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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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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다시 숲을 형사아화하는 작가 이재삼은 사물과 사물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에 주목한다. 신비로운 대나무 숲 너머의 무한한 검은 공간 사이로 부는 기의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전시.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숲의 영혼을 표현하는 사리이다"



내게 목탄은 검은 ‘색’이 아닌 검은 ‘공간’이다.
나무를 태운 자신의 온몸을 숲의 이미지로 환생시키는 영혼의 표현체인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숲으로 이루어진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사물과 사물 사이의 고유한 형상에 대한 그 너머가 만들어내는 적막한 빈 공간이며
보이지 않는 어둠의 공간 속에 비경을 담고자 하는 침식된 풍경이다.
사물은 어둠의 공간 속에서 기지개를 펴는 표정인데
달빛에 비춰진 숲은 음혈의 신령한 존재로서 드러나고
달빛의 소리가 목탄으로 채색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리고 단하나의 목탄이 캔버스에 맞부딪치는 순간,
으스러진 가루에 나의 정신과 혼이 묻어나길 바랄 뿐인 것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 전시명 : 이재삼 기획초대전 : 바람채집展
■ 전시기간 : 2007년 5월 30일 (수) - 6월 11일 (화)
■ 전시오픈 : 2007년 5월 30일 (수) 오후 5시
■ 전시장소 : 아트싸이드 전관, Tel 725-1020, Fax 725-1553
-아트싸이드 홈페이지 www.artside.org
-이재삼 작가홈페이지 www.kcaf.or.kr/art500/jslee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밤하늘에 달을 그려보자. 어떻게 그리는 것이 좋을까? 선으로 달 모양을 그려놓고 먹물로 달빛을 칠하려니 어쩐지 조금 싱겁다. 차라리 구름을 드리워 붓이 닿지 않은 부분으로 달빛이 발하도록 하는 것(烘雲拓月)은 어떨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있고, 그리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있으니 그윽한 맛이 있다. 이러한 멋을 우리는 이재삼의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느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예술장인(藝術匠人)’이라고 부른다. 장인이라고 하기에는 예술가적 성향이 묻어나질 않고, 전업화가라고 하기엔 장인적 기운이 베어나질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주목할 것은 작가를 심미적 세계로 인도하는 ‘숲’이라는 소재와 그를 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목탄’이란 재료이다.

목탄(Charcoal)은 정밀성과 내구성이 부족하여 회화보다는 소묘 또는 밑그림과 같은 기초 드로잉에 쓰이는 재료였다. 하지만 그는 십여 년 동안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하여 목탄화를 회화로 승격시킨 장본인이다. 과연 무엇이 그를 목탄에 전념하도록 했을까? 작가는 말한다. 목탄은 검은 ‘색’이 아닌 검은 ‘공간’이라고. 아크릴이나 유화가 빛을 반사함으로써 색을 발하는데, 목탄은 빛을 흡수함으로써 블랙홀과 같은 검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무광의 맛. 모든 것을 품어낼 것만 같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그는 모성(母性)을 연상했을지 모를 일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목탄은 제법 신성한 도구이다. 본래 목탄이란 나무를 연소시켜 얻은 것이지만, 다시금 목탄으로 나무를 재현하니 숲의 영혼을 환생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간혹 그를 대나무를 그리는 작가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번 전시가 대나무를 보여주는 마지막 전시가 될 것이라고. 실제로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처음으로 매화를 선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소나무도 보여줄 생각이라고 한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松竹梅). 한겨울 세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본연의 색을 잃지 않는다는 세 친구가 아니던가. 비록 그가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동양화 소재를 빌어 왔지만 곧바로 ‘선비정신’을 연상한다면 조금은 성급한 감이 있다. 그보다 먼저,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자. 저 너머(beyond there). 모든 작품의 제목이 똑같다. 사실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제목이다. 십여 년이 넘도록 모든 작품의 제목을 하나같이 ‘저 너머’라고 붙이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그는 말한다. 자신이 주목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그 경계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달을 봤으면 손가락은 잊어야 하는 법. 결국 대나무 숲을 통해서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대나무가 아니라, 대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검은 공간이다. 그 검은 여백 속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혹은 그가 보고 싶은 비경(秘境)이 숨어있는 것이다. 대나무 숲. 그 사이로 김은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숲의 영혼처럼. 저기 바람이 머무는 대나무 숲 사이,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 권혁주(아트싸이드 큐레이터)





“공간 공포와 검은 여백”

나는 자연을 수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나를 인도해준다.
어떤 존재든 변경하는 일이 없이 그대로 모사하기만 한다면 걸작을 낳을 수 있다.
예술의 유일한 원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것이다.
자연을 미화하는 비결 따위는 없다. 정확하게 보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 로뎅


