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
세월의 더께를 헤아리며 오백년 조선, 그 마음 한 자락을 세긴다
데라우치문고 보물전 4.24-6.11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기세만장한 붓글씨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 짙푸른 문장의 바다에서 나아갈 곳 몰라 막막했다.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은 ‘한묵翰墨의 임해林海’였다. 이 울울창창한 숲과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으려면 행장을 꾸리기 전에 ‘독도법’과 ‘항해술’을 익혀야 마땅하다. 그것이 길 나선 자의 의무이건만, 나는 백면서생보다 못한 만용을 부리고 말았다. 견문은 커녕 낭패만 당한 꼴이었다. 원문을 읽어낼 터수는 못 되니 애초 욕심부리지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조선 명현들의 사승관계나 사회문화사적 배경 정도는 벼락치기 공부나마 하고 갔어야 옳았다. 하기야 지도와 항로표지를 해독할 능력이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무릇 먹물 흠향하는 것을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삼는 자라면 사료 한 조각에 담긴 자투리 지식이라도 귀히 여기고, 관련 서적을 뒤지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양식 있는 관객의 처신이 그러할 것이다. 물색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전시장을 표랑했던 나는 선인의 예의염치 앞에 뒤늦게 부끄러웠다.
다시 전시장을 찾았을 때는 길동무를 앞세웠다. 서지 전문가인 김영복은 내가 아는 한 ‘걸어 다니는 박물지’다. 그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소식이라도 듣고 귀동냥이라도 할 셈이었다. 그는 탄성을 질렀다. 성삼문의 행초를 읽으며 눈을 반짝였고, 서경덕의 오언절구를 음미하며 ‘좋을시고’를 연호했다. 연대 이른 서첩에서 풍기는 고졸한 맛에 취한 나는 좀이 슬대로 슨 조선종이에서 5백년 세월의 더께를 헤아릴 뿐이다. 서경덕의 초서는 운필의 멋이 출중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으려는 단아한 자제自制가 엿보여 그의 풍도를 알게 했고, 김시습의 칠언시는 막힘없이 호활한 붓놀림에서 뜬구름 같은 그의 행보를 떠올렸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는 옛말이 매죽헌과 화담 그리고 매월당의 조각 글에서조차 여실하니 고인의 수적手迹을 마주하며 깨우치는 즐거움이 어찌 소소하다 할 것인가. 또한 옛 글씨는 무엇보다 사료의 가치로 중하다. 사명대사의 묵적만 해도 그렇다. 1605년 지인에게 보낸 대사의 간찰을 꼼꼼히 살피던 김영복이 “여기 ‘해초海椒’가 나오네요”하며 반색했다. 해초는 고추다. 사명대사가 고추를 구해 친지에게 어렵사리 보낸다는 내용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고추가 임란을 전후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것을 확연하게 알려주는 셈이다. 백김치만 먹던 조선 사람이 양념 김치를 맛보게 된 것도 그 어름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사료 가치는 출품작에 편재했다. 『석봉필론』은 한호의 서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려주는 희소한 글이고, 엄청난 양의 서찰과 문서는 조선의 인적 교류를 위시한 생활사 연구에 큰 몫을 한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
지나친 안복은 급체를 부른다. 한두엇 방을 채 돌기도 전에 나는 소화 불량기를 느꼈다. 이참에 다 곱씹기에는 차려진 밥상이 너무 풍성하다. 다음으로 미루려던 차에 김영복이 손짓을 했다. 정조의 어필을 본 그가 한 수 가르친다. 정조는 관서하기를 ‘萬川明月主人翁’이라 했다. 누가 자신의 호를 이렇게 쓸 수 있으랴. 금수강산의 풍치가 다 대왕의 것이란 얘기다.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인조의 예를 덤으로 떠올리며 우리는 부러워했다. 인조는 호를 ‘江山風月之主’라 하지 않았던가. 과시 군주의 배포와 국량에 합당한 자호自號로되 또한 소동파의 소견이 겹쳐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동파는 세상 모든 것에 다 주인이 있지만 청풍명월만은 주인이 없어 모두가 만끽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이 내린 정취를 독과점하는 군왕의 도는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그것을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를 기념하여 제작한 『정축입학도첩』, 그리고 영조 때 청계천을 준설한 역사가 기록된 『어제준천제명첩』의 반차도 등에서 추량해 보았다. 이들 기록화가 웅변하는 바는 궁정의 프로토콜과 세리머니이다. 그것은 가차 없이 엄정하고 터럭 한 올 거스름 없이 반듯한 질서가 반영된 것이다. 이를 전제 치하의 누습으로 치부하기보다 위중한 사직을 감당하는 신분이 지녀야 할 미덕으로 볼 수는 없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금세기까지 작동하는 유산 아닌가.
