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2004년 부터 지속해 오고 있는 젊은 작가 발굴 프로그램에 선정된 작가 중 6인의 초기작과 최근작을 통해 젊은 작가의 성장과 발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시.
아트포럼뉴게이트 젊은 작가 6인전2008년 새해 첫 전시에 모신 6분의 작가들은 2003년 개관이래 <아트포럼뉴게이트 젊은작가 발굴>프로그램에서 배출한 8명의 작가중 2004년 권기범, 박서림 2005년 지요상, 이지송 2007년 한승구 2008년 손종준 씨 입니다. 이들은 선정 이후에 좋은 평가를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여작가: 권기범,박서림,지요상,이지송,한승구,손종준
오프닝 리셉션: 2008. 1.8(화) 저녁 6시
포럼 시간: 2008.1.8(화) 저녁 7시-9시
권기범 조화의 현재적 부재와 회복 윤두현 | 정소영갤러리 아트디렉터
…권기범은 지금까지 동양적 사유를 근간으로 이른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그의 작품 안에서 이상적 조화란 정작 그것의 현재적 부재를 먼저 드러냄으로써만 가능해진다.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충돌(clash)'이다. 여기서 충돌이란 다름 아닌 자연과 인공의 대립이다. 이로써 그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자연스러움'이 어떻게 부재하는가에 관한 작가적 인식을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우선 충돌은 그의 작업 전반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선들의 교차를 통해 표면화된다. 여러 겹의 층으로 한 데 겹쳐지고 중첩된 선들이 작위성과 자연스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충돌한다. 줄을 이용한 설치작업은 중력을 거스른 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선들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차차 이완되면서 자연의 질서 안으로 순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평면이나 영상 작업 역시 자연의 질서인 중력에 내맡김으로써 얻어진 자연스러움과 이를 거부하는 인위적 태도 또는 도시와 자연의 이미지가 혼재하는 속에서 충돌의 구조를 형상화한다. 또한 그가 각각의 선들에 담아내고 있는 관념들에는 '중력'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은 삶 내지 존재 자체에 대한 본원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순응과 거부라는 상반된 의지의 교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동양화의 관념적이며 회화적인 전통을 동시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가라는 문제로도 확장된다. 바로 무엇을 고수하고, 버릴 것이며 또 새롭게 취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와 함께 작가가 파악하고 있는 동양화의 회화적 요체란 바로 붓에 의한 필선이다. 전통의 문맥 안에서 볼 때 글씨를 쓰던, 난이나 매화를 치던 각각의 필선이 일궈낸 자연스러움의 정도는 곧 작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그 행위 주체의 삶과 철학적 깊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작가의 선에 대한 진지한 천착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써 선은 그에게 철학적 사유의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우주 혹은 자연의 질서, 참 존재, 조화와 같은 본질적 관념과 역사의 궤적들이 공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가 회화적 전통을 현재화하는 데 가장 큰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정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신성이란 다름 아닌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참된 자기인식의 의지와 다르지 않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과정 자체를 사유한다. 어떤 확정된 결과로써가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대립 안에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질서의 실체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
박서림 '생각하는 멧돼지' 의 여정 : 우리(we)의 우리(cage)로부터 김남인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작가의 멧돼지 작품 중, 몸에 무늬를 넣어 그린 [나는 멧돼지다](2006)를 보고 몇 년 전 그의 자화상 전시에서 보았던 한 이미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물아홉살에 스스로 내 꼴을 그리다](2002)에서 그는 멧돼지와 유사한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했던 인식의 선상에서 그는 자신이 입었던 옷을 멧돼지에게 입혀주었던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 보는 이를 쳐다보는 눈과 구불거리는 패턴의 반복적 움직임은 이 둘을 관통하는 정서적 교감, 더 나아가 삶의 조건에 대한 유사한 인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작가는 멧돼지의 눈을 그리며 스스로 그 눈이 응시하는 최초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멧돼지가 작가의 상황이 이입된 존재라 생각할 때, 사실 이것은 멧돼지가 멧돼지를 보는, 혹은 작가가 작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멧돼지를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본다면, 멧돼지는 작가의 무엇을 보는가? ―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작가의 무엇을 보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수묵을 다루는 작가의 자의식과 조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작업을 하면서도 디자인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 왔으며 동시에 자신의 작업과 삶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지없이 자연스러웠던 상태에서의 동양화가 시간과 역사를 거듭하며 스스로 정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는 동양화의 깊이에 공감하면서도 지금의 이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 수묵화의 지긋한 보폭이 작가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그 경험을 담아내기에 적당한 것일까 고민하는 것이리라.
