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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Vie, Grande Inconnue ; Willy Ro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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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하늘 아래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들릴 듯 말 듯 한
그의 목소리가 사진 속에서 부서지듯 흩어져있다.
반 발짝 더 가까이 그의 곁에서 귀를 기울이는 그녀에게 시선이 머문다.

50년 전 7월 탑 위의 그들이 우리들 사랑의 추억을 헤집어 놓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을 생각한다.



살아있는 프랑스 최고의 사진작가로 추앙 받고 있는 윌리 호니스의 전시회가 2006년 12월 23일부터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다. 2005년 10월 19일부터 2006년 5월 27일까지 프랑스 파리 시청에서 열린 이 전시는 프랑스 정부와 국민이 문화재로 지칭되는 윌리 호니스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다. 파리의 2백 만 인구의 4명 중 1명인 50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연일 만원 사례를 이루었던 윌리 호니스 전시는 프랑스 국민들이 갖는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파리 시청에서 기획한 회고전에 연이은 이번 갤러리 뤼미에르 기획전시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과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와 함께 휴머니즘 사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윌리 호니스를 세계순회 전시로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소개하는 가슴 벅찬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파리 시청의 적극적인 후원과 더불어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전시가 될 것이다. 약 2백여 점 흑백의 이미지들이 올해 나이 97세인 윌리 호니스의 작품 세계를 신실하게 보여준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결정적 순간>과 근대 사진 역사를 집중 조명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카메라 워크 展>으로 언론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갤러리 뤼미에르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시간을 초월한 감수성으로 인간의 삶, 그리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의 가치에 대해 역설하는 프랑스 사진 작가 윌리 호니스의 전시를 소개한다.

매 분, 매 초 우리 눈을 스치는 무수한 이미지들, 점점 더 자극적이고 도전적으로 변화하는 이미지 인플레이션 시대 속에서 인간과 사물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담겨있는 윌리 호니스의 사진은 느리고 평범하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인내심과 애정만이 가능케 하는 작은 기적들의 집합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치유하듯이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유럽 사진은 휴머니즘 사진 작가들에 의해서 주도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나 경제, 사회문제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과 의지에 가득찬 사진을 찍는다. 특히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베르 드와노, 이지스(Izis),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한다. 미장센(mise en scène)이나 여타 작품의 순수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그의 사진처럼 문을 열고 나오면 혹은 골목 모퉁이를 돌아 보면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며 그들의 삶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인 가장 평범한 부분을 따뜻한 시각으로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 휴머니즘 사진의 특징이다. 21세기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윌리 호니스와 그의 작품은 오아시스와도 같다. 그는 인간의 내면과 소통할 수 있는 흑백의 영상으로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준다. 그의 초기 작품 모티브는 많은 영화 감독들과 사진 작가들에게 파리에 대한 시적인 사실주의 영감을 전달해 준다.





‘아름다운 이미지란 가슴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하학이다.’
La belle image, c’est une géométrie modulé par le coeur.
- 윌리 호니스 -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꾸밈 없는 시선으로 잡아내는 그의 작품 세계는 75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가 찾아 헤매던 것은 ‘아름다움은 길 위에 있다.’ 라는 명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길’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감자튀김을 파는 이의 손 끝에서, 땀을 훔치며 지친 몸을 벽에 기대고 있는 수리공의 얼굴에서, 춤을 추고 있는 아가씨의 치마자락에서 멜로디를 타고 되살아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클래식하다. 베토벤을 꿈꾸었던 윌리 호니스는 카메라로 끝이 없는 스펙터클과도 같은 우리의 일상과 그것을 ‘우연’하게 포착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진가 사이에서의 공감(共感)을 재현한다. 어둠과 빛이 혼재한 길 모퉁이에서, 작은 선술집에서 만날 수 있는 낯익은 사람들, 혹은 센 강을 가르는 다리 아래 몸을 뉘인 걸인들을 따라 그의 심장이 뛴다.

윌리 호니스는 보도 사진으로도 유명하다. 세계 1차 대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보도 사진은 시트로엥(Citroën) 공장 파업부터 해방 전쟁을 치르는 알제리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1950년대 후반 언론지의 쇠락 이전까지 거의 하루라도 그의 사진이 게재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사진 저널리스트로써 윌리 호니스의 입지는 대단하였다.
그는 절대로 노골적인 형태미나 구도로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는 음악의 거대한 구조를 사진에 이입하며 유년 시절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와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특히 유진 스미스(Eugene Smith) 작품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윌리 호니스는 음악의 거대한 구조를 사진에 이입한다.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유년 시절 윌리 호니스의 바램이 담긴 바이올린은 그의 사진기처럼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자아이다.


