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로또복권사업자였던 ㈜코리아로터리서비스(KLS)가 삼성동에 설립한 미술품경매사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가 경매에 앞서 특별전을 개최. 미술품의 관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이 회사는 출범을 알리는 첫 이벤트로 경매 위탁수수료율을 3%로 책정(기존 10~15%)해 파란을 일으켰듯 첫 사업으로 젊고 눈여겨봐야 할 작가를 소개하는 것.
일탈의 기술'전에 부쳐김인선 | 인터알리아 아트디렉터
'일탈'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감각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흔하게 찾아오지 않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실행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을 만끽할 수 있음에 은밀한 기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일탈의 순간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지만 타이밍이 나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 일탈을 결정할 때는 가장 과감해져야 하면서 동시에 가장 위축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탈의 기술>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시의 개최지인 '인터알리아'라는 곳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 인터알리아는 KLS(Korea Lottery Service)라는 자본력을 갖춘 사업체를 모기업으로 하여 2007년 중반부터 전시, 세일즈, 옥션, 컬렉션 등의 사업을 위한 약 8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그 시작을 <일탈의 기술>이라는 전시로 런칭하게 되는 아트 컴퍼니이다. 인터알리아는 그 기반이 전혀 미술과 상관이 없었다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는 과정에서 미술시장의 구태의연한 시스템을 감지했다. 마케팅 전문기업을 모태로 한 인터알리아는 이러한 미술시장을 보다 안정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게 되었고 미술시장의 형태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최근 미술시장의 열풍에 비해 시스템이 그닥 체계적이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미술시장의 약점은 기업의 형태로서 미술시장의 시스템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인터알리아로서는 오히려 강점을 지닌 회사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는 감을 잡게 되었을 터이다. 이리하여 KLS로서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미술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 이 회사로의 첫 번째 일탈이다. 첫 번째 전시인 <일탈의 기술>을 실현하기까지도 인터알리아는 과감한 결정이 필요했고, 위축된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참여 작가 리스트로는 옥션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작가들 이름은 보이지 않고 좋은 작가라는 말을 대책 없이 믿어야 하는 것이 회사로서는 답답한 노릇임에 틀림없다. 상업시스템에서 할 수 있는 전시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시를 기획한 본인도 "잘 팔리는 작가입니다."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알리아는 다시 과감한 일탈을 저지른다.
이 전시가 과연 저 400평의 전시 공간에 앞으로 어떤 성격의 전시들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술시장에 아직 활발하게 프로모션 되지 않은 작가들에 대해 이 공간 속에서 그들의 시장성에 대한 가능성을 검증 받고 실험해 보는 자리로서 활용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있는 전시이다. 그래서 이 전시는 미래지향적이다. 그런 와중에도 작가들의 상업성을 의식한 것은 국내외의 앞서가는 감각의 컬렉터들이 선호하고 구입하는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았다는 점이다. 갑작스러운 미술시장의 호황에 대한 우려를 전시기획자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흐름에 함께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시장성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거나 이미 미술시장에서 검증 받았으나 스스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작가들을 모았다. 작가로서의 진지한 태도와 결과물인 작품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살아있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현대 미술의 중심이 비평가에서 큐레이터, 그리고 지금은 컬렉터에게 좌지우지 되고 있는 흐름을 눈치채고 있다면, 그리고 조금 더 앞서 관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 흐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순환고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사실 이 모든 경향이 공존하고 있으나 대중을 향해 부각되는 강도에 따라 마치 중심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도 벌써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시류 속에서 굳이 돈의 흐름에 중심을 두지 않고 심지를 굳히고자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일탈의 기술이다. 즉 여기 참여한 작가들이 자신만의 관심사에 시선을 고정하여 그 내면의 진실성(reality)을 끊임 없이 모색하는 꿋꿋한 시선을 고집하는 것처럼. 그리고 인터알리아가 미술계의 호황의 급 물결에 곧장 뛰어들지 않고 신중하고 치밀하게 준비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일탈이라는 큰 테두리에 묶을 수 있었던 공통점은 그들이 '그림이 어떠해야 하며, 사진이 어떠해야 한다'는 전통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의 역할이 이데올로기적 관점, 사회적 맥락이라는 틀에 끼워진 채 해석되었던 경향이나, 대중의 구미에 맞추어진 생산품의 미술이나, 전통의 화풍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작품 등과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작가들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치중하고 있고,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고 있는 물건이나 풍경, 인물 등을 낯선 어떤 것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통과 기성 작가들이 다루어 온 권위적인 형식이나 사상들을 탈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미술 형식기반을 다지고 있는 세대의 옐로우칩 작가들이면서 미래의 블루칩 작가들이다.