그의 최근작인 [멧돼지가 있는 풍경](2007)은 그의 작업에 있어 하나의 전환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멧돼지를 클로즈업해 그렸던 지난 몇 년간의 작품과는 변화된 화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멧돼지가 공간과의 관계상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의자, 책상, 침대, 테이블 등이 이루어내는 새로운 공간 안에서 하나의 소재로 멧돼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공간은 모던한 디자인의 가구와 오랜 옛날의 괴석이 양존하는 그야말로 시대가 혼재된 곳이다. 청대의 화본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서 끌어온 모티브들, 작가의 소유물, 상상 속의 대상 등이 시공의 질서 없이 배치된 화면은 거리와 원근을 가늠할 수 없는 바탕을 배경으로 애매하면서도 불분명한 공간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이 애매하고 불분명한 곳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삶이 자리한 곳이 아닌가?
멧돼지는 문틈을 통해 이 공간을 빼꼼히 들여다본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모호한 공간과 물건, 그 우리(cage) 밖의 세계를 낯설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섞여있는 이 공간은 작가, 혹은 멧돼지의 내면세계로의 탐구이기도 할 것이다. …
지요상 지요상의 寂寥신항섭 | 미술평론가
…전통적인 수묵이라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형태묘사는 서구적인 조형기법, 즉 명암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색적이었다. 자기만의 조형적인 해석을 관철하려는 의지에 이끌리고 있는 극적인 명암대비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듯한 사실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러기에 멀리서 보면 목탄 소묘처럼 보일 정도이다.
'적요-눈 감고 머물다.'라는 부제는 대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명제는 그림의 내용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로서 그치는 그림이 아니라, 내용을 중시하는 그림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우선 발상 자체가 특이하다. 실제의 인물과 그 인물이 수면에 비치는
대칭적인 두 가지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구성이다. 실상과 허상의 대비인 것이다.
따라서 인물은 물그림자로서의 허상 역시 이 부분분만을 거꾸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인물은 삭발한 모습으로서의 수도자를 상정하고 있다.
실상과 허상은 수도자의 실제 모습과 의식의 그림자를 의미한다. 이는 육체와 정신, 물질과 관념, 현실과 비현실의 대립 및 양립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일체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회화적인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장자의 내편 제물론에 언급된 꿈에 대한 부분은 작업의 화두로서 대상과 일치를 표현하고자 하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실상과 허상이 일체가 되는 지점은 꿈꾸고 있다. 그림은 어디까지나 시각적인 이미지라는 점에서 단지 실상과 허상, 즉 신체와 의식이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서 머물 따름이다. 수도자가 수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이상경은 그의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과 허상, 신체와 의식이 합일하는 수도의 한 장면만을 서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주시하는 까닭은 어려운 내용을 시각적인 이해가 쉽도록 구성한 점이 그 하나이고, 수묵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 그리고 출중한 형태묘사 및 상활설정이다. …
미술세계 2004년 4월호 게재
이지송 매혹적인 사실 속의 달콤한 소외 김정락 | 미술사
… 이지송의 시각과 정서는 현대적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17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회화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작가는 전체적인 밑그림의 윤곽이 간단히 형성되면 마치 한 땀 한 땀 직조하듯 형상들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방식은 무수한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며, 그리기에 대한 현대의 형이상학적 태도와는 대립 항을 이룬다. 모더니즘이 부정한 이 전통적 화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그의 작업을 엿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는 미세 모에 물감을 찍어 점을 찍듯 화면 전체를 그린다. 시간의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경외심조차 불러일으킬 만하다. 