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명확한 색의 이름에서 빠져나와 흔들리는 이 색상은 언어로 명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색과 저 색 사이에서 진동하는 색, 틈의 색, 간색이자 우리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색채에 그저 유사하게 근접할 뿐이다. 사실 우리의 눈은 수많은 색을 구분하기 어렵다. 감각적으로 포착한 색채는 늘 언어의 그물에서 새 나간다. 불가피하게 우리는 색을 지칭하는 이름을 부여하고 불러보지만 그것은 색을 명명성의 체계로 가두고 수렴하지 못하다는, 할 수 없다는 자괴에서 나오는 절망감과 안타까움에 다름 아니다.
하상림이 배경과 꽃과 유사한 형상을 빌어 전하는 색채는 자연계에 속하기 보다는 매우 인공적인 색채들이다. 그 색상들은 어떤 색이라고 쉽게 표기되기 어렵다. 느낌으로는 알지만, 감각적으로 다가오지만 입과 혀끝은 자꾸 주저하게 된다. 그저 파랑에 가까운, 붉은 색이나 회색 혹은 잿빛에 근접한 색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사실 색은 무척 심리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서 벗어나있다. 그림은 오로지 그 색 하나만으로도 자존한다. 색 층과 색의 면적, 색이 칠해지고 표면에 매달린 상태, 상황 자체가 고스란히 그림이 된다. 색채추상이 그럴 것이다. 작가들은 레디메이드 색/물감과 안료를 빌어 자신만의 색을 빚어내는 연금술사들이다. 그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시각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색의 톤과 깊이와 느낌을 향해 나가간다. 이 색과 저 색의 혼합, 색의 적절한 배합과 이질적인 재료의 첨가, 용매재의 농도, 칠하고 올리는 기법과 시간의 누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상림은 납작한 캔버스의 피부에 짙은 검정색을 바르고 그 위로 자신이 선택한 색감을 무수하게 칠해 올려 견고하고 균질한 색채의 층을 만든다. 이 단색의 색 면은 물감의 물성이나 붓질의 신체성, 인위적인 흔적 같은 것은 모두 지우고 거의 기계적이고 인공적으로 마감된다. 색으로 채워진 평면/표면은 캔버스 천과 이중으로 칠해진 색 층들이 잠복되어 있는 , 덧붙여 테이프가 부착되어 있는 중층적인 공간이 되었다. 작가는 테이프를 이용해 드로잉을 했다. 꽃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윤곽선들은 검정 테이프가 부착되어 만든 선(양)이나 이미 접착되어 있던 테이프를 조심스레 걷어내는 순간 드러난 바탕 색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선(음)들이다. 양과 음, 존재와 무, 그리고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등의 여러 은유가 작가의 방법론에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로서는 테이프에 의해 올려진 선과 한 쌍으로 전재하는 이 부재하는 공간이 만들어낸 선이 매력적이다. 실재하는 선과 없는 선, 차 있는 공간과 비어있는 공간,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그 드로잉은 이루어진다.
작가는 한복 색감에서 받은 매혹적인 인상이 자신이 사용하는 색채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말한다. 비단이 보여주는 미묘하고 아름다운 색채,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되고 또한 특정 색채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기이한 사이에 서식하는 색채, 빛에 의해 파득거리면서 본래의 존재감을 끝없이 지우다 다시 환생하는 색의 거듭남 등이 그 매혹의 정체일 것이다. 이중의 바탕 처리가 끝나면 그래서 자신의 원하는 색채에 얼추 근접한 단색의 색 면이 펼쳐지면 그 위로 날렵하고 예민한 선들을 풀어놓는다. 우아하고 느리게 떠도는 이 선들은 바탕 화면의 내부/외부를 서서히 유영하는 물고기나 원생세포들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꽃이나 씨방의 형상을 유추시키는 형태 앞에서는 식물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마치 꽃가루가 날리듯, 씨방이 터져 사방으로 씨들이 떠다니는 듯한 상황성이 순간 멈춰있는 듯하다. 그 장면은 무척 영상적으로 다가온다. 감각적이면서도 적조한 바탕을 뒤로 하고 음각/양각의 선들(테이프를 붙여 만들어나간 양각의 검정 라인과 붙인 테이프를 떼어내면서 드러난 바탕의 내부, 그래서 일정한 음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선)과 식물이미지는 포개지고 겹쳐져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주위로 흩어진 몇 개의 점들 역시 정적인 화면에 동적인 움직임, 이동과 부유, 시간의 흐름과 생과 사, 생성과 소멸 등의 여러 암시를 보여주는 기제들이다.
