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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석전

  • 전시기간

    2007-11-21 ~ 2007-11-30

  • 참여작가

    주태석

  • 전시 장소

    노화랑

  • 문의처

    02-732-3558

  • 홈페이지

    http:// www.rho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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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석의 회화와 재현의 문제



김원방 |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




주태석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의 범주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것은 그리 잘못된 규정은 아니라고 보지만, 극사실주의의 본질, 극사실주의와 주태석의 작업 간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대한 논평이 좀더 필요해 보인다. 주태석은 70년 대 말 극사실주의 화풍의 <기차길> 연작으로 작품활동을 개시했고, 80년 이후 현재까지도 역시 매우 사실적인 방법에 기반한 <자연.이미지(Nature.Image)> 연작을 해오고 있다. 적어도 <기차길> 연작 중 가장 초기 작품들에 한정해 보자면, 그의 그림이 극사실주의라는 규정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 그림들에는 녹슨 레일과 풍화된 침목, 자갈들과 미세한 흙 부스러기, 지푸라기, 버려진 껌 포장지 같은 것들이 기계적이고 중성적인 방법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차길> 연작을 개시한지 얼마 후인 82년 경부터는 극사실주의 화풍과는 구별되는 면모가 그의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시점의 작업에는 그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주태석의 작업의 전체적 관심사가 이미 잘 나타나 있다. 그 새로운 면모는 <기차길> 연작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종의 '시각적 초점'이다. 여기서 화면의 중앙부분은 밝고 그 주변부는 어둡게 설정되어 있어 마치 기차길 중앙부에 인공적 무대조명이 가해진 것처럼 보인다. 다른 그림에서는 이것이 더욱 심화되어, 마치 빈 원통을 통해 바라보았을 때의 시야(視野)처럼, 기차길 가운데의 원형 부분 만을 밝게 그려내고 그 주변부는 완전히 어둡게 처리된 경우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주변의 어둠이 '어두운 물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림 자체를 부분적으로 차단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림 내부에 일종의 '제한된 시야'와 '시각적 초점'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그럼으로써 그림을 바라 볼 때 "지금 대상(기차길)을 바라보고 있다"는 자의식, 응시하는 주체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그림은 단순히 '보여지는 대상', 즉 재현된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는 장치'로서의 확장된 위상을 갖게 된다. 주태석이 부각시킨 '보는 장치'는 대상(즉 재현된 기차길)과 바라보는 주체, 이 양자를 분리 불가능한 관계항적 구조 속에 함께 포괄한다. 그리고 하나의 시각적 재현으로서의 그림이란 "바로 지금, 주체의 적극적인 신체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적, 비가시적 과정"으로서 드러난다. 그럼으로써 그림의 목적은 기차길, 나무, 자연풍경 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재현의 과정과 타당성에 대해 질문하는 일종의 자기반성적 특징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주태석은 작업노트에 "회화는 평범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포착하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한다"라는 명제 - 동서고금의 어떤 예술에도 당연히 적용될 만한 평범한 명제 - 를 써 놓은 바 있는데, 이 명제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시각적 초점을 통해 이제 그의 그림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대립과 차이로 이루어진 구조의 양상을 띄게 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화면 내부에 적절히 배분해 놓는 일종의 '시각적 정치경제'를 행함으로써, 본다는 문제를 구조언어학적인 '차이'의 문제로 구현하는 것이다. 마치 차이들의 연쇄적 구조 속에서 특정 단어의 의미가 결정되고 드러나듯이, 그의 그림은 재현을 일종의 구조화의 과정으로서 나타낸다. 이렇게 재현된 기차길이나 나무의 이미지는 마치 망원경을 통해 발견된 사물이나, 잠에서 문득 깨어난 사람의 눈에 들어온 세계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이러한 특징을 70년대 미국의 극사실주의 회화와 비교해 보자. 본래 극사실주의는 사물들의 외양(外樣, appearance)에 관심을 둔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궁극적 '실재'(The Real)에 관심을 둔 미술이었으며 단지 그 실재를 외양의 극단적 재현 속에서 발견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얼굴의 땀구멍이 보일 정도의 현미경적 묘사는 우리의 일반적인 지각의 능력을 넘어 "실제의 모습이 바로 이렇다니!"라는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각성을 유도해 낸다. 극사실주의는 바로 실재가 드러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인식과 구별되는 일종의 '차이화된 재현'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라깡은 "현실은 보이는 것이고, 실재는 입증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재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널려져 있는 모호한 현실의 '와중'에서 현실의 표면을 파열시키고 그 틈을 통해 분출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입증'하는 것이다. 극사실주의 회화는 바로 그러한 실재의 돌발적이고 불완전한 출현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주태석의 시각적 초점이 있는 <기차길> 연작 역시 기본적으로는 극사실주의 회화의 지평을 고수하며 확장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연작과 극사실주의 회화 간의 두드러지는 차이를 주목하자면 그것은 바로 앞서 제시한 '보는 장치'의 측면이다. 시각적 초점은 소위 '시각적 장'(Visual Field), 더 나아가 '응시'(Gaze)의 개념을 부각시킨다. 밖의 문에 구멍을 뚫어 이를 통해 안 쪽에 놓여진 여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게 한 마르셀 뒤샹의 작품 <주어진 (Etant Donne)>에서처럼, 인공적 초점이 설정된 <기차길> 연작은 그와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일종의 관음증적 상황 설정을 통해 재현이란 것을 더욱 주체의 신체가 개입된 과정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태석이 8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지속해 온 <자연.이미지> 연작은 어떠한가? 이 연작의 특징은 극사실주의의 일반적 스타일과는 매우 상이한 것이 사실이다. 우선 여러 개로 분할된 화면을 들 수 있다. 분할된 화면들은 각각 다른 기법으로 다른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이 화면들은 상호 간에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전적인 불연속도 아닌 모호한 조합의 상태 속에 있다. 그리고 전면에는 항상 나무 한 두 그루가 여러 화면들을 배경삼아 서 있다. 여기서 나무는 상당히 사실적인 방법으로 묘사되고, 이에 반해 그 배경은 몽환적으로 그려진 그림자의 풍경이다. 그 배경이 전면의 나무의 배경인지, 그 그림자들이 정말 나무의 그림자인지도 모호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연.이미지> 연작은 '하나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분열된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초점이 있는 <기차길> 연작에서처럼 그림 내부에 일종의 대립과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단 <자연.이미지> 연작은 여러 이질적 재현들이 공존, 충돌하는 방식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분열적 구조는 달리 말하면 바라보는 시선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그 그림들은 회화적 재현 자체를 이미 분열되고 불안정하게 얽혀있는 환상적 가설무대처럼 보여준다. 그림의 소재를 구성하는 '나무', '그림자' 등의 풍경은 소위 '자연의 정취와 개인적 낭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진리적 기능 그 자체에 대한 비평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다. "평범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포착하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명제는, 그 어떤 대상이건 그것이 회화의 재현적 세계로 옮겨지는 순간 본래로부터 일탈된 다른 무엇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필연에 대한 생각을 함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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