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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삼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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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 김춘수, 정종미, 공성훈 3인의 개성이 아주 강한 작가들의 작품들로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아트포럼뉴게이트 2008 3인전
만추의 삼중주-김춘수, 정종미, 공성훈

김정락 |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회화의 다양한 접면(接面)에 대하여: 하는 것(to do), 만지는 것(to touch) 그리고 보는 것(to see)”


1. to do
김춘수의 회화는 ‘단순한’ 화면을 보여준다. 그 단순함은 그의 작법이 추상, 미니멀리즘 혹은 액션페인팅과 같은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했던 환원주의적 표현방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사용하는 색과 그 색을 화면에 얹는 실제적인 형식에 근거한다. 작가는 푸른색만을 사용한다. 1990년대 초부터, 그러니까 작가가 <수상한 혀>라는 제목으로 그리는 행위를 고스란히 화면에 남겨놓는 작업을 수행할 때부터 자신의 고유색으로 그리고 특유의 의미론적 조형언어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흰색 바탕에 푸른색의 그리기 행위가 만들어낸 회화적 결과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리기를 ‘신체적 행위’의 차원으로 설정해 놓고, 그것을 회화적 결과로 남긴 것은 작가만은 아니다. 우리는 쉽게 잭슨 폴록을 떠올릴 수 있으며, 역사를 더 추적해 올라가면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티치아노의 파스티치오(pasticcio)가 그 계보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면에 대한 직접적인 행위가 이전에는 단순한 효과에 그쳤다면, 폴록은 그것을 작풍 혹은 스타일로 삼았다. 김춘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작품과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외연이나 목적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회화 행위로서 먼저 그리기의 신체적 투여를 생각하고, 그것이 파생시키는 다양한 정서적 효과에 대해서도 고민한 흔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회화는 작가의 행위뿐만 아니라, 행위를 불러일으켰던, 작업의 실시간적인 감성이나 의식까지 남겨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한 행위의 흔적으로만 작품을 읽었다면, 감상은 미완으로 남는다. 오히려 미리 언급한 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관조적 시선을 보내야 할 것들을 위한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작가가 붙인 제명(題名)은 무엇보다 회화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전 다른 추상회화들처럼 시리얼로 처리하거나, 관념적인 복선을 깔지 않는다. 아니 어떤 구상회화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 형상적 목표에 대해 말한다. 1990년대 초부터 나온 <수상한 혀>에서부터 작금의 연작까지 제목은 작가의 발언욕구와 의미를 명료하게 반영해주고 있으며, 언급한 것처럼 뚜렷한 목적지향을 보여준다.

그 맥락에 비추어 작품들은 단순한 형상성이 무한한 의미지층으로 쌓여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순한 색명으로서 울트라마린을 이해했다면, 인식의 첫 관문을 연 것이고, 요동치는 색채의 흐름과 운동을 보고서 바다까지 연상했다면 두 번째 사유과정을 지나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상사유의 동선이 바다를 떠나 무한의 공간과 그 속을 채우고 있는 푸른 기운에 다다르고, 또한 이것이 작가의 조형의지가 보여주려는 초월적 시각현상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 작품은 비로소 숭고의 지평을 열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명이 이러한 목적론적 의미만을 내포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제목이 작가가 유일하게 사용한 색이라는 사고의 원점으로 되돌아오면, 사유의 지도는 다시 그려질 수 있다. 이렇듯 김춘수의 파란 화면은, 이전 다니엘 뷔랭(Daniel Buren)이 단순히 반복되는 수직선 하나로 여러 정황(context)과 환경 속에 다양하게 재해석될 수 있는 형상작업을 유도해 낸 것에 비교될 수 있다. 하지만 뷔랭이 외부와 관련해 형상의 다양성을 찾았다면, 김춘수는 관객 내면에서 생성되는 사유의 다양성을 가져다주는 그런 이미지를 생산해 냈다.




