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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 캔버스가 생명을 꿈꾸다
김 만 석│미술평론가
꽃이 피기 직전, 꽃은 가끔 외설적인 포즈로 눈을 사로잡는다. 완전히 만개한 것도 아닌데 직전의 자태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낸 듯, 꽃을 꺾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 차라리 그 외설적인 자태 때문에 꽃은 훔쳐보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으로 눈을 앗아버린다. 꽃이 펼쳐 보이는 외설 앞에서 사물을 인간의 가치로 질서지우거나 순위를 매기는 일 따위는 무력해져 버린다. 인간의 가치판단 능력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작 인간적인 가치일 뿐이지 꽃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와는 무관할 따름인 것이다. 즉 '예쁜 꽃'이란 표현은 꽃 자체와 전혀 관계없는 인간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외설이란 인간이 사물이나 자연을 판단하는 상식적인 미감을 박살내도록 유도하거나 일상적인 미적 판단을 짓이기는 전혀 다른 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꽃 그 자체는 인간에게 외설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이 외설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 꽃을 아름답다고 명명함으로써 우리 삶의 내부로 이끌 수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꽃을 재배하거나 가꾸고 감상하는 일 등등은 외설로서 꽃을 인간화한(혹은 문명화한) 결과이거나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결과라는 것이다. '꽃'을 (근대적) 과학과 지식을 통해 포획하는 바로 그 순간 꽃이 이미 함유하고 있는 꽃의 또 다른 속성을 은폐하고 동시에 인간적 외장으로 꽃을 치장해버리게 된다. 물론 인간이 이룩해 온 문명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꽃을 인간화한 결과가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면 이 문명화 과정은 비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앞에 주어진 문제는 자연을 인간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속성을 '표현'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하여, 이는 오직 예술이 담당할 수 있는 문제이고 특히 미술의 몫이 아닐 수 없다. 김춘자의 붓과 캔버스가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에 집중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강렬한 색체와 외설적으로까지 보이는 캔버스의 내용이 지배했던 초기의 작품들이 자본주의적 형식이 강력하게 진전시켰던 삶의 기계화 혹은 산업화가 배제해왔던 '자연'을 색다른 방식으로 '선언'해왔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눈'이나 '성기'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산산이 부수어 버리고 사물과 자연에게 '눈'과 '성기'를 되돌려 준 것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성취가 아닌 셈이다. 따라서 그녀의 회화는 자연을 문명의 바깥에 두거나 문명이 자연을 배제함으로써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형식을 날카롭게 해부하기 위한 예술적 대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초기에 그녀의 회화가 취한 전략이 당대 사회와 맞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둘러 말하자면 그녀의 회화가 공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냈던 선언과 부르짖음이 폭력적으로 삶의 형식을 구성했던 당대의 사회구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삶의 형식이 면밀하게 급변하는 오늘날에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수직적인 관료제와 딱딱한 인간관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캔버스의 평면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고 유연한 축적을 가속화하는 지금-여기에서는 이와 달리 '부드럽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김춘자의 회화가 이전보다 더욱더 미세하고 섬세한 영역으로 옮아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부각된 것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를 아들이나 딸로 부르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삶 내부로 완전히 포획된 것처럼 자연도 더 이상 문명의 바깥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을 통해 문명의 '바깥'으로 이행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본과 문명의 내부로 완전히 장악된 '자연'을 귀환시키고 무력해진 자연을 다시 전복적인 방식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생명'을 캔버스 전면에 내세운다. 그녀가 초기에 보여주었던 도상들이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다소 기하학적인 딱딱함이 현실과 그대로 맞부딪히며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면 이제 한 없이 공중을 흐느적거리며 날아가고 있거나 물결에,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면서 현실에 섬세하게 개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몽상'이나 '꿈', '잠'이 캔버스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부유하는 생명에 접속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성과 식물성이 경중을 지니지 않는 위상을 지니며 화폭에 배치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생명을 판가름하는 분류학과 무관하게 생명 그 자체에 도달하려는 그녀의 전략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생명에 대한 탐색이 존재에 대한 탐색과 다르지 않다면 그녀는 부유(浮遊)의 존재론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생명이 고착화되어 있거나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명은 흘러 다닐 때에만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터이고 일상에 붙박이장처럼 놓으려는 반생명적 논리에 날선 비판을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아주 미세한 영역에 포커스를 맞춘, 그녀의 현미경 캔버스는 몽상과 꿈이 부유하는 생명을 띄우는데 부드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러나 거대한 함성으로 위반하고 이탈하면서 사물과 자연에 제 생명을 돌려준다.
따라서 미시적 삶에 눈을 뜬다는 것은 그녀에게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눈뜸을 일컫는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일상 안에서 생명이 갑작스레 엄습할 때, 아니 외설적으로 엄습하는 그녀의 캔버스에 눈을 사로잡히더라도 놀라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물론 그녀의 캔버스가 마력을 발산하는 방식에는 어느 정도 원근법적인 태도가 배어 있음은 주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을 전경화하는 방식이 원근법적이라는 것은 생명을 다시 인간의 눈을 통해 중심화할 우려를 불식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캔버스가 흘려보내는 생명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생명은 근원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성을 지닌다는 사실과 캔버스가 내지르는 소리 덕택이다. 그러므로 잠자는 소리 그러면서 깨어나는 소리, 부유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귀를 닫지는 말자. 그저 낯선 생명이 지닌 외설적 숭고함과 생명의 어떤 독특한 리듬에 깊이 침윤되어 보는 일만이 허용될 따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