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림자의 윤곽을 선으로 둘러쳐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림의 기원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다. 그림은 실존하는 대상의 허물 같은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그림은 육체의 직접적인 모방, 몸에서 몸을 떠내는 일, 그러나 그 모방과 재현은 부득이 실루엣과 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사랑하는 연인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지자 숯을 들어 그 경계선을 고스란히 담아낸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후 그 여자는 남자친구의 부재와 상실의 아픔, 상기의 고통을 벽에 남겨진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분명 존재했었던 실재를 연상하면서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림자/윤곽선이 한때 그곳에 있었던 남자친구의 육체를 부단히 상기시켜주면서 눈앞에 환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림자는 실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실제이면서도 실제라고 부르기 어려운 모호한 존재다. 빛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는 분명 허상이고 가짜지만 그것을 무, 부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실제와 기이한 한 쌍으로 겹쳐있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놀이한다.
그림자는 빛에 빚지고 있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도 없다. 그러니까 빛이 없다면 그림도 없다. 빛이 있는 동안 빛을 받은 모든 대상은 어쩔 수 없이 그림자를 내놓는다. 그것은 빛에 빚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내놓는 보상 같다. 그림자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하고 마술 같은 이미지를 선사했다. 어쩌면 그림자를 통해 사람들은 몽상에 잠기고 그 그림자를 또 다른 존재, 자아로 여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림자를 팔아먹은 자는 영혼을 판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나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림자는 실제와 대등한 존재이자 영혼을 머금은 몸의 분신이 되었다.
최영진은 어두운 밤 시간에 건물의 외벽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를 찍었다. 건물의 외벽은 다양한 구조와 재질을 두르고 있고 어디선가 스며 들어오는 빛의 강도 역시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또한 나무들과 풀의 모양도 제각각이라서 그림자 역시 똑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다.
새삼 이 사진을 보면서 그림자가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진을 통해 그림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존재하는 세계와 빛이 만나서 스스로 지어낸 영상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그 그림자는 저희들끼리 만나서 생긴 것이다. 인공의 구조물에 흔들리고 겹쳐지면서 아롱대는 그림자들은 벽에 기대어 춤을 추는 듯하다. 약간의 왜곡과 몇 개의 화면(?)으로 분절되어 다가오는 그 그림자는 실제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 보았을 때와는 무척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물리적 부피와 질량,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것들이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지고 편평하게 펼쳐진 이 흔적은 매우 매혹적이다.
“도시가 잠든 밤의 풀과 나무들은 가로등과 마주하고 뒤편 벽에 길게 벽화처럼 보여 지는 그림자들은 영혼의 조각처럼 내 안에 들어와 자리한다. 그림자는 실존의 아니라, 실존과 빛이 만나 흔적이 보여 지는 모습이며 이는 공간 위에 존재하지만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 불투명하게 보이지만 투명하며 하나의 실존에 몇 개의 존재로 보여 지고 그 위에 겹겹이 겹치지만 침묵한다. 여기에는 큰 것도 작은 것도 비교되지 않으며 많은 것과 소소한 것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중력 상태인 것이다. 이 작업은 내 의식의 통로로 작용하고 하나의 흔적으로 기억된다.”(작가노트)
최영진의 사진은 벽이나 특정한 면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를 담았다. 밤의 가로등에 의해 자리한 그림자들이다. 낮의 그림자가 명확한 윤곽선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밤의 그림자는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 희미한 조명에 의해 가까스로 혹은 여러 겹으로, 잔상으로 흔들리면서 자리한다. 그림자는 사물의 피부에 침묵으로 얹혀있다. 그것은 부드럽고 한없이 유연하고 투명하다. 자신이 어떤 존재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그림자는 창백한 투명성을 지녔다.
아울러 벽에 떨어진 나무 그림자는 낙하거리와 시간, 빛의 강도에 따라 무수한 표정을 짓는다. 농담의 변화와 강약으로, 혹은 퍼져있는가 하면 집중되어있다. 그러니까 그림자는 검은 단색에 의해 무참하게 일률적으로 마감되어있지만 그 사이에 무수한 빛의 희롱과 농담의 변화를 또한 머금고 있다. 마치 목탄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수묵화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래서 무척 회화적이란 생각이다. 가로로 길게 자리한 화면은 벽화적인 느낌을 더욱 강조하는데 그래서인지 그것이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순간 흐트러트리기도 한다.