또한, 간단히 윤곽을 그린 스케치 외에, 결과를 예비할 어떠한 밑 작업 없이 작은 붓질이 점차 전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을 보면 거의 편집증적 작업방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유사성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근거는 네덜란드 화가들과 이지송이 공유한 회화적 감성이다. 당대의 회화는 장르를 넘나들며, 대상을 인간의 모든 감관을 자극하도록 섬세하게 재현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작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우주 속을 유영하게 된다. 그들의 필력은 그런 맥락에서 즉물적이고 또한 환상적이다. 그들이 대부분 작은 크기의 화면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즉물성에 대한 집중력 때문이었으리라. 이들과의 비교는 작가 이지송이 전통적이고 미술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서 그리고 작업방식에서 유사성을 찾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들이 구축했던 감각에 대한 사실성을 그의 작업 속에서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유사성을 든다면,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거시적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지송이 연출한 사건은 소소한 일상적 실재이다. 그러니까 기억도 나지 않을 일상의 사건들이 드라마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를 이루는 정서 또한 가볍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조밀하고 심층적인 감정들을 드러낸다. hesitate(망설임), a delicate situation(미묘한? 순간), tedious play(지루한 장난) 등 명기된 제목들은 커다란 운명 따위나 극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사건이나 관습적 일상들에 연유된 것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성격들이다. 그 성격은 한편으로는 소외된 인간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욕망의 파행을 심리극처럼 펼친다. 그래서 상황 자체는 미미하지만, 그 심리적 파장은 매우 깊게 파고든다. 이러한 사실은 미시적 삶에 대한 감성적 애널리스트로서 이지송을 바라보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지송의 작품에 대한 감상자들의 일반적인 평가가 극사실적인 재현에 우선 근거한다면, 그의 방법론은 사실주의의 비 주류적 장르로 정의할 수 있는 Trompe l'oeil (눈속임 기법 혹은 회화)가 될 수 있다. 부재에 대한 대리적 표현으로부터 허위를 즐기는 유희적 성격까지 다양한 해설이 이 장르에 곁들여져 있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장르가 본래 작은 것에 충실한 회화방식이라는 점이다. 이 장르는 결코 기념비적인 성격의 의미나 시각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지송의 작업은 이 장르에 내재된 원리적인 특성들과 더불어, 일상에 산재된 평범하면서도 매우 섬세한 정서와 심리를 미묘하게 얽어내는 능력을 함께 보여준다. 이지송 회화에 보여주는 사실성에 대한 놀라움은, 묘사된 사물과 인물에서 뿜어 나오는 즉물적 감각에 취하게 되는 과정을 겪으며, 드라마가 구성하는 일상의 신비주의에 매혹되는 것으로 발전하는 감상의 로드 맵이 정해질 수 있겠다. …
한승구 '응시'와 '몰입'김최은영 | 미학,더갤러리 디렉터
[나르시소스의 두 얼굴 : 분열된 편집증]
타자를 통해 자아를 보려했던 한승구의 시선이 나르시소스로 움직여 새로운 몰입의 국면을 맞는다. 그는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편집증적인 자기보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을 바라봤던 것을 '편집증'으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작용으로 등장한 자기애적 바라보기를 통한 자기안의 여러 자아에 대해 '분열증'이라 명명하지만 나는 조금 달리 해석해 내고 싶다. 끊임없는 자기 응시를 통해 비로소 발견하게 된 존재성이 곧 '편집증'적 증상이며 동시에 그 안에 실존하는 다양한 자아를 다시 '분열증'적 목격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한승구에게 새로운 스팩트럼의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제 그는 기존의 얼굴을 거세하지 않은 채 타자의 얼굴과 비순차적으로 교차, 혼재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Nod방식) 게다가 24개의 얼굴이 서로 뒤섞일 때 발화점이 되어 주는 것은 터치스크린을 만져 다른 얼굴로 변하게 만들던 바로 그 관람자(매개자)의 손끝에 달려있다. 즉, 浮彫化된 얼굴화면 앞엔 24개의 전구모양의 球들이 놓여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다. …
… [말거는 타자들 : 인터렉티브]
