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예술가들이 다뤄온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소재는 단연 인체일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끄집어낼 더 이상의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을까 싶은데도, 작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인체를 소재로써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인체를 통해 당대적인 특수성과 더불어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작용한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자기반성적인 경향성과 함께 자기재현적인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기를 반성한다는 것 즉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그렇게 객관화되고 재현된 자기에 대해 진정한 자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궁극적으로 나 혹은 나라는 실체는 결정적인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이처럼 나를 객관화하고 재현한다는 프로젝트는 정작 나와 일치하는 어떤 지점(동일성의 논리)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와 차이 나는 다른 어떤 지점(비동일성의 논리 즉 나라는 실체와 나로 명명되는 지점들 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론)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영원은 인체를 소재로 취하면서도 정작 인체를 재현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인체를 재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조각이 보여주는 사실적인 묘사와 손에 잡힐 듯한 실체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도대체 그 무언가를 재현하기나 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그의 조각에서의 사실적인 형태는 단지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무형의 어떤 지점으로 이끌기 위한 구실이나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체 자체가 아닌 인체가 놓여진 풍경을 연출하고, 이렇게 연출된 인체풍경이 불러일으킬 어떤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최종적으로 재구성될 미지의 그 상황은 작가의 조각이 열린 의미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다양한 해석 가능성에 대해 열려져 있으며), 따라서 인체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나 소산이 아닌 의미론적이고 추상적인 기호로써 제안된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의 작업이 때로 설치의 경향성을 띠거나, 나아가 연극적인 상황마저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나의 또 다른 분신과 대면하고 있는 듯한 상황을 통해 작가는 내가 나를 본다는 것, 그리고 내가 나를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있어서 인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의미론적이고 추상적인 기표들이 표시된 일종의 지도(인체지도)이며, 심리가 투사된 흔적(심리지도)이며, 욕망이 전개되는 장(욕망지도)이다. 결국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재현하는 것)은 이런 기표들이 작용하는 방식을 밝히고, 심리와 욕망이 전개되는 무형의 장(혹은 프로세스)을 가시화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나의 실체라고 믿고 있는 선입견)와 나로서 제안된 실체(재현된 나)를 비교하는 반복과정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이 비교과정은 필연적으로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나에 대한 인식론이 곧 차이에 대한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인체를 소재로 한 김영원의 조각은 단적으로 말해 나라고 일컬을 만한 실체가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다양한 유형으로 전개, 진화, 심화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때때로 사회적 주체(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이와 관련해서 알튀세는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여 잠재적인 주체를 진정한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한다)와 만나지기도 하고, 심리적 주체(혹은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체로서, 이는 특히 실존주의의 부조리의식과 정신분석학의 자기소외 내지는 자기분열 양상과 관련이 깊다)와 겹치기도 한다.
지금까지 작가가 자신의 조각에 부여한 주제들이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경우로는 중력 무중력 시리즈와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그의 다양한 작업들을 아우르는 상위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들은 작가의 작업을 시기적으로 구분하게 해주며, 동시에 그 이면에서는 서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해서, 작가의 근작을 언급하기에 앞서 중력 무중력 시리즈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중력 무중력 시리즈
중력 무중력 개념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허공중에 부유하는 사람들에서 사각의 틀에 갇힌 초상, 그리고 표면에 난 구멍으로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소위 통구조로 된 인체로 진화해왔다. 중력 무중력 개념은 무엇보다도 역학 개념이다. 즉 나와 외계가 만나게 되는 물리적 현상을 통해 나와 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인 만큼 처음에 이 역학은 물리적인 현상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철봉대를 맞잡은 손에 철봉대만큼의 빈 홈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로써 흡사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듯한 몸이 헛손질로 허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나와 외계와의 관계란 물리적인 현상이 내 몸에 남긴 흔적과 그 흔적이 환기시켜주는 기억으로써 현상한다.
그리고 그 역학이 점차 물리적인 차원으로부터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진화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그 표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겉과 안이 서로 통하는 일련의 인체조각들에서 그 뚜렷한 실체를 획득하고 있다. 겉과 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과 없음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 작업들은 이후의 작가의 사유가 그림자의 그림자로 나타난 보다 심화된 시리즈 작업으로 진화할 수 있게끔 이끌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 듯 보인다.
