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화가 서정태를 언급할 때 그의 이름 앞에 '한국화 채색화가'라는 수식을 항상 붙이고 싶다. 그가 채색화가라는 사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각별한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채색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서정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별한 의미가 오늘날 크게 간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보편적인 회화의 가치 측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지만 화면의 도상적 해석 너머의 질료적 토대가 주는 본질적인 차이 같은 것을 읽어주지 않는 추세 때문에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그런 보이지 않는 점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퇴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러한 노력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전통 한국화를 평가할 때 우리가 가장 잘못하는 것은 바로 채색화를 서양 유화의 대체재 혹은 아류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색화가들이 가지는 불만 가운데 첫 번째는 채색화의 진정한 묘미와 가치를 읽어주는 독법과 글쓰기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채색화는 재료를 기술적으로 잘 소화하지 못할 때 유화와 비교되어 폄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은호, 김기창, 박생광, 천경자 등의 쟁쟁한 거장들이 보여준 채색화의 경지와 내공은 같은 내용이나 이미지의 화면이라 하더라도 유화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자.
특히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을 발산하는 한국 채색화의 특징과 묘미는 누구나 쉽게 감지할 수 없다. 그림을 보는 안목과 내공이 어느 정도 쌓였을 때 경험적으로 감지된다는 것이다. 끈적거리고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띤 유화가 식상해질 때에서야 그것의 가치와 진면목이 섬광처럼 눈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이런 감식안이 오늘의 동시대인들에게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림을 보거나 읽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다. 현대의 작가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어떤 과정을 통한 경지를 무시하고 유화를 다룰 때의 감각과 제스처로서만 접근해서 분칠한 것 같은 화면들이 채색화 폄하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또한 젊은 작가 좌절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점은 오늘의 젊은 작가들만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거장들의 초창기 습작 역시 그랬다. 예컨대 기교를 완성하면 내용이 공허하고, 내용적으로 충실한 작품은 채색화 고유의 미감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채색화의 참맛과 묘미를 주는 작가가 많지 않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화가 서정태가 단순히 화가로서가 아니라 채색화가로서 우리에게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각별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한국화 화단에서도 작가에게 거는 기대가 컸으며, 작가 역시 의연하게 자기 회화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동시대 소임에 대해서도 깊이 고뇌하는 작가상을 보여 온 터다. 93년 조선일보가 제정한 '올해의 작가상'에서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도 채색화를 통한 전통미술 중흥과 창조적 발전이라는 중책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화면이 가지는 성취들 중 첫째로 꼽고 싶은 점이 바로 채색화 느낌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채색화의 확장된 미감을 절묘하게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채색화는 조금만 덜 숙성되어도 금방 약점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작가는 이점을 잘 극복하고 있다. 작가는 종이의 마티엘을 독특하게 내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자기만의 방법들을 장인적으로 축적해왔다. 그 결과 종래 보아온 여타의 채색화와는 화면의 분위기나 색감이 사뭇 다르다. 특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초상 이미지들과도 적절하게 밀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작가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독특하고 개성적인 이미지이다. '푸른 초상' 연작으로 잘 알려진 그의 화면은 결코 편안한 서정적 화면이 아니다. 무언가 불안한 그림자를 안고 있는 내면을 조금씩만 열어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조금은 밝고 해학적인 분위기도 엿보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오랫동안 견지해온 어두운 분위기가 쉽게 걷히지는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개성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사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따라다니는 실존의 그늘을 떨치지 못하는 이상 크게 변할 수 없는 것으로도 보인다.
초상이라는 것이 대상인물의 개성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지만, 그의 초상은 오히려 대상의 개별성이 제거되고 공통적으로 부각되는 하나의 정형화된 아이콘으로 수렴되고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실존에 대한 자화상이 아닐까. 생기 없는 박제와도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기로와 문턱에 놓여 있는 존재를 끊임없이 묻고 또 침묵하는 독백과도 같은 것이리라. 태연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몸짓 또한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실존과 희망, 유토피아를 기만당한 동시대인의 소리 없는 절규로 들리기도 한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여체이거나 여성의 얼굴이다. 하지만 어떤 관능과 욕망의 테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용된 오독의 범위에서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같은 부류로 읽혀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는 죽음, 그림자, 어둠을 의미하는 삶의 알레고리를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마치 팽팽하게 조율된 현악기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는 바람결에도 어떤 굉음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이유를 작가는 쉽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침묵이 때론 더 훌륭한 담론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편 인물의 배경에 작가는 다양한 세계상을 더욱 간결한 삽화적 도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물의 여백 공간에서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이미지들이 오히려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재치와 감각이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햇살처럼 돋보인다. 절제된 잿빛 혹은 군청색조의 탄탄함과 화면 속에서 간간히 보여주는 강렬한 색상의 상큼함이 여타의 채색화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오늘의 예술이 그야말로 해볼 실험은 다 해본 끝에 ‘현대’라는 막다른 궁지에서도 사회적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종교배라는 강력한 패러다임에 기인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많은 공해를 배출하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영위할 수 있는 원천도 결국은 무차별적 교배와 생식능력 때문이다. 이러한 잡종적 문화코드는 결국 종래의 고유 체계들을 해체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바로 전통적 양식이나 장르가 소멸 일보 직전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미술에서 보편화 논리에 직면한 전통 한국화의 딜레마는 이제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로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미술계가 주체적 신념으로 저항의 몸부림을 보였으나, 이제는 대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인 것 같다. 물론 전통 산수나 문인화의 경우는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 채색화의 경우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우리는 그동안 서양화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에만 열중했지 채색화가 왜 존속되고 발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조형적 호소와 설득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별로 없다. 자칫 서양화의 조형논리에 함몰되어 채색화 기반의 우리다운 그림이 사라져갈 위기에 그나마 위안을 얻고 든든한 것도 바로 그가 있어서다. 채색화가 서정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