파리의 휴머니스트 사진가 윌리 호니스에게 바치는 오마주
Hommage à Willy Ronis, arpenteur humaniste du Paris populaire
- Le Monde, 2005년 11월 12일


1936년 프랑스 대혁명 기념 행진 인파에서부터 자기 보다 훨씬 커 보이는 바게뜨 빵을 들고 장난기가 가득찬 얼굴을 한 채 뛰어가는 소년, 몽마르뜨 뒷 편의 언덕길 곳곳을 찍은 벨빌-메닐몽떵(Belleville-Ménilmontant) 시리즈까지 세계 2차 대전 이후, 수 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전쟁의 그림자를 뚫고 생겨난다. 윌리 호니스 역시 저널 붐의 수혜자였다.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로 뛰어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그답게 팡테옹(Panthéon)에서부터 몽마르뜨까지, 레 알(Les Halles)에서 뤽상부르 공원(Jardin de Luxembourg)까지 파리지엥들의 삶과 파리가 갖고 있는 영속의 매력을 담은 사진들을 찍으며 명실 공히 파리를 가장 파리답게 표현하는 사진 작가로 인정받는다.




‘나는 인생을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과 이 동네를 사랑한다.’


1936년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진 인파 속에, 1938년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 대파업장에 그가 있다. 그는 마치 수 많은 인파 속에 길 잃은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내듯이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수줍음이 베어 나온다. 또한 절대로 주제를 클로즈업 하지 않으며 정면을 과감하게 찍는 경우도 드물다. 그의 사진과 주제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고, 그 거리감은 주제에 대한 작가의 애틋함과 겸손함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비어있는 길을 찍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사진을 통해 재현하는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감수성 짙은 연가이다…
나는 어떤 특별하고 특이한 것을 좇지 않는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사진을 통하여 자신의 기억의 뼈대를 하나씩 맞춰나간다는 윌리 호니스는 때때로 매우 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승전에 맞춰 프랑스로 귀환하는 전쟁 포로들의 사진인 1945년 작 <불르바흐 본-누벨(Boulevard Bonne-Nouvelle)>을 비롯하여 지금은 폐쇄되어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오르세역(Gare d’Orsay) 플랫폼에서 프랑스와 독일 국경 사이를 왕복하며 찍은 사진 중 하나인 그를 돌보던 간호사에게 입맞춤을 하는 군인의 사진이다. 과연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윌리 호니스는 그 동안 이 사진이 출판되거나 공개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 장면은 너무나 비밀스러워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60년이 훨씬 지난 오늘 그들의 사랑이 공개된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찾고 있다
윌리 호니스 사진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아는 누군가가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7월 혁명 바스티유에서 행진 인파 속에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윌리 호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소녀, 프랑스와즈(Françoise)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이제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간혹 사진 속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편지나 전화로 연락해주는 이들이 있다. 약 스물 여섯 명의 사진 속 주인공들과 윌리 호니스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고 있으며 그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사진 속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 사진 속 에피소드가 어떤 이들에게는 묻고 싶은 과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 조각을 쥐고 있으며 60년이 지난 후에도 그 때 일을 차곡차곡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필히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힘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윌리 호니스는 1910년 8월 14일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 가까운 씨떼 꽁도르세 (Cité Condorcet)에서 태어났다. 20세기 초 우크라이나 출신 아버지와 리투아이나 출신 어머니는 핍박을 피해 멀리 흑해 연안의 도시 오데사(Odess)에서 파리까지 피난 내려온 유태인들이다. 세계1차 대전 직후 아버지는 호네스(Roness)란 가명으로 사진관을 열고 그의 어머니는 윌리 호니스가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그에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심어준다. 작곡가가 되리라 다짐한 윌리 호니스는 어린 시절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음악 수업비를 마련하고, 클래식 콘서트 리허설 장에 몰래 들어가 음악을 엿들으며 바흐와 모짜르트, 하벨,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 자신만의 휴식처를 찾는다.

