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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철 입체조형전

  • 전시기간

    2007-05-31 ~ 2007-06-14

  • 참여작가

    황인철

  • 전시 장소

    미술관가는길

  • 문의처

    02-738-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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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되게 생명의 영원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가시적인 복잡성 이면에 내재해 있는 생명의 원초적 형상을 추출하여 조형화 하는 작업으로 일관되었다. 청동의 매끈한 질감과 풍부한 양감, 그리고 섹시한 윤곽선은 황인철 조형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왔다.
영원한 생명의 시뮬라크르



최광진│미술평론가, 理美知연구소장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죽는 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생기고, 박식하고, 명예가 높고, 재산이 많아도 100년을 채우기가 힘든 것이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역사이며, 유한(有限)한 생(生)에서 무한(無限)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인 셈이다.

과거 고대인들의 주술적 의식에서 오늘날의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유한한 삶을 초월한 영생을 꿈꾸어 왔고, 그에 대한 비전을 그려왔다. 인간의 학문 역시 일시적으로 변하는 자연에서 변치 않는 규칙을 찾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영생의 또 다른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의 불로장생의 야망에서부터 십장생(十長生)을 그려 영생을 기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꿈에 이르기까지 불로장생을 꿈꾸는 인간들의 소망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계층에게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왔다.

황인철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화두인 ‘생명의 영원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그동안 가시적인 복잡성 이면에 내재해 있는 생명의 원초적 형상을 추출하여 조형화 하는 작업으로 일관되었다. 그 형상들은 대개 풍요로운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 등을 암시하는 유기적인 형상으로 추상화되었고, 모든 생명을 잉태할 듯한 모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청동의 매끈한 질감과 풍부한 양감, 그리고 섹시한 윤곽선은 황인철 조형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왔다.




조형적으로 즉흥적이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이러한 작품들은 현대조각의 역사에서 보면 혈통적으로 브란쿠시나 아르프의 추상조각과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조각가인 브란쿠시(C. Brancusi)가 1910년대 시도한 <마이아스트라>(후에 ‘공간의 새’로 바뀜) 같은 작품들은 로댕의 표현주의적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 매끈한 청동상으로 수직으로 비상하는 타원형의 새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사실주의 조각이나 표현주의 조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고, 시각 너머의 본질적 형상을 포착한 그의 시도는 현대조각의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기여했다. 20세기 이후 추상조각가들은 적어도 그에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황인철 작품의 보다 직접적인 선조는 부란쿠시보다 아마도 프랑스 태생의 조각가 아르프(J. Arp)일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순수하고 간결한 생명의 본성을 형상화한 아르프의 청동조각은 추상화된 유기적 형태와 유연하고 유기적인 곡선, 그리고 풍부한 볼륨감 등을 형상화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황인철 조각의 혈통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그늘로 작용해 왔다. 만약 황인철의 작품이 아르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라면 그는 피해자일 수 있다. 물론 아르프와 다른 차별화는 얼마든지 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를 기술하는 비평가나 미술사가의 평가는 그렇게 섬세한 차이를 부각시킬 정도로 관대하지 못하다. 브란쿠시에서 아르프, 그리고 헨리 무어에 이르는 서구 현대 추상조각의 흐름은 황인철 작품의 조형적 완성도와 별개로 그의 입지를 좁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황인철의 최근 작품은 그들의 그늘에서 완연히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최근 작품들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변화는 그동안 집착했던 원초적 형상들이 어떤 구체성을 띠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형상들은 대개 새, 물고기, 소 같은 동물들과 때론 인간의 얼굴 등을 상기시키지만, 어떤 특정한 대상들에 종속되지 않고 두 개 이상의 개성체들이 결합하여 기묘한 형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이질적 결합은 우리의 상식적인 구분을 와해시키고 중성화된다. 가령 사람과 물고기가 결합되어 사람 같은 물고기인지, 물고기 같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게 한다든지, 혹은 새와 소가 결합하여 새 같은 소인지, 소 같은 새인지 구분이 안 되게 한다. 또 어떤 것들은 동물과 식물이 결합되어 식물 같은 동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 같은 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대상을 암시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지시 대상에 종속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의 최근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전략이다. 이러한 변화는 개념적으로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작품이 본질적 형상에로의 환원이라는 모더니즘적 강령을 따랐다면, 최근 작품들은 그 본질적 형상들이 서로 다른 형상들과 이질적 결합을 통해 어떤 구체적 생명체들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관심과 의식이 환원에서 확산으로, 본질에서 구체로, 보편에서 특수로, 거대서사에서 소서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렇게 작가 특유의 우뇌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기묘한 잡종교배에 의해 탄생된 특수한 생명체들은 본래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생명력에 귀속된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재현적 기능에서 벗어나,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시뮬라크르(가상물)로 탄생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뮬라크르로서의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경직된 환원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활기를 던져주고 있다.

