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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달2007-11창작지원기획 / 이민혁전 : 관공서 Government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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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퍼스낼리티Personality 도시혈관의 생명성



조동석│갤러리스페이스아침 디렉터, 큐레이터


대중의 여러 무리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소수의 집단체가 하나있다. 그 곳에서는 페이퍼로만 의사소통을 하며 오직 그들만의 유토피아 세계의 조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과 말을 서슴없이 뱉어낸다. 이들이 지향하는 세계관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안정된 고용의 확실성과 권력에 대한 탐욕성에서 기생되어져 파생되 나오는 허울 좋은 신분 계층적 우월주의 이상관이라고 볼 수가 있다. 국가적 명분의 공신도를 내세운 이들 무리는 그 외의 다른 무리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고 자부심으로 무장 한다. 기득권자의 신분계층에 속한 이러한 무리들은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보호막을 펼치듯 개인주의가 만연된 힘의 논리에 의한 자기보호방어막의 강도를 높인 것이다. 극소수의 권력에 의한 보호막이 강력한 영향력이 미치는 순간 상대적으로 피지배층의 대중은 불신에 대한 심리적인 피폐함이 야기될 것이다. 역사는 잠재적 권력 파워의 진위성을 말해주고 있다. 몇몇 소수의 사람에 의해 움직이고 쓰이는 유토피아는 어떤 무리들을 위해 우월한 능력과 강력한 권력이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소수 국가층과 다수 국민층 간의 실용관계와 사회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고용관계측면에서 보면 지배계층의 소수에 의한 가장 큰 요인이 사회구조의 체제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다수가 인정하는 소수의 국가 기득권자들은 어떠한 세상을 원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유토피아를 보호해 주는 허위적 위장술로 잘 포장되어진 세계이다. 다수가 바라는 이상형을 포장지로 삼아 깊숙하고 드러나지 않는 특정 불투명한 계층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들 정체는 실용적 목적의 관계에 근본을 둔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다층적부분의 유기적 역할을 제시해야 하지만, 빠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의 본질적인 본능의 야기로 다수를 위한 소수역할의 실용관계를 무너뜨리고 개인이익단체로 전략하고야말았다. 즉 소수의 유토피아는 대다수의 인간들 개개인이 또한 향유하고 싶어 하는 동일한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개인적 퍼스낼리티 Personality (제한된 무의식 성격=개인 중심주의적 조건요인에 의한 다중적인 심리적 역학변화를 거치는 억압적 심리상태)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둘러싸여있다. 이 시점에서의 사회 권력에 대한 의미부여는 파괴적인 본성을 잠재우고 보다 원활한 인간관계 발현의 구축을 하고자 하는 자체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계급적 차이의 관계에서 발생되어지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개별적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에 강한 무게를 두고 균형점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관공서의 권력정점에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균형 장치로 소수와 다수의 계급적인 관계를 중간적 축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민혁의 관공서는 균형을 이루는 경계선상에서 “경계퍼스낼리티장애를 앓고 있는 대중” 속 작은 이야기들을 자신의 “도발적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의 기재에 혼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수 집단체의 권력체제인 관공서와 다수 집단체의 인간적 실용관계를 대비적 경계 불확실성으로 잠정적으로 결론짓고 이들을 해체적 입장측면을 고수하고 있다. 무리 속에서 구분지어지는 사회 계층적 분리가 관공서의 권력에 의한 지배층구조와 합세된다면 서로 극과 극의 길을 걷게 되는 양상으로 집단 간의 대비적 경계로 대치하게 됨은 자명한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관계 확산은 많은 인간에게 계층적, 심리적 분열화가 심화되기에 이른다. 분열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차가운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이야기의 구조를 관공서의 상징적인 건축구조물에 대비시켜 “현란한 색채에 의한 혈관조직구조와 슬픈 칼날 선의 파괴적 구조”로 해체적 비판을 일삼아 통찰적 의식변화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현란한 색채의 혈관조직구조”는 관공서에서 형성되는 권력성에 대한 모호한 관점을 색채의 유기적 움직임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물구조의 위엄과 거대함은 권력을 포효하는 구조요소로 상당한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는 기득권자의 계급간의 격차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퍼스낼리티 경계의 선상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그 구조물안의 유토피아는 가장 안정된 세계이며 계산이 되어 짜인 구조로 움직이는 기계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일생에 관한 모든 것이 결부되어 있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태어나는 출생신고에서 결혼과 죽음에 이르는 모든 기록의 등재는 자신의 존재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생명력이 관공서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인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관공서는 생명체의 분신을 자체적으로 흡수하여 자신만의 거대한 권력형 생물체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는 모든 대상물을 보편적 유기체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를 순간적 재치를 발휘하여 일반화된 일반통행구역을 연출하고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은 하나의 방향적 개념으로 일반화된 대중성 즉 획일화시키고 무디어지는 서사구조를 기반을 둔 다중적인 감성에 이르게 하여 순간의 전율적인 묘미를 느끼게 한다. 그의 일반통행적인 속도의 순간적인 시간성은 자신의 이야기구조를 다양한 감각적 대상으로 승격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 2006년 전작 ‘도시여행, 흘러가는 사람들’에서 등장하는 지하철, 고속도로, 터널, 식당과 쇼핑센터의 무수히 많은 군상 등 도시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움직임을 사람의 도시의 익명성과 속도의 관계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야기구조 보다는 속도감을 위시한 도시이미지를 빠른 빛에 속도에 관점이 모아지고 있다. 광상적인 도시이미지를 마치 광시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광시적 효과에 그쳤던 것과 달리 2007년 전작 ‘나는 바바리코트를 입고 서울여고로 간다.’에 와서는 탐욕적인 도시 속 서사적 구조를 유입시키기 시작한다.

