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1950년대 우리나라에 서양식 판화 기법을 도입하고 한국 현대판화가협회를 창설하는 등 한국현대판화의 기틀을 일군 배융의 작고 16주기 기념전.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시기별 대표 판화와 회화 작품 80여 점이 소개된다.
裵隆 16주기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6년전 사간동에서 진화랑이 탄생할때, 벽면 인테리어와 봉투 Letter head, Logo를 만들어 주셨던 멋있고 세련된 배융 선생… 벌써 소천한지 16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동경에서 한 일 현대 작가 교류展 (박향숙 . 기지마쇼-고 전)을 주최하면서 오가는 길목에, 만개한 벚꽃들을 보며 배융 선생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는 1992년 작고 직전까지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며 그 누구보다 국제적인 감각과 사유를 가졌던 작가였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화단에, 최초로 판화작업을 개척하며 국제적으로 승화시킨 분이었고,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을 오가며 수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진화랑에서도 그 사이 2회에 걸쳐 배융 초대전을 기획하였고 또한 그의 장남인 배현식씨 소개로 이번 16주기 기획전을 하게 된 것에, 저 또한 매우 감회가 깊고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배융 선생의 16주기 전은 그의 일생의 작업을 총망라하여, 1958년에서 1992년 작고 직전까지의 작업 80여점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향기 가득한 발자취를 살리며 인생의 무상함을 애탄하나, 한 편 그의 작업이 이렇게 살아있어 그 무엇보다 흐뭇합니다. " Life is short, Art is long" 이라는 말귀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에 계시는 유족과 친지 그리고 고객 , 배융 선생님을 기억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고자 자리를 마련하오니, 부디 오셔서 그를 추모하는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4월
도쿄에서 벚꽃길을 오가며
유 진
자유와 사랑과 구도의 길
- 배륭의 작가적 편력과 작품 세계오광수 | 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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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륭의 작가적 편력은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기(50년대 후반 - 73)와 미국으로 이주해서 그 곳에서 작고하기까지의 시기(74 - 92)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한국서의 활동 기간이 약 15년 쯤 되는 반면, 미국서의 기간은 18년이니까 미국에서 활동한 기간이 약간 긴 셈이다. 작품상의 변화의 양상을 통해 보자면 한국서의 활동 기간을 하나로 묶어 볼 수 있다면, 미국서의 작품의 내용은 몇 차례의 변모를 보여주고 있는 편이다. 그것을 나누어본다면 74년에서 80년대 초까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80년대 초에서 88년 무렵까지를 또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하면 88년에서 92년 작고하던 시점까지를 역시 또 하나로 볼 수 있다. 미국서의 작품상의 변모가 몇 차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서의 작품 생활이 왕성했다는 증좌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서의 활동은 주로 판화가로서의 영역에 머문 반면, 미국서의 활동은 판화와 회화를 아우러는 폭넓은 조형영역에 걸쳐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국서의 그의 작가적 이미지란 판화가로서 인 반면, 미국서의 그것은 회화 전 영역에 걸친 조형작가로서의 이미지가 한결 뚜렷했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공식적인 활동은 58년 차습과의 2인전(58년)과 개인전(61년)으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74년까지 개인전만 여섯 차례나 기록되며 각종 초대전은 이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된다. 이 시기는 판화영역에 중점적으로 활동을 피력했던 시기로 초대전 역시 판화전이 단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한 사람의 판화가로서보다 한국 현대판화의 개척이란 사명감을 지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미답의 현대판화를 정립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초 우리의 판화계는 고작 몇몇 화가들에 의한 전통적 판법의 목판이 중심을 이루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나 기술에 있어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배륭을 중심으로 한 몇몇 현대 판화가 들이 해야 했던 일은 판화에 대한 독특한 회화 양식으로서의 이해를 알리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현대 판화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일이었다.