길동무 덕을 톡톡히 본 나는 며칠 뒤 선배와 함께 전시장에 또 갔다. 선배는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 훈이다. 데라우치 문고 전시에 인조대 인물이 무더기로 나왔다고 운을 뗐더니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는 몇 년 째 병자호란에 빠져있다. 조선시대, 아니 유사 이래 ‘1636년 겨울의 참혹’을 넘어설 만한 치욕의 역사가 있었던가. 일제의 병탄을 제외한다면 병자호란만한 치욕은 찾기 어렵다. 그는 그 치욕의 전말을 줄줄 꿰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청음 김상헌의 『남한기략』을 다시 윤독한 것도 얼마 전이다. 그는 청음을 비롯해 지천 최명길과 백헌 이경석과 죽남 오준 등의 육필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청음과 지천의 글씨는 지척에 놓여있었다. 그것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거리가 아니다. 전시 관계자의 디스플레이가 놀랍고 얄궂다. 후금의 무도한 오랑캐 짓을 고이 넘길 리 없던 청음은 통한의 항복문서를 들고 있던 지천에게 달려가 그 문서를 갈가리 찢으며 대노했다. 지천은 찢어진 문서를 주워 풀로 붙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광경을 두고 ‘찢은 사람도 옳고 붙인 사람도 옳다裂之者可 拾之者可’고 말했다. 사직의 운명은 찢느냐 붙이느냐 하는 결단 사이에서 위태로웠고 인조의 갈등은 두 사람 사이에서 깊어갔다. 유리장 속에 나란히 놓인 청음과 지천의 글에서 조선의 급박한 운명은 가늠되지 않았다. 청음의 칠언시는 봉별의 회한을 읊을 따름이다. 다만 시전지에 써내려간 지천의 차운시는 ‘머나먼 변경 세월은 더디고 / 외로운 신하 눈물만 흐르네 / 고향 동산은 천리 밖의 꿈 / 뜬 구름 세상은 백년의 슬픔 / ...’이라고 고백해 심양에 끌려간 심회가 어스름하게 비쳐질 따름이다.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오달제가 심양에서 남긴 절명시 ‘...땅이 넓으니 글월 부치기 어렵고 / 산이 깊으니 꿈조차 더디구려...’ 운운이 지천의 시의와 유사해 비극 한 토막을 상기할 수 있었다.
삼전도 비문의 주인공 백헌과 죽남이 남긴 시문과 간찰도 마찬가지다. 청 태종의 위업을 찬양해야 했던 백헌은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뒷날 우암 송시열의 통박을 샀다. 언 손을 녹여가며 썼다는 백헌의 시는 ‘시나 쓰며 지낼 뿐, 살아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그의 유려한 행초에서 전란의 풍진은 보이지 않았다. 죽남의 간찰은 습윤한 먹색이 지금까지 또렷한 초서로 당대 최고의 기량에 손색이 없다. 그는 비문을 쓰고 나서 울분에 못 이겨 돌로 자신의 손을 짓찧었다는 야사가 회자될 만큼 상흔이 깊었던 인물이다. 이 충무공의 훈적을 비문에 썼다가 뒤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쓰 집안의 묘당에까지 글을 써 보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그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유독 침울하다. 전시장에서 김 훈은 입을 닫았다. 그는 유묵의 행간에 보이지 않던 역사의 치욕을 홀로 간취한 것일까.
명가의 그림이 전시된 방에 들어서서 우리는 비로소 굳은 안색을 풀었다. 학림정 이경윤의 그림을 모은 『낙파필희』는 음풍농월의 세상을 그렸다. 인생사의 간난신고를 건너 한유한 풍류의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연자멱시도> 앞에서 나는 유쾌했다. 거문고를 든 동자를 앞세운 노인은 나귀 등에서 한참이나 턱수염을 비벼대고 있다. 이호민의 제시에 이르기를, ‘수염 비비며 시구를 찾아 고심하느라 / 나귀 등에 몸이 구부러졌네 / 버들바람 부는 것도 모르고 / 다리 서편인지 동편인지도 잊었구나’ 했다. 유몽인은 한술 더 떠 ‘...수염을 하도 비벼대어 끊어지려 하네 / 새로운 시를 몇 수나 읊었나...’라고 놀린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노인은 애꿎은 수염만 연신 만지작거린다. 이를 두고 옛사람은 ‘고음苦吟’이라 했던가. 하지만 산천경개를 주유하는 선비가 시상이 막힌다면 시재詩才를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강산은 시인을 속이지 않으니 비 오거나 개이거나 그 자태는 하나 같이 시상을 돋운다. 그래서 송나라 양만리는 ‘문 닫고 시구 찾는 건 시 짓는 법 아니라네 / 길을 나서면 절로 시가 생기는 것을’이라고 읊었다. 길 나서서도 끙끙대는 노인을 변호할 거리는 없어 뵌다. 인조대 문인 김시진은 꽃 지고 새 우는 경치를 보면서도 시를 못 적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고 했다. 그가 남긴 시의 마지막 두 구는 이렇다. ‘졸다 가다 때로 시상 떠오르지만 / 산중에 붓 없으니 적을 일도 없을 터’ 그렇지, 붓이 없다면 모를까, 동자까지 거느린 노인이 지필묵을 챙기지 않았을 리는 만무할 것이니, 안타까울 손 수염이여, 주인 잘못 만나 이제 민둥턱이 될 팔자로구나.
경남대학교가 소장한 데라우치 문고의 일부를 선보인 이번 전시는 올해의 수작이 분명하다. 욕심대로 하자면 출품작을 주제별로 세분해 열 번이건 스무 번이건 거듭 전시해도 좋을 터이다. 아쉽기에 다음 기회가 기다려진다. 서울서예박물관 바깥에 걸린 현수막에는 이 전시의 제목이 적혀있다. ‘시 서 화에 깃든 조선의 마음’이다. 울분과 비탄 그리고 열락과 풍류가 5백년 조선의 마음을 적셨을 것이다. 세월의 염량이 다르지 않으니 오늘을 사는 후손도 그 마음 한 자락씩 지니고 산다.
서울아트가이드 20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