단순한 빛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단초로 삼아 인간의 쾌감, 불안, 욕망 등 인간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심리적 정황들을 여과과정 없이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여기에서 거침없는 서사성은 그만의 차가운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가 이미 깊숙이 차용되어 시작됐음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일상사건은 자신의 체험을 통한 배설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펼쳐지고 있다. 전작의 일률적인 도시속도의 일방적 방향성에서 자신의 감정적인 회유의 감각적인 속도가 가미되어 거치면서도 동시다발적인 상황전개가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적인 본성에 대한 고찰로 그는 자신본연 그대로 가식 없는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가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건의 연속은 인간이 이성을 내세워 숨겨진 무의식적 본성의 세계를 끄집어낸 추함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반면, 본질의 도발적 본능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갈망하는 욕구의 해소창구로 본다면 인간의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촉진제로 다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도시이미지를 빛의 속도로 보고, 서사구조를 본능에 호소하는 소재와 빠른 상황전개에 따른 블랙코메디적 요소가 결합된 사회 고발성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1. 속도감 2. 본능적 소재 3. 블랙코메디의 서사구조와 더불어 이번 신작 ‘관공서’에 와서는 4. 함축적인 침묵성이 첨가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권력의 원칙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관공서의 건물을 침묵의 대상으로 그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의 침묵은 무관심에 일관되어진 인간성의 파괴를 초래하게 만드는 직간접적 요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고등법원, 국회, 대법원, 국세청 등 국가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건물구조의 화면배치에서도 모두 정면을 보면서도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이들은 거대한 유기체로 인간을 방금이라도 삼키 듯 출입구는 중앙에서 벌이고 있으며 무표정으로 일관 한다.

빛의 반사되어지는 콘크리트 구조물에는 두껍게 뒤덮여 있는 색의 혈관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수직과 수평의 격자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건물피부조직의 혈관계를 완성해 내고 있다. 이처럼 혈관조직의 재해석은 관공서의 대상이 단순한 도시 이미지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핵심조직으로 막강한 힘의 원천으로 재인식하여 구성한 것이다. 화려한 색채 역시 관공서의 상징성과 물질만능주의가 복합되어진 것으로 지배계층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다. 관공서의 화려한 혈관유기체 구조로 만든 배경을 전작의 특징들과 함께 살펴보면 1. 속도감 (건물, 도로, 자동차, 인간) → 건물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변모 (국가 관공서) 2. 본능적 소재 (도발적 욕정) → 관공서에 대한 상징적인 대상인 인간의 권력 (소유력, 탐욕) 3. 블랙코메디의 서사적 구조 (스크린경마, 룸싸롱, 변태, 찜질방) → 관공서의 기록과 인간사의 관계 (관공서의 기능적인 페이퍼 기록 부분-각종신고서, 재판) 4. 함축적인 침묵성 → 관공서 권위적인 행정의 융화묵과 행위의 크게 네 가지로 특징지어 볼 수가 있다.




“슬픈 칼날 선의 파괴적 구조”는 권력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해체하려는 추상적인 반사적 투사행위이다. 대중적인 유토피아적 도시를 만들기 위해 형성된 관공서의 권력은 이제 소수에 의해 잠식되어져 하나의 보호수단으로 전략되어졌기에 그는 파괴적인 선의 난립한 표현으로 표출해내고 있다. 이제 이들의 난립으로 인한 난도질은 기득권층 권력의 위엄성에 노골적으로 대항하려 한다. 전작의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운동방향에 따른 일정한 방향의 선적인 운동성은 대상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순수성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성을 두고 있다. 이는 서사적 이야기가 숨김없이 원형 그대로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괄된 선에서 준하여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신작의 관공서에 와서는 서사구조가 건물의 구조체로 상징체계를 갖추고 있기에 대상에 대한 순화적인 개념이 적용되어진 것이다. 거대한 권력의 대명사격인 관공서 건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화면에 절대적인 존재로 등장시켰다. 권력의 절대성을 보여준 다음 그것을 그만의 차가운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에 의한 해체의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슬프고 가냘픈 칼날 선들로 인한 건물을 파괴적인 행위의 난도질은 관공서의 권력에 대한 회의적 개념이 내재된 것이다. 차가운 심리적 색채의 터치는 해체를 통한 보다 나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길 바라는 저항적인 비판의식의 제반됨과 동시에 염원적, 의지적 성향도 함께 병행하게 된다.




도시 속 이미지에서 발견되어지는 인간에 관한 소고를 화면에 강한 색채의 슬픈 어조로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관공서가 수많은 인간의 애환을 담아내는 창구가 되길 바라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관계로 아픔을 주는 안타까운 실정에 접해 있다. 그러므로 서두에 거론한 주관적인 차가운 퍼스낼리티 이데올로기가 본능의 반사적 풍경이미지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만의 강인한 색채 안에 활기찬 필치는 억눌려 있는 감정의 분화구를 분출시키는 형세와 같다. 이제 도시는 속도감, 본능, 블랙코메디의 서사구조, 함축적인 침묵, 파괴에 의한 새로운 비전으로 구체화되어 토로되고 있다. 최초 외형적으로는 빠른 시각적 변화에 따른 사회의 급변성에 요지를 두었고,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이중적 인간본성의 부재와 권력의 탐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도시는 스스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심취에 있으며, 인간은 그 곳에서 이중적 도시를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나르시시즘의 굴레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 모퉁이에 수북이 싸여 있는 물감의 튜브처럼 도심과 인간의 두터운 신뢰의 실용적 관계개선이 되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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