음악 이외에 그를 매료시켰던 또 다른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다. 종이를 앞에 두고 웅장한 조각과 그림들 사이에서 조용히 스케치를 하는 윌리 호니스의 유년 시절 모습이 눈에 선하다.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 코닥 6,5 x 11 카메라를 선물 받고 첫 사진으로 에펠탑을 찍는다. 윌리 호니스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 위치한 소씨에떼 프랑세즈 드 포토그라피(Société Française de Photographie 프랑스 사진회), 회화주의 사진이 압도적이었던 사진의 전당에서 그는 아버지의 사진관에 있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당시 위대한 작가들의 예술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소르본 대학 주변 라틴 지역에서 (Quartier Latin) 그가 갖고 있었던 기존의 사진 개념을 타파하는 케르테즈(André Kertesz), 브라사이(Brassai), 피에르 부쉐(Pierre Boucher), 게르만 크룰(Germaine Krull)등의 작품을 접하게 되고, 시각적 충격을 받게 된다.

관심 밖이었던 법학과에 입학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군대에 징집된다. 그리고 1932년 제대와 동시에 아버지는 윌리 호니스에게 사진관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사진들에 묻혀 있어야만 했던 4년간의 사진관 생활에 윌리 호니스는 괴로워한다. 그러나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밤낮으로 카메라를 메고 파리 곳곳을 돌아 다니며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 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담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작들이 바로 이때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침 세이무어(Chim Seymour, 매그넘 에이전시를 창립한 7명의 멤버 중 하나인 데이비드 세이무어 David Seymour의 애칭)와 만남게 된다. 세이무어는 절친한 그의 친구를 윌리 호니스에게 소개시켜주는데 그가 바로 로베르 카파(Robert Capa) 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다. 훗날 이들은 포토저널리즘과 휴머니즘 사진의 상징이 된다.

193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박제된 듯한 사진관 사진에 신물이 난 윌리 호니스는 사진관을 미련 없이 채권자들에게 넘긴다. 르가르(Regards), 스 수와르(Ce Soir) 등의 몇몇 영향력 있는 시사 저널에서 보도 사진 기자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활동 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꿈꾸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라는 그의 소망으로 롤라이플렉스(Rolleiflex)를 구입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하루하루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한다.

1939년 세계2차 대전 발발과 함께 그는 또 다시 징집되었다 귀향한다. 그러나 유태인인 윌리 호니스에게는 끊임없는 위협이 가해진다. 결국 1941년, 독일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자유지역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피난을 간 유태인 중 유일한 생존자로 돌아온다. 마음의 안식처를 잃은 윌리 호니스는 다시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Nice)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당대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던 문학가 자끄 프레베(Jacques Prévert 1900~ 1977)를 만나게 되고 그의 소개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그의 아내 마리 안느(Marie-Anne)을 만나게 된다. 해방 이 후 파리로 돌아온 윌리 호니스는 저널리즘의 붐과 함께 여러 신문 잡지사의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한다. 그리고 1947년 그의 절친한 친구 헤이몽 그로세(Raymond Grosset)가 만든 사진 전문 에이전시 하포(Rapho)에 동료인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 에밀 사비트리(Emile Savitry) 등과 함께 소속된다. 1947년 화가 다니엘 피파(Daniel Pipard)의 작업실이 있던 메닐몽떵(Ménilmontant)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몽마르뜨 언덕 뒷 편에 마술에 걸린 숲처럼 숨어있던 벨빌-메닐몽떵(Belleville-Ménilmontant)을 발견한다. 그리고 1950년까지 그 지역을 촬영하는데 작품을 토대로 출판을 해보려고 사방으로 노력을 하지만 번번히 거부 당한다. 결국 1954년에 아르또(Artaud) 출판사에서 우여곡절 끝에 작품을 출판하지만 미미한 성과를 거두고 재고처리장에서 그 운명을 마감한다. 그러나 현재 컬트가 되어버린 이 책 벨빌-메닐몽떵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성공행로에 그 스스로가 제동을 건다.

윌리 호니스는 창조적인 작업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로써의 권익 특히 당시에는 아직 개념조차 모호했던 저작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사진 작가로는 유일하게 라이프지(Life)와 일을 했다. 다 쓴 필름을 잘라 종이에 붙여 재활용해야만 했던 당시 프랑스 상황에서 라이프 지와 일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그러나 저작권의 일종으로 라이프 지에게 요구했던 자신의 레전드가 거부당하자 라이프 지와의 일을 과감히 포기했다. 이 후 1947년 코닥상(Prix Kodak)을 수상하고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전시회가 거듭되면서 단순한 보도 사진만이 아니라 명실 공히 예술 사진 작가로써 그의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의 기획으로 1953년 뉴욕 근대 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 에서 열린 두 개의 전시 « 네 명의 사진작가들 Four French Photographers » 에서 브라사이, 드와노, 이지스와 함께 소개된다. 사진 역사에 길이 남을 전시로 평가 받고 있는 1955년의 « 인간 가족 The Family of Man » 전시에서도 그의 작품이 소개된다.

