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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호 - CYCL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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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의 상상력과 집단의식의 지평
신상호 작품전



정용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은 21세기 미디어 아트의 두 가지 커다란 미학적 테제이자 실천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생산되는 미디어 아트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비경험적인 것들을 환상(fantasy)을 기반으로 한 하나의 구조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미디어 아트는 회화나 조각과 같은 기존 시각예술의 존재론적인 기반이라고 말해지는 현실의 모방에 근거하는 재현(representation) 혹은 재현의 결과로서의 완성된 예술작품을 일컫는 환영(illusion)과 같은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상과 현실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미디어 아트의 속성에 관한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에 의해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에서 전개되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인간의 창조물과 관련된 철학적 사유에 관한 질문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신상호의 애니메이션작품 <Cycle of Life 3>은 실사이미지의 배경과 디지털로 만든 이미지의 형상으로 구성된다. 흑인, 백인,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3명의 인간 이미지는 어린아이에서 노인으로 변해가면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 단면들의 배경 이미지들과 대비되어 형태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관객에게 하나의 드라마처럼 보여진다. 특히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해 작가는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제중의 하나인 '삶의 순환' 이라는 주제를 도입한다─작가는 삶의 순환(the circle of life)을 삶의 주기(cycle of life)로 해석한다. 작가는 우리 인간 삶의 진행 혹은 순환과 환경 변화의 속도를 일차적인 차원에서 병렬시켜 놓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이차적인 주제인 삶의 무상함(vanitas)을 유추할 수 있다. 인간의 탄생과 소멸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이 커다란 변화 없이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기능한다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이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이 근대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정보적인 세계관으로 전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이클이라는 제목은 지속적으로 어떤 인식론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그 인식론적인 사유의 근거는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구조와 경향성의 변화, 미시적으로는 개인적 의식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20세기 후반에 두드러지는 거시적인 사회적 변화는 정보와 시스템에 대한 인간공학적인 접근이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근대 자연과학의 소위 "지식 중심적" 방향에서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진화론적 당위론이 구조적인 개방성으로의 변화 방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서 정보의 개방성은 정보의 민주성이라는 더 넓은 차원의 집단의식의 지평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역동성 혹은 기능적인 탁월성과 같은 개념들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무한히 넓어진 소우주적 개념인 가상현실과 상호작용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우리가 물리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의미를 물리적 성격으로 구조화 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식 변화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물리적 구조를 벗어나는 탈정치적 집단의식의 확장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억압적인 구조가 아닌 자유로운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결합이라든지 혹은 패러디의 패러디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을 설명하는 전략적 차원에서의 미학적 개념들의 확장성과 관련될 수 있는 것이다.
신상호는 이런 사회적인 변화에 대해서 오히려 단순히 기존의 예술개념들을 해체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개념에 미학적인 질문을 한다. 그래서 그에게 센서를 통해 움직임을 촉발시키는 기계적 장치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상호작용성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가능성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Cycle of Life 4>에서 작가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용품의 이미지를 도시나 유적지 혹은 한국 농촌의 초가집을 배경으로 3면화(triptych)처럼 3개의 사물을 제시한다. 3개의 사물로 제시된 형상들은 <Cycle of Life 3>에서처럼 배경 위에서 지속적인 떨림을 가지고 관객의 시각을 자극한다. 우리의 시각은 대상의 밀도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대상들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이나 밀도는 작가의 의도, 즉 '나를 좀 봐주세요'같은 의도를 반영할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임에 의해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 같은 작가의 요구에 스스로의 감각적 직관을 통해 자신의 어떤 기억이나 경험과 연결시키게 된다. 이것은 미디어 아트의 속성상 촉각적 경험이 부재하면서도 의미를 성립시키게 되는 해석의 행위와 유사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적인 순환을 통해 삶의 경험으로 의식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상호의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미디어 아트에서 우리 실재의 세계에 존재하는 경험의 양적 확장과 의미론적인 차원에서의 질적 깊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과정 속에서의 순간적인 깨달음(종교적인 특성이기도 하다)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상호의 작품은 애매한 경계가 존재한다. 모더니즘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으로서의 개인적인 의식의 세계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방과 비질서의 세계, 그리고 속도라는 미디어 아트의 기술적 인식론이 공존한다. 즉 이 세 가지 특성들 중 어느 하나가 이미지의 속성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특성들이 동시에 관객의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의 관점에서는 이 이미지들이 애매하게 보일 수 있다. 정리하면 우선 형식적으로 삶의 특성들에 대한 의미를 이미지의 형식이나 이미지의 아이콘을 통해 제시한다. 그런데 제시하는 형식이 애니메이션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험의 속성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관객과 작가의 교감(consensus)에 의한 의식적인 활동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오히려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의 효과에 좀 더 만족스럽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 아트는 실제적인 경험의 부재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물리적인 세계관에 의한 의미생성의 기능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요구된다. 그리고 더더욱 그런 것들이 인간의 실제적인 활동과 관련될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그 상황은 좀 더 복합적인 사유의 기능 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2006년 1월 29일에 돌아가신 백남준 선생은 기술을 사용해 제작되는 예술이 인간의 뇌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에 유비적(analogy)으로 비교했다. 이것은 사유의 과정 안에서 우리 인간이 지능이 아닌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삶의 현상들과의 유사성을 지닌 것에 천착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다른 관점에서의 설득력 있는 많은 설명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활동했던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생성과 그리고 그들 그룹 이름처럼 현상적인 흐름 자체를 작품으로 포착하고자 노력했던 것들이 미디어 아트와의 친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술적인 아이콘의 생성이나 삶의 다양한 형식들에 대한 단상들의 디지털적인 결합과 같은 기술적인 노력과는 별개로, 신상호의 작품에서 관객은 문화적인 차원의 예술적 속성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왜 그가 제시하는 미술의 역사에서의 일반적인 주제가 21세기 미디어 아트에서 미학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미술에서도 '삶의 순환'이라는 주제는 행동과 감각이 지배하는 20~30대 질풍노도 시기의 주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연민이 이 세계의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의식과 만나게 될 때 드러나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탄생에 대한 의식보다는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그 주제를 그의 작품의 본질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지배력이 무의식적 보편성으로 순화되어 확장될 때 드러나게 되는 가치들에 대한 세계 속의 자아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흔히 본질이 현상에 앞선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자아의 개체적인 이상이나 희망이 강력하게 주장되는 실존주의적인 정의 속에서나 가능한 의미론적 정당성을 획득할 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 아트에서 현상적인 흐름처럼 제시되는 동영상 이미지들을 자의식적이지 않은 감각의 총체성 속에서 바라보게 되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이 직접적인 움직임을 원인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상호작용성'의 부재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이미 미디어 아트 작품을 통해 파악되는 상호작용성은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이라는 다른 영역에서의 접근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상호의 <Cycle of Life> 시리즈 작품이 이런 상호작용성의 전범(paradigm)제시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미디어 아트에 대한 인식에서 볼 때 관객들은 작가의 예술적 주장들이 그동안 미학적인 차원으로 치부되어 왔던 개념과 의식 세계의 경계를 부단히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결론적으로 신상호에게 예술은 아이콘의 생성이나 주제의 현시가 아니라 삶의 가치들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되었고, 아직도 그런 문제들에 대한 탐구가 비결정론적 삶의 프로젝트의 성격을 가지고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작품의 특성들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예술을 삶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근원적 욕망 속에 내재된 상상력의 해소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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