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김시연 작가의 작업은 조금은 독특한 재료인 소금을 가지고,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거 공간 안에서 삶의 은유적 표현을 접목시키는 설치 작업을 한다. 이러한 설치 작업은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한 표현 방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소금이라는 특수한 물질과 생활의 오브제를 사용하여 마치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한 표현은 일종의 자기방어의 방편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 방편이란 너무나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방어하기 위한 방어가 아닌 누구나 쉽게 들어설 수 있는 공간적 방책 그 속에서 삶의 구성원 즉 가족의 소통의 부재된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집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들이 존재하는 거주 장소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일상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행복과 사랑 그리고 안식처로 대변되는 장소이다. 나는 상투적으로 평화의 공간이라 여기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행복함의 이면의 소외, 고독, 적막함, 부재 등의 현상들을 가시화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작업의 이미지들은 거주지에 설치된 일종의 보호막이자 방어용 벽이다. 그것들은 은유적 인 벽이나 울타리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거나, 부서지기 쉬운 재료들로 이루어져 재기능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와 성질을 지닌다. 이미지들은 “출입금지”란 외침을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약간의 힘을 가하면 쉽게 부서지거나 사라져버려 용이하게 접근이 가능하다. 모순의 특성을 지닌 방어벽이 집안을 침범한 장면 연출은 지금 살고 있는 구성원의 충족할 수 없는 소통의 부재한 일상의 모습을 시적인 풍경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 작가 노트
보호장치에 대한 강박증적 진술
김인선│대림미술관 학예실장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노출된 사회이다. 인터넷은 정보를 모으고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개념을 가볍게 링勇庸?개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깊숙이 침투하곤 한다. 일단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가면 누구나 공인이 되어버리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정보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인들을 노이로제에 걸리게 한다. 내가 어딘가에서 몰래 촬영되고 있을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알고 있을 것 같고, 내가 하는 행동을 볼 것 같다. 이미 공인이 된 연예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며 재미있어하는 현대인은 동시에 자신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너무 쉬워지니 웬만한 사건에 놀라워하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 그래서 사건은 점점 자극적이 된다. 뉴스를 보면 흉흉하니 뉴스를 보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날 정도이다. 방문을 열면 온통 흉포한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이제 김시연이 왜 사적인 공간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지 명확해 진다. 집의 내부 바닥에 소금을 섬세하게 깔아두거나 물건을 쌓거나 혹은 늘어놓거나, 실로 연결하거나 비누의 날을 세우거나 하는 등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다는 강박증이 드러난다. 그것을 잘 못 밟았을 때 정교한 패턴이 무너지면서 이를 건드린 이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며 ‘파괴’라는 어감이 한층 실감나게 될 것이다. 사적인 것에 더 쉽게 침투 한다는 것은 그만큼 폭력적인 행위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더 커지는 것인데, 이놈의 사회는 알권리를 주장하며 그 폭력성을 정당화 한다. 김시연은 바리케이트 장면을 전시장에 직접 설치하지 않고 사진으로 보여준다. 가끔 설치작업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사진으로 보는 것 보다는 오히려 현장감이 떨어져 보인다. 전시장은 기본적으로 보호받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시장에 설치된다면 아마도 아슬아슬 <묘기 대행진>같은 꼴이 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촬영하는 현장들은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적인 공간이 아닌, 누구네 방, 누구네 욕실, 누구네 거실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이며, 여기서 특정인 누군가가 집 안에서 사용되는 물건들로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정보를 얻는다. 이 집에는 이런 그릇이 있구나, 저 집 사람은 저런 책을 읽나보다. 게다가 이 보호막은 너무 연약하여 가까이만 가도 무너질 듯하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약하다. 너무 연약하여 이 보호장치를 보호해야 할 지경이다. 보호의 행위는 엉뚱하게도 그 본래의 목적을 잊고 이 보호장치를 향해서 이루어진다. 이 집의, 이 공간에 들어서려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바리케이트 가까이 접근한다면 이 섬세한 장치가 무너지는 순간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은 이 바리케이트를 피하고 접근하기 꺼려진다. 오히려-김시연의 작가 노트에 의하면- 이 바리케이트를 만든 자신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김시연이 만든 초기 작업 중에 계단식으로 종이를 오려서 겹겹이 두른 종이 성을 만든 것이 있다. 미로와 같은 그 성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문이 있고를 반복하고 있으며 계단과 계단을 잇는 끝없는 미로를 헤매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반복적인 장치들이 이번 전시에서는 중첩되는 보호 장치로서 제시된다. 김시연의 작품의 설치는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묘미이다. 너무 정교하게 지탱하고 있어서 건드리면 무너지는 것들을 누군가의 집 내부에 설치하고 이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로만 보여면서 그녀의 작업은 기록의 성격을 가지게 되며 사진의 사각 틀 속에서 그녀의 바리케이트 또한 보호를 받는다.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보호하는 장치를 보호해야 하는 이 전시는 ‘방책(防柵)’이라는 제목으로 또 보호 받는다. 얼마나 둘러싸고 저항하면 진짜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끝없이 고민하는 강박관념으로 정신세계가 무너질 것 같은 지독한 위태로움이 김시연의 사진에서 예쁜 장식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또한 멋진 위장술 아닌가. 알짜배기 정보는 절대 얻어지지 못한다. 너무 섬세한 함정이 많기 때문이다.
전시지원_파라다이스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