50년대 후반은 그의 사진 세계에 있어서 변화의 시기가 된다. 보그(Vogue)나 자르당 데 모드(Jardins des Modes) 등과 같은 패션 잡지에 일하면서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장루프 시에프(Jeanloup Sieff), 프랭크 호벳(Franck Horvat) 등을 만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패션 사진이 사진계에 돌풍을 이루면서 그만큼 포토 저널리즘과 휴머니즘 사진은 그 중요성이 점점 미약해진다. 1965년에는 프랑스 국립 장식 박물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에서 드와노, 쟈닌 니엡스(Janine Nièpce), 호제 픽(Roger Pic)등과 함께 대규모 사진 전시회를 갖지만 윌리 호니스는 조금씩 사진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된다.

‘내 나이 오십을 넘겼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은 너무 끔찍했다.’


1972년 그는 파리에서의 모든 추억과 사진 작가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프랑스 남부에 있는 고흐드(Gordes)로 이사한다. 그 후 파리에 있는 장식 미술학교(Ecole Estinne)와 영화 학교(IDHEC, 프랑스 최고의 영화 학교인 FEMIS 의 전신),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대학과 마르세이유(Marseille)대학에서 사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다. 당시 변변한 사진 교육 이론서 하나 없었던 시절 윌리 호니스의 사진 교육은 많은 학생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제자들 중에는 현재 사진 작가나 평론가, 갤러리스트로서 프랑스 예술계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들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다.

산책을 하듯이 들르게 된 아를르 사진 축제(Rencontre Internationale de la Photographie d’Arles)에서 몇몇 지인을 만나고 그의 사진에 대한 노스탈지와 휴머니즘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시적인 감수성을 갈망하는 대중들을 발견한다. 1979년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에서 열린 « 문화 유산으로써의 열 점의 사진작품 » 전시회에 참여하고 같은 해 프랑스 국가 예술 문학 대상(Grand Prix National des Arts et des Lettres)을 수상한다. 1980년에는 기획자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를르 사진 축제의 명예 게스트로 초대 받는데 그의 출현은 사진 축제 개최 이래 최고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1983년 파리로의 귀환은 윌리 호니스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아들 뱅상(Vincent)을 1988년 불의의 사고로 잃고, 아내 마리-안느(Marie-Anne)마저 알츠하이머 병으로 1991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윌리 호니스는 이 모든 것을 정신적인 힘과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극복해간다. 1983년에는 프랑스 정부에 그의 전 작품과 네거티브필름을 기증하고, 1985년에는 그 작품들을 토대로 빨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갖는다. 같은 해 꼬망더 당 로드르 데 자르 에 데 레트르(Commandeur dans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 중 예술과 문학 부분에 해당하는 것)와 1989년에는 슈발리에 드 라 레지옹 도너(Chevalier de la Legion d’Honneur, 프랑스 정부가 수여할 수 있는 훈장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의 것으로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을 대상으로 장관들의 추천을 받아 수여된다)을 수여 받고 다시 2001년에는 코망더 당 로드르 뒤 메리뜨(Commandeur dans l’Ordre du Merite, 프랑스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이에게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는다. 2001년 더욱 더 명민해지는 이성에 비해 육신의 두 다리는 너무 일찍 윌리 호니스를 놓아 버렸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사건 현장을 발로 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해져버렸다. 스스로 중얼거렸다.
‘어이 자네, 70년 동안 사진 셔터기를 원 없이 눌러봤으니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지...’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분신처럼 그를 따르던 카메라와 긴 이별을 고한다.
현재 윌리 호니스는 프랑스 정부의 배려로 센 강의 상류가 내려다 보이는 작은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한 신문 잡지 기자들의 인터뷰나 자료 요청에 일일이 손수 응하며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한 번쯤 메아리 치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사진들과 함께 무언의 문화재처럼 파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 최 : 갤러리뤼미에르, 조선일보
갤러리 뤼미에르
Tel. 02.517.2134 / 2176

조선일보미술관
Tel. 02.724.6328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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