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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작은 패널은 최소한의 이미지이다. 그의 조형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단위. 이 기본단위를 연결하여 하나의 기하학적인 구성체를 만드는 작업. 작은 패널을 들쑥날쑥 교차시키는가 하면, 장방형 패널을 연결하는 경우 다양한 구성적인 화면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자연 및 생명의 원초성에 대한 조형적인 사유 - 안정숙의 작품세계 -
자연은 조형의 원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조형언어는 자연에의 변형이거나 왜곡 또는 재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조형충동을 자극하는 상상력이란 지적인 통찰의 결과물이며, 지적인 통찰은 경험과 지식에 의존한다. 경험과 지식은 자연에 대한 친숙 및 이해 위에서 성립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형태의 가치체계는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 및 논리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조형언어가 설령 추상일지라도 그 이미지를 추이해보면 종국에는 자연에 이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정숙의 작업 역시 자연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차용이 아니라, 재해석이라고 해야 옳은지 모른다. 작품 속에서 읽혀지는 이미지는 장미와 나뭇잎 그리고 풀잎 따위의 자연을 상징하는 것뿐이다. 이들 이미지는 식물로 분류될 뿐더러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의 작업에서 이들 자연물의 이미지는 평면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실제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는 재현형식의 그림이 아니다. 형태를 거의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음에도 붓과 물감에 의한 묘사방식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 이미지가 양각 또는 음각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기에 그렇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핵심은 전통적인 회화의 묘사에 관한 문제가 아닌, 방법론의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작업의 결과물에 대한 시각적인 이미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미지에 도달하는 과정, 즉 어떤 방법으로 제작되고 있는가를 중시한다. 반면에 전통적인 묘사기법과 다른 이미지 및 재료를 이용하는 현대회화는 새로운 해석 및 표현방법을 요구하고 작가는 거기에 고통스럽게 응답한다. 여기에서 작가는 재료는 물론이려니와 표현기법과 관련해 새로운 모색을 거듭하게 된다.
그 새로운 모색의 과정에서는 현대적인 미학 및 조형개념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상징, 비유, 풍자, 우의, 은유, 암시, 해학 따위의 다양한 의미내용을 함유하게 된다.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사회생활 및 그에 따른 가치체계는 물론이려니와 심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섬세한 문제들까지 작품 속에 용해되고 있는 것이다. 방법이 새로우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즉, 현대회화에서 방법론이야말로 창작의 절대조건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그 방법론의 개별성을 확보하는데 있다. 새로운 방법에 의해 탐색되는 이미지는 기존의 유채물감을 사용해 묘사하는 일루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명암이나 원근 그리고 채색으로 실제와 같게 묘사하는 그림의 개념을 일시에 부정함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사실성이 파괴된다. 달리 말하면 묘사를 뒤덮는 방식이다. 사실적인 형태가 있음에도 그로부터 현실적인 개념의 사실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실성이 소거된 창백한 존재성만이 남게 된다. 그 존재성은 그가 강구해낸 새로운 개념의 사실성이다. 실상과의 시각적인 이해를 차단하는 초감각의 세계에서 만나는 리얼리티인 까닭이다.
그가 강구해낸 표현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나뭇잎이나 실 따위의 실재하는 물질을 활용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장미꽃의 이미지를 양각 및 음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먼저 나뭇잎이나 풀잎을 평평한 판 위에 놓고 석고와 유사한 혼합재료를 이용하여 도자기의 인화형식으로 찍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은 음각으로 일종의 거푸집이 되어 복수의 화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을 가져와 그 본래적인 형태에 변화를 가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만을 바꾼다. 더구나 자연의 존재방식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본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제시된다. 자연물의 일부였던 나뭇잎이나 풀잎이 그 모양을 유지한 채, 단색조의 색채이미지로 바뀜과 동시에 임의적인 구성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조형적인 질서를 갖게 된다.
그의 작업에서 자연물로서의 나뭇잎이나 풀잎의 고유의 존재성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잎맥이나 줄기 형태로 남아 있되, 이미 고유의 물질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림의 소재로서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 속에 모양을 드러내는 이들 소재는 현실적인 이미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장미꽃이나 나뭇잎 또는 풀잎의 이미지는 그만의 조형적인 해석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허상일 따름이다. 그러나 비록 허상일지언정 자연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리듬은 그대로 전이된다. 화판에 찍힌 존재물의 이미지에서 눈부신 생명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는 의식 속에서 환기되는 생명의 리듬을 의미한다. 이 리듬이야말로 우리의 미의식 및 감각기관을 명료하게 밝히는 자연의 리얼리티이다.