배륭이 일찍이 현대판화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그가 미공보원(USIS)에 근무하면서 미국의 새로운 미술 정보를 누구보다도 빨리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담당한 일이 홍보물 제작이었기 때문에 자연 실크스크린 같은 현대 판화의 기능적 측면과 조형적 가치를 일찍이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3년의 국립 중앙 박물관의 초대로 열린 <5인 판화 초대전>은 한국 현대 판화의 출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 초대된 작가는 배륭을 위시해서 김봉태, 김종학, 윤명노, 한용진이었다. 물론 이들보다 앞서 현대 판화가로 유강렬, 이항성, 정규 등을 꼽을 수 있으나 이들은 극히 개인적인 작업 영역에 머물러 있었을 뿐 현대 판화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판화를 현대미술의 주요한 영역으로 인식시키는 계몽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배륭을 위시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였다. 이를 계기로 현대판화가 주요한 초대전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해외의 유수한 국제전에 출품하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현대작가초대전에의 판화의 초대와 신시나티를 비롯한 국제전의 참여가 이 무렵을 기점으로 이루어졌음은 한국 현대판화의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에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창립되는 바탕도 배륭을 중심으로 한 몇몇 현대 판화가 들의 왕성한 활동의 결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서 70년엔 <서울 국제판화 비엔날레>가 열리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미술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배륭이 참여하고 있는 주요 판화전은 동경 국제 판화 비엔날레,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제판화 비엔날레, 깔피 국제 목판화 트리엔날레, 밀라노 국제 목판화전 등이다. 배륭은 이들 유수한 국제 판화전에 참여함으로써 국제적인 판화가로서의 명성을 일직이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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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륭의 초기 판화 작품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던 관계로 디자인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가 자주 사용한 실크스크린 판법도 그래픽 디자인과의 관계에서 쉽게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판법이 세련된 반면 초기 그가 즐겨 다루었던 소재는 전통적인 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며 그러기에 민속적인 이미지들이 적지 않게 분포된다. 이는 그의 조형의 뿌리가 우리의 고유한 정서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의 작품 속엔 현대적인 도시 이미지와 현대생활에서 취재된 내용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이는 그가 포드재단의 초빙으로 잠시 뉴욕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현대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는 단면들이다. 이 시기는 팝 아트가 현대미술의 주류로서 부상되고 있었던 무렵이다. 뉴욕 브로도웨이의 창에 비친 도시의 이미지들, 로고, 문자, 술잔, 여배우, 광고의 잔흔들이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가 하면, 문자와 기호 그리고 인간의 이미지가 중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배륭은 현대적 영상의 범란 속에서 활기찬 미국 미술의 단면에 깊은 감화를 받는 한편 자신을 되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고요하게 흐르는 저음의 영상에서 보이는 명상하는 분위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조용히 반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끊임없는 자성을 동반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후 그의 작품은 시대적인 미의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전통적인 정서의 현대적 해석에 주력해나감을 엿볼 수 있다. 술잔, 편지, 과일, 인간의 실루엣 등 현대적 영상의 세련된 구성과 색채의 아름다움은 조형의 자율성에로 빠져가는 일면을 지니는 것이며 이와 병행된 전통적인 문양과 민화의 이미지들을 양식화한 작품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의 한국에서의 그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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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륭이 그의 가족과 같이 미국으로 떠난 것은 74년이다. 미국 정착 초기에 해당되는 74년에서 8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은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영향 때문일까. 보다 밝고 자신에 넘치는 조형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도시적 이미지, 특히 미국 생활에서 얻은 각가지 체험들이 녹아 있는 이미지들이 무지개같이 영롱한 색채와 세련된 양식으로 펼쳐지고 있다. <자유> <자유의 땅> <새로움> <사랑과 자유> <평화로운 땅>과 같은 명제는 그가 새롭게 시작한 미국서의 삶의 활기가 극명히 반영된 것이라 할 만 하다. 