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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업에 있어서 주된 소재이자 사유의 대상은 ‘나무’이다. 이는 나무를 통해 ‘생명’을 드러내려는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방식으로써 궁극적으로 삶과 예술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반영한다.
나의 그림은 ‘바람’을 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생명의 기운은 ‘호흡’을 통해 실현 된다. 여기에서 나는 나무의 형상을 그리기보다 나무의 호흡을 그리고자 한다. 이는 나무라는 생명의 선 긋기를 통해 나와 나무의 호흡을 일치시키고 그 행위에 하나가 되고자 함이다.
이 작업은 관람객의 참여로 완성된다. ‘나무들 서다’라는 최근 작업에서 반투명 실크에 일획의 먹으로 표현된 나무들을 공간에 세웠다. 천정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진 나무들은 숲을 형성하며 서로의 몸을 비쳐내고 감추면서 공간의 깊이를 형성하며, 사람들은 겹겹이 늘어선 천들 사이로 자신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미세한 바람을 만들어 그로 인해 흔들리는 나무의 반응을 겪을 수 있다. 나는 이 작업의 설치공간을 전시장 뿐 아니라 건축물, 야외공간, 공연무대 등으로 확장하여 현대의 도시공간에 생명의 호흡을 심고자 한다. 또한 나의 이런 행위가 현대인을 위한 치유의 장으로 소통되길 원한다. 왜냐하면 호흡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임현락의 그림은 바람을 담아낸다. 종이 위로 입김을 불어넣듯 한줄기 바람으로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호흡의 흐름을 끌어내고 다스리며, 하나가 되는 결과이다. 호흡의 이치가 그러하듯 임현락의 손끝에 잡힌 붓은 강제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놔두는 방식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오는 정신적 긴장과 그 긴장을 읽어내는 몸의 반응이 어떤 평온함의 순간에 멈춤으로써 그는 호흡을 완성한다. 호흡은 길게, 때로는 짧게 진행되면서 작은 바람, 낮은 바람, 고요한 바람이 되어 그림 위로 머문다. 무엇을 그린다는 사실이 갖는 완결성보다는, 그려가는 중도의 과정과 그 미완의 의미에 문을 여는 행동이 바람처럼 남겨져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일은 바람의 기운과 그 흐름의 이치 속에서 존립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결코 멈추지 않는 바람처럼, 그 운동의 자유자재함을 체화하는 과정에서 그림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무들 서다’라는 명제는, 그런 점에서 나무의 형상을 그리기보다는 나무의 호흡을 그린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나무의 ‘솟아남’은 허공을 가르고,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한번의 깊고도 유연한 호흡의 결과일 것이니 말이다. 아래에서 위로, 그러나 단순히 일직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공간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움직임의 리듬이 이루어진다. 나무의 호흡은 길게 늘어뜨려진 실크 천위로 던져지면서 자신의 몸을 드러낸다. 그리고 전통회화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천정에서 바닥까지 천을 드리워 하늘과 땅의 거리를 말한다. 나무들의 몸은, 혹은 그 그림자들은 수 십장의 반투명 실크 천에 그려져 전시장을 가로지르면서 설치될 것이다.
그리고 관람객은 자신의 동선에 따라 미세한 바람을 만들어 나무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관람객은 숲처럼 내려뜨려진 반투명 나무들을 헤치고 나가 나무들의 반응을 직접 겪어낼 수도 있다. 숲을 지나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면 나무들은 서로의 몸을 비쳐내고 감추면서 겹겹의 공간을 깊이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 시(詩)적인 깊이를 느끼는 순간, 혹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박신의│미술평론, 경희대 교수
봄은 얼어붙은 대지에 스며들고, 그 생명의 수액은 뭇 생명의 혈관을 통해 흐르며, 온 봄 구석구석 세포들에게 그 에너지를 실어 나른다. 땅의 열기에 아지랑이들은 대기 속으로 스며들며 공기 중의 무거운 물들은 다시 대지로 스며든다. 스미고 스미고 스미고, 스며들고 스며들고 스며드는 가운데 땅과 나무에는 신록이 돋아난다. 시무룩한 가지에 생명이 스밀 때 피어난 꽃잎은 다시 완만한 속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묵묵한 바위 또한 알갱이 한 알 한 알의 단위로 시간 속에 스며든다. 시간은 공간으로 스며들고 공간은 시간으로 깃들어가며 무지개의 색 띠들은 다시 빛으로, 빛은 다시 무지개로 스미고 깃들인다. 임현락이 북북 그은 목탄은 그 힘으로 종이에 홈을 만들고 이 압력으로 종이의 조직들은 그 힘들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긋는 선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알갱이들은 때로는 부벼지고, 때로는 엉겨 붙어 인연의 불가사의한 경로의 그물망으로 제 갈 길을 간다. 스밈은 사랑이지만 때로는 죽음이다. 목탄이 종이에 부벼지며 스며들고 정착되는 과정은 인생이 대지에 스며드는 그 최후의 과정과 같다. 긋고 지우고 스며들어가는 화가의 행위에는 자연의 탄생과 소멸과 사라짐의 신비가 함께 섭리한다.
- 한생곤│작가
임현락은 이미 현대갤러리, 아트사이드, 금호미술관 전시 등을 통해 기운생동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던 것도 시대변화에 따른 실험을 통해 수묵화의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임현락을 우리나라 화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만든 <나무들 서다> 연작은 일획의 기개와 진수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메마르고 곧은 겨울나무의 수직성을 통해 생명력의 원천을 대지로부터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한지, 반투명한 천, 두터운 투명 비닐 등 여러 재질감 위에 펼쳐져 작품이 설치될 공간 구조에 따라 독특한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바람과 관람자들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의 숨결을 불러일으키고 생명을 노래하는 이 연작은 다악(茶樂)과 전통춤으로 구성된 공연 무대에 설치되어 그 진가를 발하고 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작년 12월 몬트리올과 올해 1월 뉴욕에서 상연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갤러리 분도 전시를 위해 임현락은 일획의 수직성을 본질로 하는 반투명 천에 수묵으로 작업한 설치작품을 통해 전시공간을 여러 각도로 운용하는 동시에, <바람이 일다>란 타이틀의 드로잉 작업을 함께 선보일 것이다. 목탄, 콘테, 파스텔 등을 사용하여 한지나 종이 위에 제작된 이 드로잉 연작은 화가의 신체와 화면 사이의 긴밀하고도 치열한 접촉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무들 서다> 연작이 한겨울 강원도 산골에서 무서운 병마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면, <바람이 일다> 연작은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작품이다. 꽁꽁 얼었던 대지의 응축된 에너지로부터 추출된 생명력이 확산될 공간을 기대해 볼 만한 전시이다.
- 기획 : 박소영│미술평론, 파리 I 대학(Panthéon-Sorbonne) 조형예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