실을 이용하거나 실과 같은 형태의 선조로 장미꽃의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은 보다 더 구체적인 입체감을 드러낸다. 즉 돋을새김과 같은 이미지로 장미꽃 이파리의 윤곽선을 만들어가면서 평면(화판) 위에 돌출시키는 형태가 된다. 여기에서 실은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그 고유의 형태는 물감에 의해 은폐된다. 고유의 물질성은 사라진 채 실의 이미지만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물감작업에서 실과 같은 형태의 선조로 이루어지는 장미꽃의 이미지는 나뭇잎이나 풀잎과 달리 보다 복잡하고 심오한 삼차원의 구조를 가진다.
그 심원한 장미의 이미지는 반복되는 행위의 연속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용돌이 구조의 선조가 반복되면서 신체적인 리듬이 개입된다. 물론 그 신체적인 리듬을 이끌어가는 것은 행위와 더불어 집중되는 정신성이다. 장미꽃의 경우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드로잉의 방법으로 선을 그어 음각 형태의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여기에서 장미꽃의 이미지는 실제와는 다른 소용돌이 모양의 이미지가 된다. 장미꽃의 형태와 비슷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소용돌이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패널의 바탕에 악보를 붙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음악을 만들어낸 음표를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음악적인 리듬을 기대하는 것일까. 음악은 비록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추상적인 언어에 불과하나 단색조의 화면에 새로운 형태의 풍부한 감성적인 표정을 허용한다. 가야금 산조라는 고유의 전통음악에 깃들이는 그 유연한 운율을 연상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무라는 공명통을 통해 울리는 음은 자연성과 연관성을 가진다. 바람의 흐름처럼 실재하지만 눈으로 인지되지 않는 자연성, 즉 생명의 파장과 같은 울림이나 흐름 장미꽃의 이미지 속에 깃들이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를 주도하는 수단은 선조이다. 선조는 연필 드로잉 작업에서 그 실체를 명백히 드러낸다. 연필로 이루어지는 드로잉은 장미꽃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물의 소용돌이 이미지에까지 이른다. 단색의 연필이 보여주는 선조의 진행과정은 혼합재료를 이용한 양각 및 음각 작업과는 달리 섬세한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그 선조는 생명의 리듬을 동반하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명민한 미적 감수성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혼합재료를 이용하는 작업은 연필 드로잉과는 다른 형태의 선조, 즉 입체적인 이미지를 지향하는 선이다. 그 선은 착시현상을 유도하는 일루전과는 엄연히 다른 성질을 가진다. 입체적인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명백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존재감은 허상이 아니라 실제성을 가진다. 오브제라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질 또는 그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실제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선의 실제성은 개념적인 성격이 짙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정신성이 개입되면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선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는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작은 패널은 최소한의 이미지에 국한한다. 그의 조형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단위인 것이다. 이 기본단위를 연결하여 하나의 기하학적인 구성체를 만드는 것으로써 작업이 완성된다. 이때 작은 패널을 들쑥날쑥 교차시키는가 하면, 장방형 패널을 연결하는 경우 다양한 구성적인 화면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음각과 양각을 교차시킴으로써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동일한 크기의 작은 패널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이는 것은 리듬 및 질서와 관계가 있다. 어쩌면 무의미한 패널의 나열처럼 보이는, 반복되는 이미지에서 유기적인 연속성이 생기고 그 연속성은 리듬과 울림을 촉발한다. 또한 동일한 크기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군집의 질서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의해 지지된다. 이는 미의식이 주도하는 이지적인 사고의 산물임을 천명하는 일이다.
현상계의 물체 혹은 물질의 가치를 부정하는 듯 단색조로 제한하는 것은 시각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관념의 세계와의 조우를 기대하는 일이다. 어쩌면 유사한 이미지, 그리고 동일한 색상 및 크기의 패널을 연속적으로 붙여나가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단조롭고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위의 연속성 이면에는 심미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패널이 연결감을 가질 때 그처럼 단순한 최소 단위의 구조물은 전혀 새로운 조형개념으로 탈바꿈한다. 나열한다는 것은 새로운 조형적인 질서 및 리듬을 촉발하기에 그렇다.
최근 작업 가운데 장방형의 검은색(회색에 가까운) 패널의 작품은 기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기와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가치와의 연계성을 의식한 작업이다. 연속적으로 구성되는 기와지붕의 그 유기적인 리듬을 패널의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패널의 외곽으로 물감이 밀려나면서 형성되는 자연스러운 표정은 기하학적인 패널이 주는 경직성 및 단조로움 거뜬히 상쇄시킨다. 이는 감성적인 표현의 하나인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장미꽃이나 나뭇잎 그리고 풀잎의 이미지는 내의적인 상징성을 은유한다. 장미꽃은 여성의 성기 또는 물의 소용돌이를 연상케 된다. 이는 생명의 원초성에 대한 환기를 유인한다. 나뭇잎이나 풀잎 또한 자연미 또는 자연성에 대한 호응이다. 생명체의 상징인 자연물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그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자연과의 아름다운 유대 및 결속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단지 기술적이거나 기교적인 문제를 넘어서 자연과 생명이라는 거대한 제재를 작품 속에 용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 신항섭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