그가 태어나 자란 조국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엄청난 시련과 불행이 겹쳐진 시대의 그것이었다면 미국서의 삶이 주는 평화와 여유로움이 그의 창작의 의욕을 새롭게 고양시킨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청소년기에 겪은 한국전쟁의 비극과 전후의 극심한 가난은 그 혼자만이 겪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예술가들이 겪은 고통은 일반인들이 겪은 것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로서 삶이란 굶주림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은 지금은 많은 예술가들이 추억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더구나 현대미술을 지향했던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일반인들의 몰이해와 기성세대의 질시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시대이고 선구적인 존재들이 겪는 고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60년대 한국의 젊은 의식의 예술가들이 겪은 고충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배륭의 작품이 미국 이주 이후 경쾌하고 밝아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란 신천지가 주는 자유와 희망이 그로 하여금 예술적 열망에 휩싸이게 했음을 짐작케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시기의 작품은 대단이 유기적인 포름과 기계적인 냉혹함, 그리고 현대적 낙천성이 융화된 풍부한 조형의 내면을 확립하고 있다. 한국서의 작품에 비하면 훨씬 유머가 풍부한 비판적인 요소가 등장하는가 하면 때로는 은유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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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에서 88년에 이르는 미국에서의 2기에 해당되는 시대는 어쩌면 배륭의 가장 회화적인 시대, 가장 자신에 넘치는 시대, 가정 순수한 조형의 탐미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가하면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들이 표상되었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소년 시대 서예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을 그 선친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의 누나(배정례)는 유명한 동양화가로서 그가 일찍이 동양예술에 대한 체험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음을 엿볼 수 있다. 80년에 들어오면서 보여준 수묵에 의한 일련의 섬의 연작과 점의 반복에 의한 전면화의 추상작품은 지금까지 배륭의 작품에선 엿 볼 수 없었던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조형의 결정체임이 분명하다. 수묵에 의한 중첩되는 삼각의 덩어리들은 한국의 남해안에 널려 있는 다도해의 섬들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겹겹이 쌓이는 한국의 산야의 풍경을 연상케도 한다. 그런가하면 산간에 흔히 만날 수 있는 한국의 전형적인 무덤들을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점에 의한 작품들은 보다 추상적이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연상시키지만 별들이라 해도 좋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는 순수한 점획의 나열이라고 해도 무관하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대체로 구체적인 대상을 매개로 한 것에 비하면 순수한 추상의 세계는 다소 낯설기도 하지만 모필로 먹을 묻혀 화선지 위에 찍어나가던 서예의 체험을 떠올리게 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내면 속의 풍경을 추억하듯 서서히 풀어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미국 생활이 무르익어갈 무렵이기도 한 시기에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들이 명멸한다는 것은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진지하게 추구하려는 노력의 결정이지 않나 생각된다.
88년부터 92년까지는 그의 만년에 해당된다. 많은 경우, 예술가들은 만년에 와서 자기 고백과 같은 형식의 주제들을 보여준다. 작품은 그 작가의 내면 풍경이란 말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배륭의 이 시기에 보여준 주제는 <명상>과 <마스터의 길>이다. 명상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회상의 형식이라면 마스터의 길은 명상의 구도자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길, 어쩌면 해탈의 길 또는 구원의 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의 두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내면 풍경은 다분히 종교적 정감이 강하게 반영되어 나온다.
<명상> 시리즈는 꿇어앉은 인간의 옆모습을 일정하게 구획된 칸 속에 나열하는 방식이다. 불화에서 보는 수많은 부처상의 나열 형식과 닮은 점이 있다. 정면을 향한 인간상도 있지만 대개가 실루엣이다. 넓은 법당 안에 꿇어앉은 승려들의 예불의 장면을 연상케도 한다. 때로 명상에 잠겨있는 구도자에 다가가는 말 탄 인물도 점경된다. 말을 탄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배를 탄 인물도 나타난다.
<마스터의 길>이 해탈, 구원의 길과 겹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어쩌면 작가는 명상(기도)을 통한 해탈, 또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자신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로서의 자기완성의 길이 종내는 구도를 통한 깨달음의 길과 통한다는 사실을 작가는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확인한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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