김시연은 이야기의 서술을 기반으로 하는 설치 작가이다. 시나 짧은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설치장면을 전시하고, 그것을 사진에 담아 사진 작업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울한 기운에 의해 생성된 소금이 집을 둘러싸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바리케이드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리케이드는 너무나 연약하여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부서뜨릴 수 있는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역설적이지만, 차단된 소통 장치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주고, 일방적으로 주변을 칭칭 둘러싸는 겁먹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부자연스러운 소통의 현장을 잡아낸다. 김시연의 설치는 언제나 작가가 거주하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렇듯 설치의 배경이 되는 공통적인 작가의 생활 공간은 그녀가 만드는 스토리와 그 속으로 초대되는 관객과의 색다른 소통 구조를 드러낸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의 세계를 대중적인 차원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가 김태중이다. 김태중은 낙서 광처럼 그림 그린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질서가 있다. 인물도 일관적으로 그려내는 캐릭터가 있고 복잡한 글자와 이미지의 조합 속에서도 영역의 경계가 있다. 이것은 선적인 요소들이 독특하게 연결됨으로써 만들어지는 효과인데 자세히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이면서 에로틱하거나 노골적인 것이 아마도 거침없고 자유로운 자신의 이야기나 꿈 혹은 상상을 일러스트 같은 형식으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그 문맥을 제시하곤 하는 것이다. 각종 매체나 광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그 형식을 넘나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작품을 만나는 매체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여타 작가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최승훈+박선민, 그리고 김기라 작가는 텍스트를 읽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하여 소통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보고 있다. 김기라의 경우, 현대사회의 독소로 취급 받는 요소들 - 인스턴트 식품과 관련한 재료, 일회용 포장지, 담배, 술 등 - 이 작업소재가 되고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게 되고, 눈으로 읽혀진 이미지와 텍스트들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재인식되게 만든다. 주변의 사물이나 그가 즐겨 먹고 보는 것, 그리고 심지어 아무런 미련 없이 버려지는 일회용품, 포장지 등을 화려하게 세팅한다. 마치 클래식 회화의 정물화의 반짝이는 은쟁반과 싱싱한 과일처럼 정크 푸드들은 매혹적인 포장지의 반짝임, 디자인, 강렬한 색상 등으로 화면을 화려하게 뒤덮는다. 가장 아름다운 배치는, 아름다운 표현은 무엇이어야 한다는 끊임없는 미학적 재료를 찾아온 전통적인 작업이 아닌, 자신이 직접 먹고, 대하고, 버려온 주변의 소소한 물건들이나 음식을 다루면서, '정물'이라는 가장 권위적인 형식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We Are the One"이나 "Coca Killer"등의 문구를 통하여 대중화 되어 머릿속에 인식되어 온 텍스트 혹은 이미지를 시니컬하게 되뇌게 하여 그 사용과 의미에 대해 비껴나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최승훈, 박선민은 소통의 문제에서 보다 실험적이면서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데 이들은 식물 모양의 알파벳을 고안하여 - 각 식물의 학명 앞자리와 기존 알파벳이 일치되어 표기 - 지인들께 쓴 편지를 보여주거나 알파벳화 된 실제 식물들이 한군데 모아져서 가족 사진처럼 단란한 장면이 연출된 사진을 제시한다. 하나하나 쓴 편지는 상형문자처럼 암호화되지만 그것이 해독 불가능 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난해한 개념의 강박증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규정해 놓았을 뿐 사실은 지극히 추상적인 문자들보다 일상적 이미지로 그 의미를 전달해 온 상형문자의 전통을 도입하여, 형상의 인식을 우선시 하게 하면서 구체적인 시각인식을 유도하게끔 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시각적 스케일의 문제에서 드러나는 현실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을 그들이 집에서 실제로 키우는 잡초와 비둘기 그리고 고양이를 사진에 담으면서 보여주는데 이들 모두 의도하지 않게 만난 손님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잡초는 어느 날 마당에 피어나기 시작했으며, 비둘기와 고양이도 담을 타고 들어와 어느새 최승훈, 박선민 부부가 대접하는 식사의 정기적인 손님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최승훈, 박선민 작가의 프레임 속으로 담겨진다. 잡초의 어느 부분이 확대되고 비둘기는 근사한 초상사진처럼 우아한 포즈로 보여진다. 