는 것이 그 특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기석의 철을 이용한 이 용접조각은 60년대 한국 용접조각에서 인식한 공간문제와 70년대 추상조각에서 다룬 물질성의 강조, 사물의 생생한 실재성을 드러내는 것을 공유하면서 이 두 개를 종합적으로 용해해내는 차원에 놓여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조각의 근본에 기초하면서 용접의 묘미와 철의 물질성과 실재성을 견인해내는 한편 회화적 조각 및 좌대에서 풀려나 공간과 직접적으로 얽혀 들어가는 구조물로서의 조각의 생애를 질문해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선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둥글고 긴 원통형의 철을 선과 면으로 추출해 이를 하나하나 용접하고 연결해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사각형이나 원형)를 만들었다. 철과 철을 연결하고 이어붙인 자국들은 매우 회화적인 선이 되었다. 그것은 틈과 틈을 봉합하거나 단위와 단위들을 다소 헐겁게 부착한 시간의 자취, 노동의 증좌, 내부가 빈 외부만이 존재하는 그림, 무엇인가의 재현(원, 사각형)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덩어리가 되었다. 또한 매스를 만들어나가는 여러 방법론의 실험이기도 하고 공간을 채워나가는 ‘뜨거운’ 불놀이다. 그이 이 기본적인 형태는 공간을 채워나가고 매스를 만들어나가는데서 불가피하게 초래된 결과물들이다. 그것들은 흡사 커다란 공이나 가구, 걸터앉는 구조물 등이 되었다. 일상의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놓이는 한편 실용성을 지닌 일종의 가구조각이기도 하다. 단단하고 차갑고 어두운 철의 표면은 작가의 손놀림과 불에 의해 흡사 나무껍질처럼 보이기도 하고 점토를 주물러 구워낸 자취 같기도 하다. 길쭉길쭉하고 납작한 것도 있고 비교적 작고 두툼한 사각형도 있다. 주어진 사각형과 원형의 표면, 윤곽을 채운 철 조각(선/면)들은 저마다 다른 크기, 형태, 질감과 피부를 보여준다. 크기와 길이, 표면의 터치, 용접방법의 다양함에 힘입어 이 표면들은 일정한 외곽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속해서 지워나간다. 동일한 철의 물성과 속성이 변신을 반복하면서 다양한 시간과 생애를 연장한다.
작가는 단단한 금속을 불로 녹여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듦으로써 얻어지는 희열 및 그로인해 파생하는 작가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철 조각에 심취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불 만 가면 제 맘대로 변화되고 물리적 힘이 가해지면 다루기 쉬운 변화를 거듭하는 철의 속성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조각이란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에 변형을 가해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추출해내는 일이다. 흙이나 돌, 나무, 철과 같은 조각적 재료들은 캄캄하고 아득한 시간을 저장하고 있는 물질이자 지구의 삶을 온전히 안으로 응결시킨 결정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저 산은 약 30억 년의 시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산 하나를 그린다는 것은 그 아득한 시간의 결을 헤아리는 일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물질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구가 스스로 창조한 물질의 속살을 이용해 다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최기석은 그중에서 철을 선택했다. 다른 어떤 재료들보다도 자신의 의도에 순응해주는, 지름 2.5cm, 길이6m정도의 철봉을 한없이 두드리고 펴내고 이를 단위 삼아 여러 조각으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짜맞추었다. 철봉은 두들기는 방향, 강도에 따라 폭이 3배, 길이는 약 1.5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는 철봉과 불을 가지고 논다. 오랜 시간 철봉을 자르고 두드리고 열에 녹이고 용접을 해대면서 공간과 매스, 재료의 물성을 생각해본다.
그는 작은 기본 단위를 무수히 반복해서 매스, 공간을 만들었다. 일종의 콜라주 조각이다. 빈 허공을 철 조각들을 채워서 덩어리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순수하고 자기 충족적인 형태들이다. 하나의 철봉에서 시작해 선과 면의 단위들이 모여서 이룬, 집적된 구조물은 박스형이나 기둥, 원형의 기본 도형의 형태다. 원통으로 된 철을 납작하게 펴내고 이를 잘라서 다시 연결하고 맞춰나가면서 공간에 부피를 만들어 세워놓는 이 방법론은 철이란 물질의 물리적 성격을 다양하게 펼쳐놓는 일종의 실험으로 다가온다. 우선 철이 불에 녹으면서 만들어지는 우연적인 효과로 표면에 다양한 질감을 낼 수 있어 ‘살아있는’ 표현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특성이 그것이다. 또한 작가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형태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차원에서의 용접기법이 적극 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철 조각은 철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외부의 대상을 모방하거나 특정한 형태를 재현하고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도형의 형태로 부풀려 공간을 채우고 덩어리를 추구하는 작업이다. 그런 사이로 유기적이고 우연적이며 틈새와 구멍이 개입하고 얹혀지도록 배려했다. 압축해보면 매스를 해석하고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조각의 요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조각은 모더니즘조각의 어법과 방법론에 충실하다.
그런데 그가 만든 형태, 덩어리들을 이룬 단자들, 사각형 내지 선으로 이루어진 철 조각들은 불과 압력에 따라 평평해지는 동시에 굴곡과 요철효과를 부드럽게 내장하고 있다. 납작한 평면 안에 무수한 터치, 자국들이 그림처럼 시선에 호소하듯 깔려있고 불, 열이 가해진 부위는 또한 색상의 변화도 보여준다. 철의 주름, 그리고 보는 시선의 각도와 조명에 따라 철의 표면, 피부는 유동적으로 흐르고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철의 피부에 용접을 이용 그림을 그린다. 마치 로댕 조각의 표면이 그러하듯 이 이 철의 표면은 변화를 거듭하며 눈의 반응을 고대하고 나아가 촉각적인 표면을 드러낸다. 그 표면은 또한 가장 단순하고 집약적인 노동은 손, 불과 만난 흔적들로 마감되어 있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노동의 과정에 형성되는 흔적과 그 결과를 중요시하고 있다. 철과 물리적 압력, 화학적 하중이 가해진 상처들이다. 최기석이 작품은 온통 철봉을 두들기고 펴낸 자취들이다. 철의 피부에 지문처럼 작가의 몸짓이 가득 새겨져 있다. 그 몸짓은 작가의 주어진 공간을 채워나가는 보이지 않는 힘, 물질과 작가가 만나서 일어난 사건, 자연계의 물리적 법칙과 속성에 대한 증거, 작업에 임하는 성실성과 진지한 자세의 녹여냄과 그로인한 어떤 품격으로까지의 비약 등등을 이루 셀 수 없이 떠올려준다. 여기서 그의 모더니즘적 조각어법과 형식주의에 충실해 보이는 지점이 다소 균열을 일으킨다. 그것은 숨통처럼, 유기적 생명체의 비약처럼, 상상과 여운이 가능해 지는 발화점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추상조각의 진정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안개처럼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