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후 원 : 주한 프랑스 문화원
기획자 : Esra, Joo 에스라 주
에스파스 솔은 국내의 중진 작가는 물론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하여 각종 문화 행사를 유치 할 수 있는 전시장 규모 110평의 시설을 갖추고 2006년 여름의 끝자락에 문을 열었다. 오는 9월 9일부터 열리는 첫 기획전인 “욕망을 향한 일곱개의 시선”을 시작으로 에스파스 솔은 지속적으로 역량 있는 국내 작가를 발굴하는 한편, 국내작가들의 국제무대 진출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해외의 훌륭한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함과 동시에 한국 현대 미술계의 요람으로서, 미술문화를 전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현대미술은 교류가 잦은 미국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미술계에 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던 탓에 국내 미술 애호가들은 미국적 미술에 더 익숙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국내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욕망을 향한 일곱 개의 시선전 Seven Perspectives on Desire”에서 소개되는 작가들은 현대미술의 운동의 중심축으로서 중요한 대표적인 작가들로 퐁피뚜 미술관, 쌩 떼띠엔느 미술관(프랑스 2대 미술관 중 하나)등 유수 미술관,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바 있으며, 한ᆞ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프랑스 문화원이 함께하는 전시이다.
에스파스 솔 Espace Sol이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기획전에서는 ‘몸’이라는 화두와 몸이 처해있는 주변에 대한 작가들의 견해가 회화와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며 몸에 대한 담론을 끄집어낸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일곱 작가 모두 몸에 대해, 그리고 사회와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접근해 간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이들 작가들이 가진 견해나 역사적, 개인적 히스토리는 너무나 다양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를 한자리에서 만나 본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7인의 작가로는 필립 파비에Philippe Favier, 자멜타타Djamael Tatah, 빈센트 꼬르페 Vincent Corpet, 삐오트르 끌레멘시비츠 Piotr Klmensiewicz, 미카엘 미루노비츠 Mihael Milunovic, 한명옥Han Myungok, 김형기 등으로 특히, 자멜 타타의 경우, 평론가와 대중으로부터 동시에 인정받는 작가로 인물이라는 구체적 형상이 인간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대신 화면에서의 하나의 구성요소인, 색 면으로써 인지되는 색면 추상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빈센트 꼬르페는 인간과 동물, 주변 사물의 형상들을 분해했다가 한 화면에 재 조합하는 형태적인 유희를 통하여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빈센트 꼬르페가 형태를 분해하고 재 조합하는 유희를 즐기는 반면, 필립 파비에는 긁기와 파내기의 기법 등으로 화면상에서 마티에르를 내어 재료의 유희를 즐긴다. 또한 독특하게도 그가 작품의 소재로 채택하고 있는 해골은 음울한 죽음의 이미지로서가 아닌 유머러스하고 친근하게 받아들여 진다. 파비에는 포토그램
(1) 이라는 기법을 이용하여 음울한 죽음의 이미지로서의 해골이 아닌 ‘유쾌한 해골’로 재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삐오트르 끌레멘 시비츠는 의자나 사다리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색과 화법을 달리하여 화면에 등장시키고 있는데, 비어있는 의자나 사다리는 감상자로 하여금 이들의 물성이 아닌 화면상의 하나의 모티브로써 작용하며 이러한 모티브와 연관된 의문을 갖게 한다.
