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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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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전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08-11-01 ~ 2008-12-28

  • 참여작가

    김영경 외,우상호

  • 전시 장소

    충무갤러리

  • 문의처

    02-2230-6600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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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개요

  1) 전 시 명 : 2008충무갤러리기획공모전-동대문운동장

  2) 전시기간 : 2008. 11. 1 ~ 12. 28 (58일간)

  3) 전시작가 : 수상작가 4명 1팀

     - 대    상 : 우상호(회화)

     - 우수상 : 김문경(사진) 김영경(사진) 차지량(설치) 김∙강∙박씨(3명/회화)

  4) 전시장소 : 충무갤러리

  ※ 심사위원 

     - 1차심사: 이재언(미술평론가, <선(選)조형연구소> 아트디렉터), 

                김준기(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2차심사: 박영택(경기대교수․미술평론가), 전영백(홍익대교수․미술평론가) 


2. 전시내용 및 기획의도


∙ 충무갤러리기획공모“동대문운동장”

 충무갤러리는 ‘동대문운동장’을 주제로 2008충무갤러리기획공모를 실시하였다. 1926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경기장인 동대문운동장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관련된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었다. 식민지배와 분단의 참혹한 현실을 거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국민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했으며, ‘고교야구’의 스타를 만들어내고, ‘프로야구’의 첫걸음이 시작된 곳이다. 세월이 흘러도 추억과 역사적 사건들은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충무갤러리는 도시를 기록하는 조형예술가들을 통해 동대문운동장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찾고자 했다.


∙ 작가선정

 2007년 12월 공모공지 이후, 2008년 6월 전시계획서와 포트폴리오를 접수하였다. 심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심사가 이루어졌다. 

 1차 포트폴리오 심사와, 2차 프리젠테이션 공개심사를 거쳐 대상 1명(우상호/46), 우수상 3명 1팀(김문경/31, 김영경/37, 차지량/25, 강천식/37․김현승/28․박종호/30(팀명 김․강․박씨))를 선정했다. 

 대상수상자 우상호는 빛과 어두움의 강한 대비로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명암을 두드러지게 담아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기를 영화포스터와 간판으로 패러디 한 김․강․박씨, 다양한 사진 테크닉으로 동대문운동장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김영경, ‘동대문운동장 철거’에 따른 사회적 의미와 파급효과를 설치작품으로 표현한 차지량, 동대문운동장과 인근 상업지구에서 수집된 사진이미지를 재조합하는 김문경의 작품이 높은 점수를 받아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 역사를 담은 그릇 - 희비(喜悲)가 엇갈린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은 조선시대 도성을 경비하던 훈련도감이 있었던 곳으로, 1925년 착공하여 1926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이다. 당시 총면적 2만 2,700평, 수용인원 2만5,800명의 경성운동장은 동양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종합경기장으로 일제강점기 식민정책의 산물이었다.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 1925년 5월 30일자 일본어판에 따르면 “운동장이 완공되면 고시엔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 경기장이 된다”, “경성운동장은 1924년 동궁(일왕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처럼 동대문운동장의 전신인 경성운동장의 시작은 아픈 우리역사의 한 부분이었다. 

 이후 축구 야구 육상 럭비 경기뿐만 아니라 최초의 전국종합체육대회인 <전 조선종합경기대회>가 1929년 개최되었으며, 1934~36년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들어서면서 ‘근대 스포츠의 대중화’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1928년 야구경기에서 첫 홈런이 나왔고 서울과 평양간 축구경기가 열리면서 국민들의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일제에 의한 만들어진 공간에서 망국의 울분을 달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1945년부터 1984년까지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걸고 우리나라 격정의 시기를 함께하게 된다. 경기장이라는 고유한 역할 외에도 급변하는 정치의 소용돌이 안에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다. 1945년 백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임시정부 환국봉영회’가 열렸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시대에는 정치 목적의 군중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1946년 노동절에 좌익은 야구장에서, 우익은 축구장에서 동시에 반탁과 신탁 대회를 모두 이곳에서 열었다. 또한 유신정권의 ‘스포츠 정치’의 상징인 박스컵(대통령배축구대회와 코리안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폐지됐다)과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시작된 곳이 동대문운동장이다.

 1955년 고교 및 실업야구가 개최되면서 1959년 동대문야구장이 건립되고, 70년대에는 고교야구의 메카로 많은 스포츠스타를 양산해 내며 전성기를 누렸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당시 MBC청룡 소속의 이종도 선수가 역전 만루 홈런을 터뜨려 야구팬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던 곳, 1972년 브라질의 축구영웅 펠레가 초록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처음 경기를 했던 곳, 1976년 박스컵 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4대 1로 뒤지던 한국 팀의 차범근 선수가 후반 7분을 남기고 3골을 몰아넣어 극적인 무승부를 이룬 ‘7분의 기적’을 만들어냈던 곳이 바로 동대문운동장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경기에서 명승부와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했으며 스포츠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 장소이다. 

 특히 1984년은 동대문운동장의 운명을 결정했던 중요한 해였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신축되는 대형운동장의 그늘에 가려 종합운동장으로서의 대표적인 지위를 넘겨주게 된다. 

 2001년 수영장 씨름장 테니스장 등 일부가 철거되고 2003년에 이르러는 축구장과 야구장만 남게 되었다. 이후 경기장 노후화로 인한 이용률 저하로 동대문운동장은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운동장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2008년 ‘역사를 담은 그릇’ 동대문운동장은 우여곡절 끝에 81년의 역사를 마치고 완전철거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의 생의 흔적은 사람이나 건설장비가 인위적이고 물리적으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축이다. 단순히 스포츠 시설이라는 차원을 넘어 환호와 열광의 경기와 이데올로기 갈등의 역사적 사건 등 ‘민족의 공유문화’가 기록된 상징적인 곳이다. 따라서 동대문운동장철거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스포츠는 역사를 넘어 문화의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장소성(場所性)의 가시화 또는 재현

; 2008충무갤러리기획공모전-동대문운동장


이번 전시는 물리적 실체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 인간행위의 역동적 실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동대문운동장의 장소성(場所性)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장소성은 장소의 인지된 특성으로 인간이 체험을 통해 애착을 느끼며 다른 공간과의 차별성과 고유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부여 받게 되는 일종의 경험재인 동대문운동장의 기록을 통해 사라진 역사적 장소성의 의미를 구현하여 집단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본 전시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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