색 면이 단호하게 펼쳐지고 그 위로 장식적인 꽃/식물이미지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이 그림은 사실 전적으로 드로잉의 성격의 강하게 감지된다. 라인테이프로 이루어진 드로잉이자 붙이고 떼어낸 자국으로 이루어진 드로잉, 손의 맛과 신체의 호흡을 표백한 드로잉, 텅빈 공간을 하염없이 헤매다 순간 정박하는 듯한 드로잉, 선의 생애와 유영, 덧없는 떠돎을 보여주는 그런 드로잉이다. 이 작가의 초기작 역시 몇 개의 커다란 색 면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그 틈으로 낙서 같은 선들, 날카롭고 파득거리는 신경 같은 줄, 무의식적이랄까 혹은 본능적일 수 있는 끄적임으로 가득한 그런 그림이었다. 그 선들은 모종의 형태를 지향하다가 이내 선으로 귀환하고 얼추 꽃의 형상을 보여주다가 머뭇거리고 화면구조로 잦아드는 형국이었다. 이후 1998년과 2000년도에 선보인 그림에서는 단색조로 물든 배경을 뒤로 하고 하나의 꽃잎이 단독으로 설정되어 경쾌하고 탄력적인 붓놀림으로 그려지고 있다. 바로 그 작품이 지금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계기로 보인다. 여기서는 여전히 붓의 맛이 있고 시원스레 죽죽 내리그은 선의 활달함과 표현주의적 기운이 감돈다. 동시에 다른 작품에서는 기계적인 선이 등장한다. 붓질의 느낌과 상반되는 한 가닥 단호한 선은 화면을 이원적인 대립요소를 통한 긴장관계로 몰고 가는 인상이었다. 이후 이 같은 양가적 성격은 작품의 주된 특징이 된다. 단일한 색상으로 물든 추상적인 바탕화면에 잿빛/단색의 식물이미지가 정처없이 떠돌거나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이 그림에는 추상과 구상, 색채와 무채색, 탈이미지와 이미지, 침묵과 부유, 면과 선 등이 길항하고 나아가 생과 사, 아름다움과 소멸 등의 메시지가 침묵 아래 무성하다.
흑연과 안료를 섞어 붓고 그 농도에 따라 이리 저리 흐르다 침전되어 만들어진 색채와 질감, 테이프로 이루어진 윤곽선 등으로 재현된 꽃 이미지는 기존의 익숙한 꽃의 형상과는 무척 다르게 보여진다. 우선 그 꽃의 색감은 본래의 색, 자연적인 색채가 아닌 인공의 색이자 가상의 색채로 채워져있다. 모든 색이 탈색된 듯한, 색채가 소진해서 가라앉아 남은 재와 같은 색이다. 마치 금속성과 은박지를 연상시킨다. 생명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의 상징과는 사뭇 동떨어진 색채다. 따라서 그것은 절정의 순간을 지나 소멸을 향해 서서히 스러지는 꽃, 식물의 생애를 은유하는 듯 하다. 동양인들은 오래전부터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삶의 이치를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아왔다. 산수화나 사군자가 그런 것이다. 동물성의 육체를 중화시키고 식물성의 존재로 거듭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겸허한 태도로 자연과 교호하거나 우주적 연민의 정조로 모든 존재물을 성찰하는 마음이 동양예술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를 헤아리고 타자를 이해하는 마음의 결과 상통한다. 생각해보면 이는 미술의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꽃/식물을 통해 생과 사의 연쇄적 고리와 순환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개인적인 체험과 그로인한 깨달음 같은 것들도 스며들어있는 듯도 하다. 그래서 그것이 꼭 꽃일 필요는 없다. 꽃/식물/생명이미지를 모두 포괄한다고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 위로 얼핏 작가의 자화상도 그렇게 어른거린다. 그것은 깊은 우물처럼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