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훈
최영걸은 우리시대에 그리 흔하게 찾아보기 힘든 한국화가다. 자연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교감을 통해 일어나는 심적 반응을 사실적 묘사로 화면에 담아내는 그의 풍경화는 한편으로 전통을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산수화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흔히 문기(文氣)나 사의(寫意)를 최상의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화의 주된 전통의 기준에서 보면 서양화의 사실적 표현을 능가하는 풍경화 작업을 하는 그는 한국화단의 이단아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전통과 현대, 아카데미적인 규범성과 낭만주의적 정신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최영걸 작품에서의 전통성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재료와 소재, 그리고 필법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가 추구하는 풍경화적 산수화는 중국 북송의 곽희(郭熙)와 곽사(郭思) 부자가 쓴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추구하는 산수화의 의미로서 ‘세속을 초월한 고답의 경지를 펼침으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라는 점과 직접적인 현장의 사생을 통해서 눈앞에 펼쳐진 대상의 본질과 기운을 포착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우리 미술사 전통의 맥을 고스란히 잇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우선 형식상으로 볼 때 전통적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화면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화면에 반영된 시점의 과학성 면에서도 전통회화와는 차이를 보인다. 전통회화가 주로 규격화된 한지의 크기에 따라 전지, 2절지 등의 규격으로 제작되어 온 것에 비하여 최영걸의 작품은 눈앞의 대상을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한 프레임을 추구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양화의 캔버스와 유사한 규격이나 파노라마 사진의 규격을 도입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의 탈(脫)전통성은 작품의 구도나 근경과 원경으로 펼쳐지는 화면구성방식과, 무엇보다도 전통산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음영의 사실적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영걸은 충실한 현장답사를 통해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과 외경심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되 그 표현에 있어서 자연과의 사적인 교감이나 주관적 감정의 표현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충실한 묘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작가다.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신비적 낭만주의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영국의 화가 컨스터블이 풍경화에 대하여 '자연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순수한 지각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을 넘어 자기정화와 종교적 외경심을 통해 신앙심을 단련하는 도구이며 자연의 풍경을 재현하는 것은 작가의 종교적 소명이며 축복이기도 하다. 작품 제작과정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신의 섭리와 영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을 그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작품활동을 떠받쳐주는 버팀목이다.
서양에서는 중세 사회가 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종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근대 유럽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각종 기계와 도구들을 발명하여 물질환경을 풍요롭게 만든 결과가 20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이 인간을 대량으로 살육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수렴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도덕과 종교보다는 과학과 기술, 감성보다는 이성이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고 요령껏 세상을 살아가는 효율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목적지향적 배금주의 사회에서 한 번쯤은 진지하게 음미해볼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을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고 인간을 자연에서 벗어나 인공적으로 조성된 도시적 환경에서 보다 빠르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도시는 질서와 속도, 규율을 지향하며 낭만과 여유, 인정(人情)을 비효율적인 것, 또는 효율성을 위한 또 다른 도구로 규정하는 곳이다. 온갖 기계장치와 인공적 환경에 둘러싸여 효율과 성과를 최상의 덕목으로 생각하며 바쁘게 생활하는 도시인은 분명 이전보다 풍요롭고 영리하며 자연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 모자라다는 느낌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과학의 비약적 발달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오히려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며 현대생활에서 영감의 원천으로서의 자연 속에서 누리는 삶의 낭만과 여유가 아쉬워진다.
우리는 최영걸의 작품에서 낭만성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성보다 작가의 개성과 주관적 해석이 강조되고 지성보다는 감정과 서정성이 우위에 서는 낭만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은 그의 작품과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의 낭만성은 프랑스식 낭만주의보다는 독일 낭만주의나 미국의 허드슨리버파(Hudson River School)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치밀한 사실주의적 표현과 신비적 정서와 범신론적 상상력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한국화의 상대적 침체 속에서 우리 국토의 곳곳을 답사하고 장엄하게 펼쳐진 풍광뿐 아니라 아담한 폭포수 앞에서도 자연의 위엄과 신의 섭리를 발견하며 이를 우리의 시각에서 전통적인 화법을 응용하여 현대적으로 기록하는 최영걸의 작품 앞에서 우리들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영혼의 정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