회화의 가장 정통적인 문법은 단연 재현일 것이다. 세계의 감각적인 지평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재현의 논리는 모방론에 의해 지지되며, 이는 대개 자연주의로서 현상한다. 즉, 자연을 모방하는 것,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제안하는 것이야말로 회화의 가장 기본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단순히 자연의 외형을 충실히 모사하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는 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으며, 이로 인해 자연의 본성이 암시되고 상기되는 한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본성을 어떻게 감각적 표층 위로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

로댕은 자연을 정확하게 볼 것을 주문하고, 알베르티는 자연의 가장 순간적인 양상을 모방할 것을 주문하고, 하이데거는 존재자(자연의 감각적 형상)가 아닌 존재 자체(자연의 본성)를 불러낼 것을 주문한다. 로댕의 주문은 아마도 자연의 감각적 외상(피부)을 투과해서 그 이면에 놓여진 자연의 구조(근육)를 꿰뚫어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알베르티가 주문하는 자연의 가장 순간적인 양상이란 자연의 본성이 자연의 감각적 외피를 뚫고 그 표층 위로 떠올려진 순간에 주목함으로써, 자연의 본성과 자연의 외상이 일치되는 순간을 포착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하이데거의 존재 자체란 그대로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이며, 그 세계가 감각적 표층 위로 떠오를 땐 필연적으로 낯설고 이질적인 언어의 형태로써 어필된다. 한편으로 그 세계란 주체와의 치열한 상호작용과 공감의 과정 끝에 열린 것임으로 친숙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회화는, 특히 재현적인 회화는 생경하면서도(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존재를 드러내는) 친근한(고향과 원형 등 상실한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언어의 이중적인 결과, 즉 그 양가적인 구조에 의해서 견인된다. 인물과 동물 그리고 나무나 숲 등의 자연을 소재로 한 이재삼의 회화는 이러한 재현적인 논리에 의해 견인되며, 자연의 감각적인 형상을 매개로 하여 그 이면의 비감각적인 자연의 본성을 암시하고 드러낸다.

인물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 이재삼은 목탄 하나로 그림을 그린다. 이 단순한 재료로써 그려진 그의 그림은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가 그린 인물과 동물들은 마치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해놓은 이저 너머, 521x130cm, 캔버스에 목탄, 2000 일련의 그림들에다 작가는 하나같이 ‘저 너머’라는 의외의 제목을 붙인다. ‘저 너머’라니. 이는 화면에 드러나 보이는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가지고 있는 대상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그림에서의 감각적 닮은꼴이 ‘저 너머’라는 제목과 부닥친다. 왜 ‘저기’ 혹은 ‘저곳’이 아닌 ‘저 너머’인가. 이는 분명 그림 저편의 미처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봐달라는 주문일 테고, 그림의 가시적인 영역이 암시하고 상기시켜주는 비가시적인 영역을 봐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저기 혹은 저곳이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표면이 전개되는 지평이라면, 저 너머는 그 표면을 넘어 사물, 세계,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는 장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사물의 실체, 사물의 본성, 사물의 자기다움이 정박해 있을 만한 한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전통적인 재현회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감각적 현실 저 너머에 있는 비감각적 현실을 지향하고 있다. 이로써 현실에 정박하는 대신에 현실로부터의 초월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재삼의 회화로 하여금 저곳(그림의 가시적인 영역)에서 저 너머(그림의 비가시적인 영역)를 넘보게 하며, 또한 실제로도 가시적인 세계를 넘어서게 하는가. 실제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사실 여러 면에서 실제와는 다르다.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평면적이며, 흑백의 모노톤으로 환원된 색채는 단순하다 못해 금욕적이기 조차 하다. 동물 그림이나 특히 인물화에 반영된 소위 정면성의 법칙 역시 이러한 비현실성을 더한다.

여기서 정면성의 법칙이란 단순히 대상의 정면 시점을 포착한 형식적 개념이기보다는, 사실상의 증명(성)을 의미하는 상대적으로 더 유기적인 개념이다. 즉 인물들은 정면은 물론이거니와 측면포즈를 취하는 등 그 시점에 변화를 꾀할 때마저 무표정하고 경직돼 있으며 심지어는 엄격해보이기조차 하다. 마치 증명사진에서처럼 인물의 인격이 그림의 표면 위로 뚫고 나오지 못한다. 주관적인 인격이 객관적인 정보나 소재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여기서 작가의 시점은 공감적 시점이기보다는 관찰자적 시점에 가깝다). 나아가 인물은 배경마저도 결여하고 있다. 즉 실제의 사물현상은 자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여져 있기 마련이며, 이때 사물은 그 배경과 분리할 수 없는 형태로서 현상한다. 이러한 배경화면을 삭제함으로써 작가는 그림을 추상화한다. 관계의 망으로부터 동떨어진 모티브로써 비현실성을 강조하고,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화면을 추상적인 화면으로 변질시켜 놓는다.