포스트모던시대 인문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시뮬라크르(simulacre)는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나 단순한 흉내나 가짜의 차원을 넘어선다. 후기 구조주의자 중 한 사람인 들뢰즈(Gilles Deleuze)가 주장했듯이, 오늘날 시뮬라크르는 이전의 모델이나 모델을 복제한 복제물과는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델을 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고, 순간적이고 지속성과 자기동일성이 없으면서 인간의 삶에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는 사건들이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말대로,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소비사회는 이처럼 원본과 무관한 시뮬라크르들이 점차 증대되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되어 더 이상 흉내 낼 대상 원본이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이 실재 같은 초실재(Hyperreality)를 생산하게 된다. 이에 입각한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미술은 그것이 모더니즘 이전에 추구한 ‘시각적 재현’이나 모더니즘이 추구한 ‘내면적 재현’ 같은 모든 재현의 잔재로서의 미술에서 벗어나 하나의 시뮬라크르가 되고자 한다.

최근 황인철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뮬라크르적 특성은 아르프의 그늘을 벗어나 더 넓은 대지로의 발돋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한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달리(S. Dali)나 미로(J. Miro)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꿈과 무의식에 의존에 현실 초월적 세계에 도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황인철의 경우는 일상의 소박한 기원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민화적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물고기나 비약하는 새, 돌진하는 소 등은 한국 민화에 나오는 십장생처럼 영생을 기원하는 소박한 꿈이 해학적으로 들어 있다.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고자함이 아니라 현실을 즐겁게 영위하고자 함이고, 낙천적인 낭만의 소산이다.




이러한 개념적 변화는 양식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과거 환원적 개념 아래 등장했던 단순하고 풍부한 양감이 이제 이질적인 것들을 화해시키려는 의지로 인해 다소 선(線)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선들에 의해 형태가 이루어지다보니 과거보다 날카로운 면들이 많아졌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정적이고 어머니 품 같은 푸근한 느낌은 약화되었지만, 대신 음악적 리듬감이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의 ‘봄의 왈츠’를 듣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증폭되었다. 그것은 겨울의 오랜 추위를 견뎌내고 새봄에 싹을 피우는 생명의 활기이다. 그 생명의 리듬은 대상이 무엇이듯 영원성을 보장하는 듯하다. 그가 작품의 제목을 ‘불사명’(不死命: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라 붙인 것에서도 그런 의도가 엿보인다.

과거의 작품이 근원적 형상에서 생명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면, 최근 작품에서는 약동하는 자연의 리듬에서 인간과 동물, 식물들이 각기 개성을 초월한 음악적 생명성을 포착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묘한 동물들로 탄생된 그의 시뮬라크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노래를 은유적으로 상징하며, 그럼으로써 생명성의 추구라는 기존의 개념을 간직하면서 이시대적인 감수성을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작품에서 보였던 조형적으로 안정된 완결성을 다소 희생하면서 불완전한 활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향후 몇 년간 그의 작품은 생기가 넘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그의 변모는 자칫 안주하기 쉬운 나이에 시기적절하고 성공적이었다고 여겨진다. 불안을 창출할 수 있는 작가만이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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