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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문제, 삶의 메타포, 교차와 양면성- 제라르 슈리게라(Ge′rard Xuriguera)
역자 : 부산대학교 불문학과 교수 박형섭
안정숙의 캔버스에는 비구상을 탐험하는 길 저편에 현실을 공식화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보다 폭넓은 해석의 자유를 위해 미학적 단정의 카테고리를 거부하는 듯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란 어떤 지시 대상을 환기하기 전, 혹은 그것에서 벗어나기 전 그 의미작용에 필연적인, 타협할 수 없는 규칙들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 규칙들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통찰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개인적 터치에 능숙하며, 그 통사론과 의미론의 중첩을 식별할 줄 아는 명석함을 지녔다. 그래서 붓의 터치 행위는 수많은 교차와 노정들이 만나는 합류점에서 구성된다. 동시에 그것들은 양면성을 띤 이미지들을 취급함으로써, 혹은 그 최종적 결과들 속에서 작가가 지닌 문화의 감광판과 기억의 충동으로 회귀된다.
또한 자신이 오래 전부터 즐겨 사용해왔던 몇 가지 수법들, 즉 리듬, 색깔, 충돌, 융합, 몸짓의 소용돌이 등을 포기했으며, 또한 지하에서 연극적 메아리가 울리는 듯한 격렬함을 단념했다. 화면에서 쓸데없는 군더더기들을 몰아내고 화면 위에는 유려함이 유지되고 있으며, 부드러운 울림이 솟아난다. 그렇다고 해서 비(非)색채에 경도되거나 절제된 범위, 정확한 기준을 멀리하는 법도 없으며, 색조의 경제성이나 대조적 취향도 저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화면으로부터 속이 투명한 듯 가벼운 하부구조의 욕구에 부응하는 인상을 받는다.
오늘날 용해하는 추상작용, 힘 있는 추상작용은 흔적의 문제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그녀의 투명한 천 저편으로, 그리고 선영(線影)을 남긴 범위, 구멍 뚫리고 가장자리가 해져서 너덜너덜한 형태의 모습이 특징을 이루며, 그것들은 재귀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며,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련의 몽타주들 속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색다른 감각의 원천들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적으로 밴드를 붙인, 무늬의 지도로 이루어진 원으로 인도된다. 마치 그래픽의 사화집(詞華集)에 샘물이 흐르는 듯하다. 물결무늬, 얼룩반점, 가느다란 섬유 등은 벌이 분봉하듯 흐트러지며, 움직이는 동맥의 집합체, 모세관 모양, 지각변동 따위로 인한 광맥의 혼합, 음화의 찍힌 자국, 인영(印影) 등이 스스로 형체를 드러내며 그 망상조직을 더욱 완성의 단계로 이끈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그녀가 풍요와 헐벗음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의도와 일치한다. 그것은 예술가의 관심이 고르키(Gorky) 스타일의 반복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 직접 독자에게 말하기를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수많은 해석의 윤곽을 포착할 수 있다. 우선, 이 변화무쌍한 조화의 밀림 속에서 구성•해체의 능력이 드러난다. 그것은 일종의 풍경•낯선 느낌을 환기시킨다. 거기에서 흐릿한 파티션을 응축시키거나 끝이 넓게 벌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어서 우리는 조직적인 반영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것은 충만하게 유입된 물질 속에 질식한, 인간의 뇌 혹은 불확실한 실루엣의 측면을 상세히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것들의 출현은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사라짐과 솟아남을 통해 존재•부재에 관해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이 아니라 침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쥘 발레스(Jules Vall럖)는 “공간은 언제나 나를 침묵하게 만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결국 침묵은 실존을 재창조해주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차이, 따로 떨어진 혹은 연장된 선의 유지, 반음계(半音階)의 혼합, 빛들을 가로지르기, 형태의 진동 등 안정숙은 더 이상의 보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자신의 심오한 자연의 흔들림을 환기시키는 데 어떤 또 다른 구실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완전하고 단순한 자연이 있다. 게다가 작가는 사물들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변화하고 있음도 지나치지 않는다. 결국 그녀의 작품에서 자연의 실천은 반(反)서술적인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인 사유를 불러오는 것이다. 극동아시아에서 자연 지배의 역동성이 삶의 메타포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말없는 진동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안정숙의 오리지널한 환경과 더불어 그녀가 말하는 공모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