이는 일견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프랭크 스텔라)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전언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재현화법의 논리로 풀어낸 다른 한 버전으로까지 비친다. 이런 논지에서 보자면, 작가가 감각적 사물현상 저 너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인격)이 아니라 그림의 본성(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재삼의 그림은 실제를 추상화하는 만큼이나 실제를 현실화하기도 한다. 삭제된 배경화면은 일종의 여백으로 설정된 것일 수 있으며, 이는 그대로 인물의 비가시적인 인격을 암시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정적이고 단조로운 화면 역시 온전히 인물 그 자체, 인격 그 자체에 스포트라이트를 주기 위한 고도의 전략 내지는 장치일 수도 있다. 결국 ‘저 너머’란 주제의식으로써 작가는 사물의 본성과 그림의 본성, 이 둘 다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질적인 두 지층이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고 있다.



자연 풍경을 대상화한 그림들. 이재삼은 연잎과 송림, 옥수숫대와 대나무 숲, 폭포와 매화(홍매와 백매) 등의 자연 소재를 대상화해서 일련의 그림들을 그리는데, 이는 인물과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들과는 그 인상이 사뭇 다르다. 그 두드러진 특징은 소재가 자연풍경으로 옮아오면서 화면이 현저하게 확대된 점과, 화면을 가득 채워 그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종의 공간공포(빌헬름 보링어)나 사진에서의 클로즈업 기법을 연상시키는 이들 그림은 현실감을 강조해주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인상을 강화하기도 한다. 즉 모티브와의 시각적인 거리는 좁혀진(화면에 꽉 찬 모티브는 마치 숲 속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에, 현실적인 거리감은 오히려 더 증대된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심리적인 동화현상으로까지 확장된다.
저 너머, 194x130cm, 캔버스에 목탄, 2007 이처럼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그리고 가시적인 대상이 비감각적이고 비재현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암시하는 듯한 상징으로 전이된다. 불현듯 대나무 숲 뒤쪽으로 대나무와 대나무간의 사이공간이 드러나 보이고, 매화나무의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열린다. 그리고 그 사이공간과 여백으로 바람이 분다. 작가는 다름 아닌 이 바람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감각적 형상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는 바람을 작가는 음기라고 부른다. 여기서 음기 자체는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가변적인 존재성을 지니지만, 양기에 의해 감각적인 형상을 덧입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람은 그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지만, 이는 감각적인 형상을 통해 암시될 수 있다.

그리고 바람과 더불어 이러한 비가시적 실체로서 달을 들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에 달이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칠흑 같은 어둠 위로 그 형체를 드러내 보이는 이미지들로써 달빛의 실체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화면은 그려진 그림을 경유하여 그려지지 않은 그림, 암시적인 그림에로 가 닿는다. 바람과 달빛, 미처 그려지지 않은 어둠 속 정경이 품고 있는 음기, 사물의 고유한 형상이 허물어지고 지워지는 사물과 사물 사이, 그 어둠, 그 여백, 그 경계를 붙잡으려는 작가의 기획은 일종의 초월적 기획과 통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이 기획이 감각적 형상의 부정이나 폐기를 통한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감각적 지평 속에서의 초월을 지향하고, 감각적 사물현상을 끌어안는 식의 초월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더 설득력을 획득한다.
이재삼은 이 모든 그림을 달랑 목탄 하나로만 그린다. 이로부터 회화의 기본이나 그 본질에로의 회귀 또는 환원과 함께 일종의 도덕적인 자의식(그 자체 금욕주의로 부를 수 있을 만한)마저 느껴진다. 목탄은 그 자체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마치 그 안에 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깊고 짙은 색조(색감)를 가능하게 한다(이에 반해 흑연은 빛을 내뱉는 성질이 있어서 마치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 같은 금속성의 표면질감이 느껴진다). 실제로도 작가는 목탄을 검묵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단색처럼 보이는 목탄의 색감이 실은 그 이면에서 수많은 색의 밸류를 함축하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 어둠의 정적으로부터 밀어 올려진 이들 이미지들은 밤이 내재하고 있는, 그 자체 휴식과도 통하는 정화력과 치유력을 불러일으킨다.

- 고충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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