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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변용(transfiguration)
임성훈│미학
칼을 주제로 한 작업은 위험(?)하다.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 스스로 장인적 기교 및 이에 따른 섬세한 감각적 조형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면 무턱대고 시도하기 힘든 작업이 칼을 주제로 한 작업이다.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도식적이고 식상한 작업이라든지 따분하거나 한물 간 작업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힘들다. 속된 말로 다치기(?) 쉽다. 칼의 고유한 물성을 제대로 된 조형언어로 담아내는 작업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 작가 라창수가 칼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우려감이 컸다. 그러나 며칠 전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그의 작품들을 직접 대면하니, 나의 예단은 전혀 터무니없는 기우였다. 그의 작품에서 칼의 조형적 변용을 통해 환기된 미적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작가가 칼의 조형적 변형으로 칼의 은유적 속성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칼은 차갑고 따뜻하며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 이런 양면적 느낌은 상처와 고통에 은폐되어 있던 성숙과 치유에 대한 약속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평범한 칼도 일단 작가 라창수의 손에 들어가면 놀랍게도 은유의 칼로 변용되는 듯하다. 칼의 은유성은 칼의 재료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작가의 감각적 조형 언어로 인해 더욱 효과적으로 감상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작가 라창수가 드러낸 칼의 조형성에서 삶의 에토스와 파토스의 흔적 또한 얼핏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작품 <날개>를 보자. 겹겹이 쌓인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칼날이 부드럽고도 자유롭게 비상하는 날개로 형상화된 <날개>는 심리적 실재를 조형의식으로 빚어낸 전이(transfer)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는 마치 인간이란 자신의 삶의 무게를 버티어 내질 못하고 이렇듯 무겁고도 날카롭게 표현된 칼날처럼 주저 앉기도 하지만, 또한 좌절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을 지닌 존재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작품 <날개>에는 삶의 무게와 비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이중적 조형성이 드러나 있다.
작가 라창수가 칼 연작에 내재된 이러한 이중적 조형성을 한갓 반짝 아이디어, 억지로 고안한 의도 또는 기발한 생각에서 끄집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이중적 조형의식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작품 <검초>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작품 <검초>를 보자. 언제부턴가 작가는 화분에 담긴 난초에서 난초의 심연에 깃든 또 다른 소리를 듣게 되지 않았을까? 부드럽고 연약한 잎에 감추어진, 자유를 향한 강렬한 잎의 열망을 말이다. 잎의 이중적 조형언어는 칼의 언어로 전화된다. 잎의 언어가 칼의 언어로 되자, 잎의 자연적 물성 속에 은폐되었던 자유로운 발산이 드러난다. 자유의 신호는 흙에 고정된 난초 뿌리를 자극한다. 난초 뿌리는 이제 "검초" 뿌리, 곧 든든한 다리가 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난초의 은폐된 물성이 드러나면서 고정 틀을 유지했던 화분은 마침내 깨어진다. 물성의 전도가 일어나는 곳에서 역설적으로 "검초"는 "난초"보다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된다.
<검>은 작가의 조형의식이 집약되어 모뉴먼트적 계기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양 칼은 수직으로 상승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면서 마감된다. 칼의 곡선미는 양 칼끝을 날카롭게 대립시키지 않고, 조화로운 조응 속에 머물게 한다. 상승하는 두개의 거대한 칼날은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 속에서 친화성을 불러온다. 또한 양 칼을 이은 불규칙적인 선들은 마치 삶의 다양한 변용을 연주하듯이 서로 엇갈리면서 맞물려 있다. 작품 <검>에는 정제된 균형이 아니라 불균형의 조화가 빚은 섬세한 균형이 구현되어 있다. 이는 느슨하거나 이완된 구성이 아니라 칼의 물성과 그 조형적 변용 사이에 내재된 미적 긴장감의 결과이다.
젊은(?) 작가 라창수는 이번 첫 번째 개인 조각전에서 칼의 고유한 물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의식으로 변용시킨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까다로운 재료인 스폰지를 다루는데 대단히 능숙한 기교를 보여주었던 작가인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칼을 주제로 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조형 언어를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다음 전시회에서 그가 어떤 작업을 선보일 지 벌써부터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