한명옥은 털실과 방울 종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특유의 여성적 감성으로 몸을 악귀로부터 지키고자하는 ‘보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퍼포먼스와 설치로 보여준다. 그녀의 작업은 홍합이나 털실, 스티로폼 판 등을 재료의 속성적 변형 없이 소박함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르떼 포베라와도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안 되는 한국의 미디어 아트 대표주자 중 한 명인 김형기는 관람자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작품과 현실 사이에서 묘한 존재감에 빠져들도록 유도하는 인터렉티브한 영상작업을 선보인다. 또한 미카엘 미루노비치는 부환경에 좌우되는 몸을 표현하고 있는데, 퍼포먼스를 한 뒤 이를 사진으로 남겨 전시함으로써 행위와 시각의 동적이면서 동시에 정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Djamel Tatah 자멜 타타-구상과 추상의 경계 “나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사라지는 것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작품은 죽음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표현한다는 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사랑한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삶을 영속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라질 때에는 살아있을 수 있지만, 죽을 때에도 존재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되풀이 된다는 것은 죽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탄생과 관련한 순수한 행위이다.” 자멜 타타는 인물을 그리면서 유기체라거나 인간성의 측면에 대해 고뇌하지 않는다. 인격의 부재는 작품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다. 잔인한 사람인지 아니면 교양 있는 사람 인지를 알려주는 인격이라는 것이 작중 인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화면은 등장인물로 바글거리지도 않고, 풍경이나, 자연물, 동물들도 등장하지 않는, 비어있는 공간에 인간 형상의 자취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데뷔 때부터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해왔는데, 화면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려진 인물의 의복은 획일적이고 어두운 색으로 채색하며, 인물과 배경 사이는 동떨어져 보이며, 배경은 단색으로 칠한다. 회색이나 갈색의 어두운 옷과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벽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느껴진다. 배경과 분리된 등장 인물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어 고독감마저 느끼게 하는데 이와 같은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작품은 추상성을 지니게 된다. 즉, 타타는 구상적인 형태가 그려진 작품이나 추상성을 띄는 역설적 두 가지 측면을 한 화면에 융합시키고 있다.
한명옥 –털실과 홍합껍질로 우리 몸을 지켜줄 안전지대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 한다.한명옥의 트레이드 마크는 실이다. 실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상징으로서, 시간과 일상의 삶에 대한 상념들을 가시화한다. 실은 자체가 가진 유연한 물성으로 인해 돌 위에 기이한 형태로 틀어 올라가 있기도 하고,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재어져 발효를 기다리는가 하면, 정갈한 공양물처럼 그릇 속에 담기기도 한다. 우측의 작품은 실로 사람의 형상을 떠서 벽에 부착하고 그 그림자를 쭉 늘여 놓은 작품이다. 그녀는 실, 신문, 음식, 가사도구 같은 삶의 일상적 소재로 작업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 아르테 포베라의 작가에게 좀 더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예술가는 비범한 사람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유토피아 와도 같이 특별하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되는 일입니다. 더 이상 비범해지려고 애쓰지 않죠. 내 주위의 모든 평범한 것들이 내 삶에 도움을 줍니다. 나는 모든 사물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개입을 통해서 그들의 에너지가 가시화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 한명옥은 ‘홍합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La facon de voir le monde selon les moules’(홍합껍질,실), ‘겨울이야기-그림자’(털실,돌)라는 작품 2점과 ‘0.49 제곱미터의 안전지대’ 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옛날 풍습에 따르면, 한국 조상들은 액운을 막기 위해 자녀의 방에 공을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공들은 빨강, 노랑, 파랑, 녹색 같은 양의 기운을 띠는 색이었어요. 옛날 한국인들은 양의 색이 나쁜 것을 막아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매일같이 라디오와, TV, 신문에서 사고와 테러, 전쟁과 관련한 소식들을 접하는 현대인에게 있어 그들만의 안전 지대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작가는 그러한 생각을 <0.49 제곱미터의 안전지대를 통해 전한다.
