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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빛, 치유하는 그림
이재언│미술평론가
화가 곽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오랜 세월의 국외자 흔적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미니멀 아트에 개성적 아우라를 적절히 가미한 후기미니멀 양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모습이 그것을 말해준다. 캔버스를 오려내기도 하고, 다른 종이나 헝겊을 붙이기도 하며, 꿰매고, 구기고 하는 등등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화단에서 그 연령의 작가들에게 흔한 모습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바로는 서구식 방법에 익숙한 작가의 개성적 선택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들은 무슨 양식적 담론이나 오브제의 미학을 말하기 이전에, 지극히 작가만의 내면적 인과관계의 부산물임을 곧 깨닫게 된다. 즉 작가가 국외자였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나 방법들이 작가 스스로 자각하고 의식한 미술의 보편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정형의 캔버스 상태를 벗어나 모종의 형태를 가진 조각과도 같은 캔버스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단순한 부조일 수도 있으며, 다중의 화면이 중첩된 볼륨이 있는 그림일 수도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표현’의 범주는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다. 작가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사각이나 원, 호 등의 기본적인 도형들의 구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한 구성적 추상은 물론 산과 바다, 해와 달 등의 자연 이미지들이 구성적으로 환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출발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작가는 많은 유기체적 부정형들을 도입하고, 아울러 온화하고도 비의적인 색채들을 곁들인다. 그리하여 작가의 화면은 기하적 구성과 유기체적 부정형들을 조합하여 서정과 감성이 풍부한 화면을 일구어나가면서도 이지적인 구조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빛이다. 오랜 기간 작가는 빛을 주제로 작품을 해왔다. 그 빛의 내용은 물리적 차원의 빛에서부터 생명과 진리로 상징되는 절대자의 이데아적 빛으로까지 확장된다. 해와 달을 연상케 하는 도형들이 있는가 하면, 불꽃처럼 산화하는 내면의 에너지, 그리고 어디서 오는 지 알 길이 없는 거대한 빛의 줄기들… 그 빛들은 마치 우리의 어린 아기 피부처럼 감미롭고 부드러운 선율로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듯 다양한 빛은 육체적, 나아가 영적인 치유의 매개이자 주체가 된다. 그림 자체가 표현하는 주제도 치유이지만, 그림 그 자체도 치유의 매개체로 기능할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작가의 이런 주제와 동기는 바로 작가 개인사와도 많은 연관을 갖고 있다. 삶의 과정이 순탄한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특히 타국에서의 오랜 생활을 통해 겪은 고충과 갈등은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절실한 현실이자 곧 그림의 화두이다. 작가 작품에서 치유(healing)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이다. 화면에 가해진 찢고 꿰매고, 싸고 하는 등의 행위는 결국 물리적 치유의 과정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상처를 싸매는 붕대와 같은 밴드가 캔버스에 붙여져 있는 모습들이 치유의 개념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는 육적인 치유보다는 정신적 혹은 영적인 치유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치유 혹은 용서의 주체를 작가는 ‘빛’ 즉 ‘치유의 빛’(healing light)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신자인 작가에게 빛은 창조주의 본질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며, 아울러 진리와 생명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들 가운데 근작들에서 성경의 낱장들이 콜라지로 화면에 붙어 있는 모습들이 자주 목격된다. 전에 석고붕대가 했던 역할을 바로 이 성경 낱장들이 대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수술과 같은 물리적인 치료에서 영적인 치유의 문제를 의식하고 있음이 충분히 감지된다. 이런 대목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성경 구절은 경험적인 차원을 넘어서 좀더 불가사의한 혹은 비의적인 면을 여운처럼 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빛은 우리에게 세상을 밝음과 어둠에 속한 것으로 나눈다. 그런데 작가의 화면을 보면 세상을 밝음과 어둠, 혹은 흑과 백으로만 나누어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화면에서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뚫린 캔버스 또한 무 혹은 없음이 아닌 것도 이 컨텍스트에 기인한다. 요컨대 영원한 고착이 아닌 유동적 세계관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실제로 작가의 화면은 ‘루빈(Rubin)의 그림’에서 형(figure)과 지(地,ground)가 서로 교환되는 착시와도 같은 양상을 일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오려진 캔버스의 부분이 결코 무(無), 혹은 없음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오려진 부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례로 원으로 오려져야 할 부분이 반만 오려진 채 접혀 그 이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간혹 보인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에게 마치 어떤 언급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그 오려진 반원은 우리가 결코 여백 혹은 지(地)로 간주할 수 없는 모종의 의미의 역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네거티브 공간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 대한 상징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작가는 밝음과 어둠, 앞면과 배면, 입체와 평면 등의 상호작용을 중요한 원리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고귀한 생명의 유희로 승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절대자 혹은 초월자의 실재와 실체에 조심스럽고도 진지하게 접근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누가 뭐래도 한민족 원형적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니 더욱 애착을 갖고 심화해가는 한국인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대자연의 