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 이규민의 근작에 대한 단상 -

1994년 파리 유네스코 회관에서의 개인전 이래 이규민의 조형적 관심은 생명 현상의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시, 그의 작품은 탄생의 메타포로 가득 찬 것이었으며 생명의 강인한 의지가 표상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건물 군, 흙을 비집고 나오는 작은 씨앗의 싹, 원통형, 삼각 피라밋 형의 구조물을 꿰뚫고 솟아난 나무, 나뭇가지들. 그 나무의 생성의 의지로 인해 기둥은 두 동강난 채 나무 가지에 떠받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거대한 지구 모양의 알을 깨고 나오는 식물의 놀라운 생명 현상은 그의 전체 작품을 관류하는 기본적인 요체임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극적이면서 동시에 신비한 내면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달팽이란 작은 생명체의 구현으로 귀결되고 있다.

달팽이란 존재는 극히 작은 미물로서 그의 말에 의하면 어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에겐 잘 보인다고 한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달팽이에 관심이 적다고나 할까. 달팽이로 표상되는 자연의 순수함을 아이들이 훨씬 잘 느낀다는 것이다. 왜 하필 달팽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동심의 근원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 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달팽이를 소재화 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단순한 이채로운 존재에 대한 관심을 떠나서 동심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작가의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동심의 세계를 통해 원초적인 자연, 건강한 원초적 삶을 추구하려는 작가의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달팽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의인화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처럼 달팽이도 무거운 자기 집을 일생 지고 다닌다. 인간의 삶에 비유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이 작은 생명체가 주는 교훈은 자연의 섭리요 자연의 리듬이다. 달팽이는 끈적끈적한 자국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달팽이에게 시간이란 언제나 머물러 있는 시간, 정지된 시간, 지워진 시간이다. 어디론가 가는데 가는 것 같지 않게 간다. 느리게 간다는 것은 느리게 산다는 것이고 여유롭게 산다는 것이며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느림의 미덕이 사라진 현대에 달팽이는 느림의 차원이 갖는 놀라운 생명의 리듬을 교화한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목표물로 향한다. 촉수는 무수한 정보망을 흡수하는 안테나이다.

이규민이 만드는 달팽이는 현실의 달팽이처럼 작은 몸체가 아니다. 아마도 수백, 수천의 크기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현실의 달팽이처럼 매끈하지만 현실의 달팽이처럼 연약한 생명체는 아니다. 달팽이는 무언가 말을 시작하려고 한다. 현대의 문명과 그 속에 사는 인간에게 무언가 절실한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그래서 그의 촉수는 거대한 지구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으며, 도르르 휘말리는 그의 집은 온통 파란 하늘과 그 속에 떠가는 흰 구름을 끌어들인다. 달팽이들은 하나하나 개별로서 나타나지만 그와 동시에 엄마와 아이, 형제자매, 부부 등의 가족으로 집단을 이룬다. 이들은 그 자신의 몸체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달팽이를 통해 상징되는 온갖 기의(記意)를 인간에게 전하려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읽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