빈센트 꼬르페 Vincent corpet -형태의 분해와 재조합을 통한 수수께끼적 유희 무엇을 닮은 그림인가?20세기 말, 근대미술이 회화가 표현해 낼 수 있는 모든 형식을 실험한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에대하여 빈센트 꼬르페Vincent Corpet는 새로운 회화적 실험 방식을 창조하며, 회화가 여전히 그 가능성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약 15년 전부터 나는 회화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해 실명상태에 빠졌다는 비평가들에게 대항하여, 그들에게 망막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그림을 추구해왔다. 나는 형태적인 것을 분해해보았는데 어떤 형태는 나로 하여금 또 다른 형태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분해기법을 통해 ‘겉보기’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빈센트 꼬르페의 분해기법 과정은 형태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는 형태 안에서 몇 가지를 선택한 후, 선택한 것들을 분해 대상이 될 집합체(최초의 형태)에서 추출해낸다. 오브제로 ‘조립’되기 전에,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변이 되는 첫 번째 ‘조립’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최초의 집합체와 형태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종 그림은 부품과도 같은 각각의 형태 모두를 재 집결해 놓은 것이다. 마치 퍼즐처럼 말이다. 빈센트 꼬르페의 작품은 마치 기억의 파편과도 같은 규칙을 벗어난 조각들이 작가에 의해 재 조합되면서 다양한 소통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형태를 변화시키는 ‘놀이’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양을 수정해서 ‘다른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변이 작업은 ‘닮음’과 ‘닮지 않음’이라는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정해진 형태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형태는 윤곽 안에서 근사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양이나 백조의 형태’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양과 백조와 같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고르페는 외관상 닮았다는 느낌을 얻을 때까지 본질적인 형태를 채워나가면서 동시에 닮음을 위반한다. ‘어딘가 부적절해 보이는 닮음’이라는 요소는 관객의 시선을 작품으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빈센트 꼬르페는 이번 전시에서 해학적인 작가의 상상으로 표현된 다양한 동물들의 몸을 분해기법으로 전개한 회화들과 가장假將을 주제로 하는 아이러니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참신하고 신기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입관 없이 아직 명명命名되지 않은 대상들과 무언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삐오뜨르 클레멘시비츠 Piotr Klemensiewicz -몸의 흔적이 담긴 사물? “하늘을 응시하는 의자 또는 하늘에 다다르고자 하는 사다리가 놓여있다. 바디는 이 빈 공간에서 나타난다.....이 모든 것이 수직으로 되어있다. 그림의 배경 자체가 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덩달아 또 하나의 수직적인 요소가 되어버린다. 완전한 동일함. 문명화되고 이성을 지닌 오브제가 된 관객……자리를 잡은 관객 앞에 놓여있는 벽은 딜레마의 장소이다......부재하던 바디는 이제 그림 안에 있다.” 그의 모티브는 집, 의자, 지도, 폴라로이드, 공간점(encombremen)로 20년이라는 작품활동 시간을 고려해 볼 때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최근 덩어리와 색 띠, 사다리가 새롭게 등장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모티브들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나 있다. 주제를 좀 더 다양화 시킬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의 작품에서 모티브가 되는 대여섯 가지의 주제들은 형태나 색, 화법을 달리함으로써 다양해집니다. 전면에 있는 화폭은 깊이가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하좌우에서 일어나는 경우의 수는, 수 많은 주제들을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것 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작가는 의자와 같은 침묵의 소리로 말을 거는 소재를 좋아한다. 그가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사물들은 이들의 기하학적인 형상을 넘어서 이들과 정신적인 유대를 가진 몸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연상작용을 철저히 이용한다. 비어있는 의자에서는 자리를 비운 누군가가, 문의 공간에서는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사다리에서는 부재중인 누군가가 말이다. 그 대상은 모티브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대상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 대상이 군중과 같은 무리에 해당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미지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이미지 뒤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의 작품에서는 모티브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의문이 유발된다.”
필립 파비에 Philippe Favier -유쾌한 해골 필립 파비에 Phillipe Favier는 이번 전시에서, 유리 위에 해골을 그려 넣은 뒤 포토그램으로 제작한 작품들과 거리에 버려진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한 오브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소재에 홈을 파거나 긁어내어 자국을 내는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해골시리즈는 유리 위에 해골모양을 그려 넣은 뒤 그 밑에 인화지를 깔고 빛을 가하여 해골모양 자국을 낸 후, 주황색의 실로 바느질을 하여 완성한 작품으로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이라는 주제는 작가에게는 친근함과 유머의 대상이다.
