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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철희│한국화가
화가들에게 있어 그들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작가의 입장에서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언어이다. 언어는 자기존재의 증명방식이며 인간의 사상, 감정, 의견 등을 분출하는 통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작품을 작가들의 분신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세상에는 수십억의 사람들과 그 만큼의 다종다양한 생각, 감정, 상황들이 존재한다. 화가들은 여기에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옷을 입힌다. 때문에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화가들일지라고 그 표현된 양식은 각각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화가들 개인 개인이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들을 소유한 인격체인데 그들 작품의 모양새인들 어찌 각양각색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화가들은 하나의 내용(주제)으로 모이는 것이 힘든 것이다.
그런 11명의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春困, 춘곤의 사전적 의미는 봄날에 느끼는 나른한 기운이라는 뜻이지만, 작가들은 이 단어가 내포한 양면적 감정에 주목한다.
한가로운 여유 속에서의 달콤함과 더불어, 봄이라는 계절의 싱그러움과는 상반된 고달픈 삶의 피로함까지도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들 자신이 이미 인생의 봄날을 지나온 이들이기에 그들이 느끼는, 혹은 회상하는 봄날의 여운은 좀 더 특별하지 않을까? 삶의 한가운데서, 아니 일상 속에서 작가로서, 여자로서,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인생의 무더운 한여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기억되는 봄날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그들만의 언어로써 그 삶을 표출해 내었을까?
먼저 주로 채색화를 전공한 이들답게 색채를 통한 발언에 주목해본다. 봄날을 상징하는 색채, 아니 봄날의 나른함과 피로함의 양가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란 무엇일까? 먼저 초록색과 노란 색조가 눈에 띈다. 계절의 변화는 가시적으로 볼 때 식물의 변화에서 먼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팽창적이고 배타적인 남성성과 상반되는, 관계 지향적이고 포용적인 여성성의 특성이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식물적 속성과 흡사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춘곤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노곤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황갈색의 화면들은 작가들이 주제전을 맞이하며 색채라는 언어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려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형상적 측면에서 보면 한층 깊이 있는 사유의 흔적이 느껴진다. 개나리를 물고 있는 밥상위의 생선을 통해 꿈과 현실, 생성과 소멸, 고단함과 나른함의 양가감정을 표출하기도 하고, 호접몽을 대입해 봄날의 나른한 꿈과 현실사이에서의 상호 소통과 단절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녹색의 배경위에 졸고 있는 인물을 그려 넣음으로서 싱그러움과 노곤함을 직접적으로 중첩시키기도 하고 거울이라는 오브제 위에 채색을 가함으로서 화면위에 올려진 물감의 흔적과 화면 너머의 거울에 비친 영상의 대비를 통해 춘곤이라는 주제가 던져주는 아이러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개성과 각기 다른 언어를 지니고 있는 11명의 화가들이 수차례에 걸친 토론과 논의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고 치열한 사유와 고민 속에 선보인 이번 전시회는 개별 작품 하나하나의 완결성을 논하기 이전에 주목해야 할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기 쉬운 작가들이 이러한 주제전을 통하여 기존의 고민의 틀을 뛰어넘어 사유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그 만큼 더 자유로워지며, 그들의 언어 또한 그만큼 풍부해지기 때문인 것이다.
기존에 주제와 출품된 작품이 따로따로 놀던 여타의 주제전에서 보여지던 불성실한 관행을 깨고 진지하게 주제전의 의미를 지켜낸 11명의 작가들에게 다시 한번 건필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