2. to touch
정종미 작가의 역사적 기억은 사뭇 서정적이다. 그리고 그 서정성은 꼼꼼히 엮은 노리개처럼 혹은 조용한 밤을 바느질로 마름한 보자기처럼 정갈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여성적이다. 여류작가의 여성성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작품이 형성하는 정조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적이다. 이것은 작가가 여성을 그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요즘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역사적 여성, 보다 정확히는 여성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논개>, <명성왕후>와 같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인물에서 익명으로 과거를 살았던 많은 여성들까지 그녀는 여성 속에 간직된 감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읽어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작품의 여성성을 말한다면 너무나 편협한 것이 되고 만다. 작가의 여성성은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재료와 그것을 다루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동양화가로서 종이를 주재료로 삼아 작업한다. 붓을 들어 그리는 대신에 작가는 그것을 염료를 비롯한 젖어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색재로 물들인다. 마치 봄날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의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듯이. 작가는 여러 번에 걸쳐 종이가 여성에 가까운 속성을 가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대하는 작가의 친근함이나 주관성이 여성성으로 중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종이는 색에 덮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머금는다. 따라서 종이의 특성을 순한 여성이 세상을 보듬는 것으로 연상할 수 있다. 또한 긴 세월을 말없이 그리고 튼튼히 버티어 나간다. 이것 또한 여성 특유의 인내와 동일시 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은 결과 부드러운 질감이나 은은한 광택 그리고 냄새까지, 종이는 여성에 비유될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그것도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서 그렇다. 그렇다고 작가의 작업이 감성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색 재료에 대한 과학적인 내용을 집필했을 정도로 집요하고, 또한 그만큼의 지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종미 작가에게 색은 무엇보다 물질과 정서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런 탓인지 작가가 생각하는 색은 때론 치밀한 과학적 분석을 요구하는 그런 대상이기도 하고, 때론 명주 천에 베어 나오는 슬픔과도 같다. 은은한 배색 위에 올려놓은 여인들의 형상은 작가가 바라본 역사와 현재 속에 살아있는 여성성을 보여준다. 작가의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이 여성성은 그가 만지는 재료에서도 묻어난다. 다양한 한지나 천을 사용하는 것에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재료가 내용과 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즉 단순한 시각적 매체 따위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과 그 자체가 여성성을 표현하는 조형언어라는 점에서 괄호를 칠 대상이 된다. <종이부인>이니, <지도부인>과 같은 제목들이 작품에 부기되어있으며, 보다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제목을 기대했던 필자의 기대에는 비껴갔지만,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이제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종미의 작품이 보여주는 여성성은 하지만 단순히 순종적이거나, 남성에 의해 설정된 것이 아니다. 현대 여성의 소외된 모습에서 혹은 조선조 여인의 강직한 시선에서 우리는 호젓하면서도 서늘한 여성의 독특한 미학을 만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작품은 손을 뻗어 주름진 화면의 살결을 만지고 싶도록 관객을 매혹한다. 정종미의 회화는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정하게 지나친 그녀의 옷자락에 손가락이라도 스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대상들이다.





3. to see
ISO의 감도를 극대화해서 잡아낸 사진처럼 공성훈 그림들은 거부감이 들 정도로 대비의 강도가 심하고 또한 쓸데없이 선명하다. 이 선명함은 작가의 사실적 재현능력에 기인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실주의 작가인 최진욱 또한 그것을 인정할 정도이다. 하지만 현대의 구상회화가 그려진 내용보다는 오히려 보는 시각의 문제나 재현의 방법론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작가는 그려질 내용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내용의 상황과 시각적 충격을 높이는 연출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그린 풍경은, 제목인 <근린자연>이 시사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작위적이다. 작위적이라 함은 그 풍경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우선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공적이란 말이고, 그 인공적 성격은 재현의 대상에서뿐만 아니라, 그린 주체가 만들어낸 상황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근린자연>이란 신조어를 제목으로 걸고 있는 나타난 '풍경화'들은 작가가 살고 있는 일산 그리고 더 넓게는 한국 여기저기의 '현대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낯익은 풍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름답거나 고전적인 시각적 미감에 다가오지는 않는다. 먼저 시각을 자극하는 것은 그림같이 조성된 풍경의 인공성이다. 재개발이 판을 치고, 연중 공사판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이 끊임없이 만들어놓은 주변 환경은 작가가 비아냥거리듯이 근린지역일 뿐이다. 여러 그럴싸하고 고급스러운 이름으로 지어지는 아파트들과 웰빙으로 포장된 이기주의적 자연관 그리고 그런 주류에서 비껴난, 아니 밀려난 사람과 풍경은 작가의 포커스가 향한 곳이고, 어쩌면 이것은 이전의 민중미술이 끊임없이 재기했던 문제와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작가는, (hyper에 가까운) 사실성을 담보로 하고, 그 근린풍경에서 흘러나오는 감수성의 호르몬에 우리를 담갔다 뺀다. 또한 이렇게 인공적으로 조성된 풍경이 파생시키는 멜랑콜리는 현대도시인으로서 우리의 감성상태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하지만 공성훈의 이 피곤한 풍경들의 메시지는 어쩐지 폭력적이고 (반)정치적으로 감상의 방점을 찍게 만든다.

공성훈의 풍경화가 주는 가장 뚜렷한 정서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불안이다. 도시의 내외 그리고 근린으로 가치 절하된 자연은 그곳에 사는 작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와 고독, 히스테리 따위 같은 지각의 바닥에 가라 앉아있는, 그렇지만 언젠가 병리학적으로 혹은 범죄사회학적으로 더 나아가 정치학적으로 나타날 여러 징후들을 미리 그리고 작가 특유의 냉소주의적 표현으로 재현되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집요하게 엄습하는, 하지만 그 실체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불안감을 얻게 된다. 에둘러 그의 회화를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요즘에 회자되는 하이퍼 리얼리즘이 아니라 비판적 리얼리즘(critical realism)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달리 말해 그의 시각이 꽤나 불편하다는 것을 약간 폼 나게 해본 것이다.





아트포럼 뉴게이트 신사동 이전기념전 II
'만추의 삼중주(A Trio in Late Autumn)' - 김춘수, 정종미, 공성훈


일시: 2008년 11월 11일(화)-2008년 12월 6일(토)
장소: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643-20 프라임빌딩 1층 아트포럼 뉴게이트 전시장
전시오픈: 2008년 11월 11일(화) 5시-7시
전시시간: 월-토, 11시-6시30분, 금요일 7시까지, 토요일5시까지,
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미리전화주시면 관람가능)
전화: 02-517-9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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