해골을 통해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일상성을 화폭에 담은 파비에의 작품은 16, 17세기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던 바니타스화와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그는 죽음이라는 우울함에 유머의 유쾌함을 더해 몸의 유한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파비에적인 유머는 프랑스 화단을 열광시켜 그의 작품은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무나 납으로 된 파이프에 선을 새겨 넣고, 흙 위에 그림을 그리며 놀기를 즐겨했다. 돌이나 진흙에 선을 새기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난 내가 자라서 문신 새기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금속에 선을 새기고, 홈을 파는 등의 작업은 그 시절 놀이들의 아바타 일뿐이다. 어찌 보면 판화는 동굴벽화의 맥을 잇는 것이 아닐까? 최첨단의 동굴벽화인 셈이다.
홈을 파는 행위에는 폭력성과 공격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미카엘 밀루노비츠 Mihael Milunovic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미카엘 미루노비츠Mihael Milunovic는 사진, 조각, 설치, 음향,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이다. 그는 일상의 오브제들을 맥락화 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이슈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는 세르비아 출신의 망명 작가라는 배경에 기인한다. 미카엘 미루노비츠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자와 염세주의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인한 자본주의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네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현대사회의 고뇌와 병폐를 겨냥하고 있다.
“지금 시대에는 어떤 종류의 유토피아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역사의 결말’이라 불리는 것이리라. 일부 철학자들은 이를 ‘전쟁의 끝’ 또는 이상적인 사회 구조에 경종을 울리고. 이전 세기가 꿈꾸고 고안한 기능적인 것들로 야기된 죽음들을 부각시킨, ‘20세기 민족 전쟁 최후의 유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희미해진 유토피아 개념의 유산은 세계 평등화와 군사적, 경제적 지배, 미디어 네트워크의 감시를 찬미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유토피아”의 현실은 인류의 자유를 억누르는 일종의 상냥한 횡포이자, 조용한 전체주의이다.”
김형기 -공학과 예술의 만남미디어 아트는 뜨거운 감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과 냉철한 지성을 요구하는 과학 기술이 만나는 융합 장으로 21세기형 창작물이다. 작가 김형기는 드물게 공학과 예술이라는 재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비결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85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회화과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회화와 조각, 판화 등을 넘나들다가 멀티미디어에 정착했고, 다시 파리국립전문직학교에서 정보공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작품에 그림과 조각, 빛과 소리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북동서남N.E.O.S. (1997)”은 입체에 투사하는 작품으로 4대의 캠코더로 반투명 아크릴 박스에 비친 각각의 면을 촬영한 것을 4대의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실제 상황과 같이 재현하였다. 관객들은 이 동영상이 실제로 큐빅의 공간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실재감을 느낀다. 나체로 한정된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고 상상해 보자. 자신의 신체만이 공간상의 존재로 인식되며, 그래서 더욱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집중하게 된다.
벌거벗은 육체의 따스함이 존재를 확인시키는 요인이며, 숨소리가 생명의 초침과 같은 소리를 느끼게 한다. 시계가 없어 생체 세포의 모호한 느낌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인식되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지할 수 없다. 일상의 북적거림에서 벗어나 즐거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때론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며, 공허감이 심해져 타 생존물체를 기대하게 되기도 한다. “We are the Robots”은 얇게 만든 3차원 (데스마스크) 스크린에 프로젝션한 입체 동영상 작업이다. 좌대에 놓여진 오토바이 헬멧에 움직이는 입체 동영상이 상영된다.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조각품이라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 감이 가장 강한 작업으로 살아 있는 조각이라는 3차원 동영상 시스템의 미래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