이는 시각적으로 낯선 느낌을 주는데, 그 이유는 '사진'이라는 장르가 관객에게 주는 관념적인 독해력과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사진 속에 반영되는 보통의 스케일과 이를 정면으로 마주 대했을 때 화면 속의 이미지가 실물보다 크거나 비슷할 때 느껴지는 시각적인 스케일감은 확연히 달라지면서 거대한 물체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케일(Scale)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가 이윤진이다. 실내 사진 한 장을 뽑았다고 생각해 보라. 거기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보게 되는 공간의 한 구석은 그 전체 사진 중에서도 10분의 일도 안 되는 작은 부분이다. 이윤진은 그런 구석 공간 깊숙이 렌즈의 시선을 파고들어 잡아낸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코앞에서 부딪히는 크기와 다르지 않을진대 이를 평면 사진으로 벽에 걸어놓으니 마치 거대한 공간 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사물의 크기가 과장된 것이 아니어도, 그것들이 난생 처음 보는 특이한 물건들도 더더욱 아니지만 화면 속의 그 공간은 낯설기만 하다. 그 낯설지 않은 사물들이 우연히 한 공간에서 만나며 만들어낸 공간감이 또 다른 관심을 끌게 되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화면을 살피다 보면 전체 화면이 평면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사진 속에서 사물 하나하나의 입체감은 느낄 수 있으나 바닥에 비쳐지는 그림자가 최소화 되어 있어서 그 좁은 공간이 아예 납작하게 보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원근법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다.
시각적인 혼란을 주는 작가들 중에서도 김수영과 이종명은 실제 장면에 대한 전통적 원근법에 약간의 터치를 가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시각적인 착각을 유발한다. 눈의 위치에서부터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인식되는 공간의 끝점을 소실점으로 잡고 눈의 연장선을 긋는 원근법을 잘 적용하면 꽤 근사한 공간감이 평면 속에 드러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자신의 눈에 읽히고 인식되는 대로만 우선하여 화면에 옮기는 작가가 김수영이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각도를 일부러 삐뚤게 낸 캔버스에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각도는 정90도이고 고전 원근법과는 다른, 이론보다는 실제에 기초한 작가의 작업방식으로 인하여 틀 자체가 왜곡되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배워왔던 관념적인 원근법을 적용하지 않고 실제 보이는 대로 건물의 선을 캔버스에 옮겨 담은 것이었다. 건물의 표면이 정형화된 창틀로 인해 규칙적인 패턴 형식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이면서 견고한 건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원근법을 활용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가 화면 속에 담은 것은 소실점을 두고 기계적으로 맞추어진 원근법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자꾸 건물이라는 관념의 구조와는 다른 혼돈을 느끼게 된다. 건물의 수직이 틀린 것 같고, 수평이 뒤죽박죽인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캔버스도 비뚤어져 보인다. 그렇다고 시각적 인식의 질서를 흩트려 놓지도 않는다. 그냥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따라서 그려보는 것이 작품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이 얼마나 비정형적인가. 사진작가 이종명은 한술 더 떠서 찍힌 시선의 이미지를 화면 위에서 변하게 만든다. 실제로 관객은 건물이 움직이고 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그의 사진 속 건축물은 도시의 가장 높은 어떤 곳에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주변의 도시 이미지가 함께 담겨있다. 같은 대상을 찍은 필름을 겹쳐서 이를 그대로 프린트 하여 결과적으로 중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딱딱한 도시의 건물은 이러한 과정에 의해 갑자기 유연한 유기체처럼 변한다. 우리는 관람자의 관점이 순간적으로 변한듯한 착각을 하게 되며 그것이 교묘한 조작으로 관객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는 허구적이고, 작가가 지배하는 또 다른 풍경으로 제시된다. 그의 시선이 최대한 높은 곳에 두어져 있다는 것도 이러한 점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리고 그 도시에서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건물을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로 재 조합하여 창조해 낸다는 것은 전지전능에 가까운 권위를 만끽할 수 있는 작가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로 인해 작가는 초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우리의 눈을 통하여 건물뿐 아니라 현세의 레이어를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리얼리즘에 대해 몇 번은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 이명호와 이중근은 지속적으로 눈과 관념 사이에서 겪을 수 있는 사실성의 혼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명호의 사진으로 관객은 감각으로 인식된 이미지와 실제로 존재하는 원래의 시스템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기존의 풍경 속에 캔버스 천을 배경으로 설치하여 찍은 나무 사진 시리즈는 사진이 주는 진실성을 