여기서 그림자의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실재와 이미지, 실재와 표상과의 관계를 암시하며, 더욱이 그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를 인식시켜주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나, 자아, 주체, 에고에 대한 어떤 결정적인 실체가 있는가, 혹은 나란 존재는 그 무엇인가로 꽉 차 있는 총체인가 아니면 텅 빈 공이고 허인가, 이런 물음과 관련한 자의식이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자의식이 이미 이 인체작업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력과 무중력 시리즈는 역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서 그 자체 일종의 시대적인 메타포 즉 시대정신을 반영한 상징적인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여타의 작업들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경우로는 엉덩이에 끼인 채 입에 야구공을 물고 있는 사람의 초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잠재적으로 혁명의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사회적 리비도를 성적 리비도(섹스공화국)와 놀이 리비도(스포츠공화국)로 전이시키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각의 틀에 갇힌 초상에서 사각형 틀은 말할 것도 없이 개별주체를 틀화하려는 제도의 기획과 관성을 암시한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중력을 개별주체를 억압하는 제도의 관성으로서, 그리고 무중력을 이에 맞서는 개별주체의 일탈성의 계기로서 본 것이다. 사실 예술이야말로 이런 일탈성의 계기가 극대화되는 장일 것이다.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
옛 이야기 중에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사람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혼일 것이다. 이는 악마가 그림자를 가지고 그와 삶을 흥정하는 장면에서 극명해진다.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예로는, 모델이 들고 있는 향수를 그의 그림자가 탈취하는 장면을 재현한 유명향수회사 광고가 있다. 여기서 자아는 의식적 자기와 무의식적 자기로 분리되고, 그 향수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의식적 자기와 무의식적 자기가 서로 다투고 대립할 만큼이나 향수의 뛰어난 향기를 광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이미지나 이야기는 그림자와 관련해서 상당한 의미를 시사해준다. 그러니까 예로부터 그림자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영혼, 정신, 호흡, 숨결, 아니마 등 비가시적 실체의 메타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또 다른 자기 즉 무의식적 자기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졌으며, 그 무의식적 자기는 곧잘 의식적 자기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실재와 그림자, 실재와 표상, 실재와 허상간의 경계가 알려진 바처럼 뚜렷하지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에의 인식은 실상 후기 근대적 자의식과 통한다. 이를테면 자기분열현상은 정신분석학의 핵심논리이며, 또한 실재와 표상간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후기구조주의의 소위 탈경계의 논리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김영원의 그림자의 그림자로 명명된 시리즈 작업에서 인체는 절편처럼 나눠져 있다. 그리고 그 안쪽 면은 편평하게, 바깥쪽 면은 형상으로 처리돼 있다. 이때 형상은 흡사 동전에 새겨진 초상처럼 최소한의 윤곽과 실루엣만으로 이루어진 저부조 형식으로서, 실재감과 비실재감을 동시에 실현한 듯한 독특한 형상으로 제안된다. 아마도 그림자의 그림자가 암시하는 비실재감의 사유와 이에 따른 관념적인 성질을 강조하고자 고안된 의도적인 형상일 것이다. 여하튼 작가는 이렇게 그 실체감이 희박한 인체의 절편(단면)을 서로 마주보게 하거나, 같은 곳을 향하게 하거나, 한 몸 안에서 서로 엇갈리게 재배치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낸다. 여기서 절편과 절편은 원래 하나의 몸에서 분리돼 나온 것이란 점에서 주체와 그 주체로부터 분리된 그림자, 분신, 아바타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효과적으로 암시해준다. 그러면서도 단면과 단면이 배열되고 배치되는 양상에 따라서 어떤 것이 주체이고 그림자인지, 어떤 것이 모본(母本)이고 사본(寫本)인지에 대한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런가하면 단면과 단면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조각에서는 주체와 그림자(또 다른 주체?)의 시선이 가 닿아 있을 법한 형상의 안쪽 면은 그저 밋밋한 평면일 뿐 아무 것도 없다. 흔히 인체의 안쪽 어딘가에 마음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식으로든 작가에 의해 그 마음이 형상화돼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여지없이 허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없는 평면은 마음이 맞다. 이를테면 이를 대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려낼 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그 이미지로 채워질 잠재적인 공간이며, 따라서 비어 있으면서 채워져 있는 허(虛)와 공(空)이 가시화된 형상인 것이다.
이외에도 그림자의 그림자는 장 보드리야르의 이미지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그림자의 그림자는 그 자체 한정적이기보다는 사실상 무한정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그림자를 의미한다. 처음에 그림자는 주체와의 유사성을 유지했지만, 주체로부터 멀어진 그림자의 그림자는 그 유사성을 상실하게 된다(이를 미셀 푸코는 유사와 구별해서 상사라고 일컫는다). 비교할 수 있는 주체를 결여한 그림자, 그림자가 낳은 그림자, 마침내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기에 이른 그림자, 비교해 볼 수 있는 주체가 없으므로 스스로 주체가 된 그림자에서 재현의 논리는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재현된 이미지(주체를 재현하고 있는 그림자)란 실재와의 닮은꼴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이처럼 비교해볼 수 있는 실재를 결여한 이미지(그림자의 그림자)는 재현의 논리를 넘어 순수한 이미지 놀이의 단계로 진입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은 단지 마음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처럼 그림자의 그림자는 감각적 현상에 구속받지 않는, 실재와의 닮은꼴에 연연해하지 않는, 어떤 절대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 보인다. 작가의 근작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자기)반복과 (자기)분열과 (자기)복제의 양상이나, 더욱이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원색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그 희박한 실체(혹은 실체감)를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으로 읽힌다. 그러니까 가시적인 구조와 색채 너머의 비가시적 실체를 보라는, 그리고 가시적인 인체란 결국 마음이 그려낸 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