이러한 관람자(매개자)의 행위는 전시작품 전면에 걸쳐 모두 적용된다. "후우~"하고 입김을 불면 자유로드롭이라는 놀이기구처럼 익명인의 얼굴이 담겨있는 모니터가 직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올라갈 때보다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화면 속의 인물은 올라갈 때 물에 덮혔다가 내려올 때 물이 빠지면서 다른 인물로 변화되어 진다. 여기서 다시 적극적인 인터렉티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승구의 작품들은 관람자가 곧 매개자면서 동시에 자아를 찾는 개체자이며, 때론 자아에게 말을 걸어주는 타자가 되기도 한다. 굳이 한승구식 자아와 타자의 존재와 분류기준을 살펴보자면 퐁티의 '신체성의 자아'와 매우 유사한 구분방식을 갖는다. 내적, 심리적 기준의 경계가 아닌 외적, 신체적(얼굴)으로 보여 지는 구별법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조형예술창작자에게선 너무도 당연한 사유의 방식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인터렉티브한 코드는 한승구가 애초에 던져 놓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내는 행위로 '나'와 '남', 서로가 모두 존재해야만 가능한 '마주보기' 속에서의 '자아보기' 정도가 되겠다. …
손종준 테크놀로지시대의 신체와 그로테스크 이미지강수미 | 미학
손종준의 사진들에서 가장 먼저 눈을 자극하는 것은 날카로운 금속성의 기계장치이다. 은색의 견고한 금속 조각들이 볼트와 너트로 극히 단순하게 접합된 이 정체 모를 장치들은 사진 모델의 몸을 둘러싸는 식으로 부착되어 있는데, 부드러운 단백질 피부와 오밀조밀한 형태로 이뤄진 인간 유기체에 대비되면서 더욱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데 이러한 대비효과 때문에 우리는 손종준의 사진을 보며 새삼 인간과 기계의 병합 혹은 각종 장치에 포위된 현재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여기에 이 작가 작업의 미덕이 있어 보인다. [defensive measure]라는 사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손종준은 자신이 만든 이 생경한 기계장치들을 ‘방어 도구’로 상징화했다. 그런데 사진 속 그 장치들은 구조적으로 보면 머리에 씌워져 두개골과 안면을 보호하거나 어깨와 팔에 부착되어 보호대 구실을 하는 한편, 세부적으로 보면 금속 표면에서 화살촉처럼 생긴 것들이 예리하게 솟아나 있어 공격용 무기 구실을 한다. 이를테면 사진 속의 이 낯선 기계장치들은 단순히 ‘방어의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인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방어이자 공격 수단인 것일까? 작가의 사진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우리는 각종 테크놀로지 기계장치를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내 본원적 신체 지각과 세계 경험을 위축시키기 않은 채 다만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뿐인가? 손종준의 사진을 보건대, 우리는 그렇게 자율적으로 기계장치와 관계 맺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에서 은색 기계장치라는 극단으로 표현됐지만, 사실 그 장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매체 또는 도구들을 상징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선택적으로 탈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제 2의 피부’ 또는 ‘제 2의 감각기관’처럼 우리 몸에 달라붙어 있으며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와 맺는 인식적 ? 감각적 관계를 재편한다. 그 재편의 의미가 둘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즉 손종준의 사진 속에서 기계장치들은 무엇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공격 수단’이라는 것인가 질문했을 때, 그 답은 곧 그 장치들이 우리 바깥의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잠재적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이자 그 장치들을 통해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행사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병합돼 있는 각종 장치들(여기서 장치는 단순히 기계장치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 기구, 제도, 물리적 형식을 포괄한다.)은 우리를 타인과 융화시키고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더욱 내밀하고 폭 넓게 한 것이 아니라 극히 자기 폐쇄적이고 사물화된 관계로 재편했다는 것이다. 손종준이 기계장치를 쓴 그로테스크한 인간 신체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읽어내기를 기대한 메시지는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defensive measure]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 또한, 조형적 테크닉보다는 이 텍스트성, 즉 첨단 장치들에 익숙해진 우리가 과도하게 방어적이고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타인을, 세계를 소외시키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소외돼 있음을 말하는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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