모티브로부터 출발한 것이나, 여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온화하고도 뉘앙스가 풍부한 색상과 톤을 즐겨 구사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국 여성의 규방문화 요소들과도 유사한 점들을 자신의 그림에 적절히 투영시키고 융합해내고 있는 점 또한 눈여겨 볼만한 요소들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지성과 감각은 시대적 패러다임과 담론에 능동적인 참여를 펼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서구 예술의 담론과 동양의 미의식을 이상적으로 잘 조화시키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유의 빛’이 작가 자신의 내면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국의 많은 그림 독자들이 함께 치유의 경험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이번 한국 전시가 여러 가지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치유의 빛
엘리자베스 스스만│뉴욕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트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곽수는 젊었을 때 대학에 가기위해 미국에 온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지내면서 학업을 마치고 결혼하여 외딸을 기르며 작품생활을 했다. 하지만 2000년에서 2002년 동안에는 자신이 태어난 고국(항구도시인 부산 출생 1949)인 한국에서 지냈다. 고국에 돌아갔을 때 그는 어릴 적 기억 속에 담아두었던 한국의 고향산천과는 다른, 변화된 한국의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변화도 그가 어릴 때 부터 지녀온 한국에 대한 염원을 지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곽수는 한국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사실은 20년동안 미국에서 함께 살아온 존경하는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한국에 대한 생생한 애정을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1970년대 그가 미술에 전념하기로 작정하고 시카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미술석사 공부를 할 때, 학교교육이 서양미술사와 서양미학에 치우치는대도 그는 한국, 중국, 일본미술을 본 바탕으로 한 작품표현의 방법을 모델로 삼았다. 70년대에 미술을 공부하였기에 그 당시 미술재료와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효과를 중요시 하는 교수들로 부터 감명을 받으면서, 서양현대미술과 추상미술의 미학에 관한 영향속에서도 (전쟁후기의 유명한 미술평론가인 헤롤드 로젠버그 씨의 평론을 공부하면서 잠간동안 직접 그 분의 수업을 받았다) 그의 지적인 추구는 중국미학 을 겸하였다.
과연 곽수의 한국체류가 그의 최근 추상작품에 아시아적인 요소를 강화했을까?
생동감이 넘치는 화면, 춤추는 원과 궁형의 형태들, 질감이 강한 화면과 맑은색상-어둡고 밝은 하늘색, 황색, 흰색, 검정색-이런 작품들이 최근에 고향인 아시아로 다시 돌아갔다온 작가의 작품임을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이다. 곽수의 회화적인 단어는 현시대의 대범한 추상스타일 작품, 예를 들자면, 엘리자베스 머레이 (Elizabeth Murray), 메리 헤일만 (Mary Heilman)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과 쉽게 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그 작품들의 깊은 복합성과 구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곽수는 자주 화면을 짜르고 꿰매고, 형상과 여백이 짤려 나오고 다시 캔버스로 그 뒤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짤라진 부분의 밑에 있는 나무 액자 받침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화면이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짤라진 것을 낚시줄로 다시 꿰매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수법이 서양 미술사에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수법에 가까운 화가라고는 50년대와 60년대에 화판을 짜른 작품을 한 이태리 화가인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만을 생각할 수 있다. 곽수는 이 작가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곽 수의 창작과정을 보여주는 추상작품이 영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그녀의 작품들의 명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소호에 위치한 준 켈리 화랑 (June Kelly Gallery)에서 전시하는 작품들의 명제는 모두가 “치유의 빛” 이라고 되어 있다. 곽수의 치유라는 단어의 사용은 아시아적인 치유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것은 참된 치유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녀의 작품에 나오는 빛은 보이는 해와달(작품에 보이는 원의형태들) 이지만, 또한 그 것은 영적인 힘, 인간본연의 에너지, 은유적으로 세상의 빛, 인도하는 빛, 하느님의 현존 등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에 근거를 두고, 달, 물, 파도, 무지개 등에 대한 기억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받아서 창작 된 치유의 빛 작품들은 이런 은유적인 메세지를 주고 있다.
작품 구상의 아이디어는 자연에서 받았어도 이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닌 곽수가 그려내는 공간에 대한 신비스러운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빈 공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화면의 한 구멍, 화면의 부분이 짤라져 나가고 없는 것, 베어진 것, 형상이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이다. 이런 빈 공간들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 곽수 작품의 긍정적인 면이다.
나에게 있어 곽수 작품의 경탄할 면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종이접기, 바느질, 조각천의 재활(조각보), 상처를 꿰매는 것과 같은 상식적인 행위의 과정을 통하여 그의 아이디어를 작품화 시킨 점이다. 부산바다를 상기시키는 푸른색의 “치유의 빛 #3” 의 오른 쪽 원은 칼로 찢어진 후 다시 낚시줄로 꿰매어졌다. 이 런 재료나 창작의 한 과정마다 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자연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의 모든 과정과 요소를 중요시 여기는 곽수는 또한 그림이 보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있음을 믿는다. 이 그림들은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또한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통하여 치유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