의심하게 유도하는 동시에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아보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 속에서는 인식 차원의 사실성과 실경으로 존재하는 진실이 끊임없이 교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작가의 눈은 관객의 눈을 이끄는 외부 장치로 작용하게 되고 관객은 사진이라고 믿을 때까지 얼마간의 당혹감을 갖게 되는 인식의 공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원래 그러해야 했던 사실, 즉 '원래 저 자리에 나무가 있었다'라는 사실을 캔버스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찍고자 하는 대상을 '저 자리'에서 분리하여 촬영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완전히 환경 속 요소가 분리되었음을 믿게 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그의 작품에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이중근은 자신의 신체 일부분, 또는 주변 사람들의 사진 이미지를 재조합하여 패턴화한다. 그 패턴은 멀리서 보면 화려한 무늬로 인식되고 좀 더 다가와 거리를 좁히고 시간을 들이면 패턴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실존하고 기능하는 이미지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가 말하려는 진실이 세부를 들여다봐주길 원하는 것인지, 전체로 인식해 주기를 원하는 것인지는 언제나 반복적인 의문으로 던져진다. 일상의 이미지가 화려한 패턴으로 변하는 순간 그의 작품은 장식성을 강하게 띄면서 일상 생활용품으로 던져지기도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게 되는 의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능이 추가되어 활용과 움직임을 주도하게 된 그의 패턴작업은 캔버스에서 시각의 환영을 유도하던 미학적인 기능을 뛰어넘어 인간의 활동을 제어하게 되는 것이다. 의자로 제작하거나 의복, 혹은 테이블, 벽지 등으로 재가공되는 이중근의 작업은 실재와 허구와의 관계를 뛰어넘어 우리의 공간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천성명의 작업은 연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분위기와 심리를 나타내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그의 개별적인 조각품들은 특정 이야기의 단편이지만, 천성명이라는 실제 캐릭터와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반영되어 현실과 가상의 범위를 넘나들고 있다. 작가 자체가 작품으로 숨어들어가듯이 작품은 주로 작가 자신의 얼굴을 본 따서 만들어지는데, 허공을 응시하면서 남의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무표정한 얼굴에 가깝다. 상처가 나 있거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우울한 모습이라서 관객까지 감정이입이 된다면 참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이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이나 광대 혹은 눈을 가린 채 헤매고 있는 어린 소녀의 이미지는 모두 어둠이라는 곳을 찾아서 기어들어가고 있는 다음 장면을 연상하게끔 하는데,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이입시키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스스로 넘나들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주상연의 작업은 훨씬 부드러운 감성을 표현해 주고 있는데, 그녀 역시 마치 이야기의 일부를 단편적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화면을 나열하면서 영화의 장면들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것은 화면에 공통적으로 서려있는 빛과 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는 종교적인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혹은 생명과 관련되는 요소로서 경건함과 연관해 볼 수 있다. 대상은 작가의 시선이 가까이 갈수록 더 견고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곤충이나 거미줄, 물고기 등의 생물 혹은 사람의 이미지들임에도, 이 클로즈업 된 대상들이 오히려 부드러운 감촉을 드러내는 것은 포커스를 의도적으로 흐리게 한다던가, 노출 시간을 오래 두어 움직이는 생물의 속도감을 표현하는 등 원래의 이미지를 보다 말랑말랑하게 보여지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래의 이미지에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감각을 더해 주고 있다. 찰나의 순간이라기 보다는 정지되어 있으되 그 다음 장면과 그 이면을 상상하게 하는 효과를 주게 된다.
'일탈'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가능성을 전재로 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탈이 즐거웠다면 또 다른 일탈을 꿈꾸어 볼 수도 있겠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이 전시를 개최한 인터알리아, 그리고 관람객들에게 그들이 꿈꾸는 <일탈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 이 전시가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작가들은 과연 특별한 재주가 있지 않은가. 이토록 소소한 것들을 통해서도 '일탈'행위를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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