이 그림자는 사진이 지닌 명료하고 확실한 인증의 힘에서 벗어나 다소 애매하고 모호하며 초점이 흔들리는 상을 보여준다. 세부의 디테일은 다 지워지고 전체적인 윤곽과 덩어리만으로 다가온다. 특히 여러 겹으로 맞물린 복수의 이미지들은 곤충의 겹눈처럼 마냥 흔들리고 겹쳐있다. 그런가하면 가장 원시적인 카메라 장치에서 추출한 이미지 마냥 어둡고 흐린 흔적으로 뒤덮여 있다. 그림자로 그린 그림, 그림자로 새긴 사진에 다름 아니다.
사실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결국 무를, 허상을 보는 것이다. 그림자는 시선을 정처 없이 헤매게 한다. 그림자는 사실적이면서도 그 실재를 순간 초현실적이고 몽롱한 존재로 비상시킨다. 특히 여러 그림자의 흔들림과 겹침이 한 화면에 여러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이는 중층적인 공간감과 시선의 교란과 착시를 유도한다. 시공을 초월한 기이한 영역이 자리한 듯 하다. 그래서 이 사진은 특정 대상의 고정된 장면을 사물화해야 하는 사진의 관례를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으로 옮겨가는 한 양상을 보여준다.
시멘트벽이나 콘크리트 질감의 평면 위에 나무들은 그림자를 내려놓았다. 도심의 벽들은 사람들에게는 완강한 경계이자 폐쇄적인 구조물이지만 그 주변의 나무와 풀이 낮 동안 힘겨웠을 자기 존재를 편안히 휴식케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무들은 그 벽을 벗 삼아 자신의 존재를 겹쳐놓고 쉰다. 전체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흑색의 톤들은 마치 안개가 자욱한 장면을 닮았다. 그런가하면 벽은 순간 만화경이나 환등기 마냥 흥미로운 이미지놀이를 보여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 그림자는 춤을 춘다. 조용히 흐느적거린다. 그것은 일종의 동영상이 되었다.
벽이 스크린이고 나무와 풀들이 배우가 되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어떤 영상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밤의 귀가를 서두르는 이들이 발걸음을 문득 멈추게 한 그 잔상들을 최영진은 찬찬히 살펴 기록했다. 자기 일상의 공간을 조용히 관심 있게 들여다 본 자의 시선에 비로소 걸려든 장면이다.
어두운 밤, 아파트 공간과 콘크리트 건물로 채워진 도심 속에서 그는 식물의 그림자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 식물들은 도시에서 가축화된 식물들이다. 조경수로 또는 관목수로 좁고 가파른, 작고 협소한 땅에 세워진 나무들은 밤에도 가로등 불빛을 이고 산다. 사람들의 길을 밝히는 빛들은 나무에게는 연장된 낮의 시간대다. 나무들은 자신의 존재를 차가운 불임의 콘크리트 벽에 투사했다. 그림자는 다양한 형상을 만들어 보인다. 자기 스스로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나무가 스스로 나무이듯이 말이다. 대지에 수직으로 상승해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나무가 되듯이 그림자들 역시 그렇다.
최영진은 섬세하게 그 그림자를 담았다. 납작한 평면의 인화지 위에는 뒤척이고 흔들리는 식물의 그림자가 다양한 벽/배경을 바탕 삼아 존재한다. 빛이 없으면 이내 그 그림자들은 소거될 것이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유한한 생애를 끝내듯이 이 그림자 역시 다만 빛에 의지해 그렇게 잠시 현존할 뿐이다. 밤 시간에 잠시 빛을 안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내다 이내 사라져갈 것들이다.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허망한 것들이다. 사진은 늘상 그런 죽음과 대면해왔다. 소멸되고 사라질 것들을 인화지 안에 곱게 포개놓는 일이었다. 특히나 그림자 사진이란 더욱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것에 대한 애도와 헌사에 근접해 있다. 그러니까 작가가 찍은 이 그림자는 결국 도시에서 자기 존재의 한 투영을 만난 것이자 그 매개로 선택된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을 보고 인생을 보고 사진이미지의 한 생애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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