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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전

  • 전시기간

    2008-12-08 ~ 2008-12-30

  • 참여작가

    김승희

  • 전시 장소

    갤러리잔트

  • 문의처

    031-8022-5424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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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뷰어
작가는 인형 그림에서 ‘대체적 역할놀이’의 소녀 취향적 정서를 줌. 소녀 시절 감성을 따뜻하게 되살려내어서 작품 속 인형들과 교감하고 대화한다
우리의 인생은 때론 마리오넷트처처럼 움직이며 인생이 언제나 자유롭지만은 않은 것처럼 인형의 삶 또한 시대와 그녀들이 만난 주인에 따라 그녀들의 인생도 변하기 마련이랍니다. 운명처럼 말입니다. 오래된 인형일수록 그녀들의 삶도 길어지고 여러시대와 더불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녀들은 말이 없어요. 침묵과 더불어그녀들의 모습이 지나온 과거를 보여주지요. 그림속의 모든 인형들에게는 이름이 있답니다. 태생이 유럽이라 거의 대부분은 프랑스 이름이고 몇몇은 영국이름 또는 독일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언제나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녀들에게는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감정들 그리고 유행을 넘어서 아직도 끊임없이 우리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엇인가 말을 시킬 것 같지 않나요? 그녀들의 눈과 표정이 곁에 있는 주인의 기분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인형들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 전시회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랍니다.
작가노트중







인형의 외출


김성호 | 미술평론가, 쿤스트독미술연구소장


‘유사인간’으로서의 인형과 ‘호모루덴스’의 인간
인형(人形)은 사람의 외형을 흉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곧잘 '유사(類似)인간', '의사(擬似)인간'으로 성찰되곤 한다. 기실 이러한 유사인간은 '인간 이전의 원형인간'인 유인원으로부터 생명공학이 도래시킨 ‘변형태로서의 인간’인 오늘날 '트랜스휴먼(trans human)'에 이르기까지 진화론과 테크놀로지 변천사에 넓게 포진해 있다. 게다가 ‘유사인간’은 신화 혹은 판타지 류 소설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상상 인간’이나 사이보그와 같은 ‘미래형 인간’에 이를 만큼 그 정의의 폭이 대단히 넓다. 유사인간은 이제, 인공지능, 인공장기의 괄목한 성장을 이끈 생명공학이나 화장처럼 일상화된 성형 수술이 촉발하는 ‘트랜스휴먼’의 시대를 지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는 ‘포스트휴먼’(post human)의 시대로 내달음치면서 그 정의는 물론 그것의 존재이유를 더욱 확장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 이래 존재 이유가 변모하지 않는 유사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인형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형이 가지는 특별한 위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외형과 움직임을 흉내 내는 것으로부터 별반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이 인형을 줄곧 만들어온 까닭은 인형을 통해서 인간의 유희 본능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인형은 태생부터 '인간을 위한 장난감'으로서 존재이유를 부여받은 사물이다. 그런 면에서 인형은 자신을 존재케 한 인간이라는 주체를 '유희(遊戱)적 인간'이라는 J.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homo Ludens)’의 개념으로 성찰하게끔 하는 한 방식이자 도구가 된다.





작가 김승희는 이러한 유희 대상으로서의 장난감인 인형이라는 유사인간을 그린다. 장난감 인형의 존재란 한편으로 '장난감으로 결코 환치시킬 수 없는 인간 주체'에 대한 역할놀이를 대행할 대체자로 태어난 것이기도 하다. 인형이란 결국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부모, 연인, 친구 식의 ‘타자라는 또 다른 주체’를 내 맘대로 소유하고, 내 맘대로 역할놀이를 시킬 수 있는 인간 대체물인 셈이다. 따라서 인형은 사회구조상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훌륭히 성취할 수 없는 미성년자들의 커뮤니케이션 학습의 도구이자, 자신의 인간관계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던 커뮤니케이션을 가상의 공간에서 성취시키는 대체물이 된다. 소녀 혹은 소녀취향의 미성년자들은 이러한 인형의 역할놀이를 통해서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학습해가며 어른이 된다.

일견, 김승희의 인형 그림에는 이러한 ‘대체적 역할놀이’의 소녀 취향적 정서가 가득하다. 작가는 소녀 시절 감성을 따뜻하게 되살려내어서 그녀의 작품 속 인형들과 교감하고 대화한다. 인형(들)은 화면 안에서 작가(혹은 우리)를 응시하거나 대화하고 또 다른 인형들과 서로 쉬이 알 수 없는 말들로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인형들은 작가의 친구이자, 연인이며 가족이 된다.

특이한 것은 작품 속에 드러난 그녀의 인형들이 모두 전 세대(前世代)의 인형들이라는 점이다. 작가의 입장으로서도 그녀의 소녀시절에 본적이 거의 없는 구세대의 인형들이 대부분이다. 몸체는 나무, 고무, 혹은 자기로 이루어져 있고 인형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복식을 따르고 있다. 게다가 그 인형들은 모두 파란 눈이나 갈색 눈 또는 회색 눈을 하고 있는 식의 서구의 용모를 하고 있다. 오늘날 이 땅의 한국 어린아이들에게는 오래되고 낯선 서구의 골동품인 셈이다.




작가 김승희의 작품에 자리하고 있는 인형들은 대부분 그녀가 외국에서의 오랜 체류기간 동안 인형 관련 옥션에 발품을 팔고 시간을 들여서 공들여 모아 온 컬렉션이다. 유럽의 각지로부터 온 인형들을 마치 제자식인 것처럼 극진히 보살펴 오면서 작가는 인형 하나하나마다에 인격성을 부가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린이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인형 몇몇에 ‘역할 놀이’를 위해서 다중의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아빠의 인격을 부여하던 인형에게 옷을 바꿔 입혀 어느 날 아들로 둔갑시키거나 홀연 다른 인형들의 친구로 만들어내는 방식이 어린이들이 인형을 대면하는 역할놀이라 한다면, 작가 김승희에게 있어 그것은 개체의 고유한 인격성을 돌봐주고 함께 하기 위해 입양을 시도하는 양부모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마치 양부모의 마음처럼, 인형 개별체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인격을 변덕스럽게 부여하기 보다는 인형 개별체들로부터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유사인격’을 찾아내는데 골몰한다. 이것은 작가 김승희가 취하는 ‘인형을 대면한 역할 놀이’의 다른 지점이며, 즐거움과 놀이 자체에 집중하는 호모루덴스로서의 인간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지점이 된다.






극(劇)적 공간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인형의 삶이 그 주인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면, 김승희의 인형들은 주인을 잘 만난 셈이다. 그녀는 역할놀이로써 인형을 다중인격체로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잠 못 자게 괴롭히면서 소유하려 들지도 않는다. 김승희의 인형들은 자신들의 잊혀진 족보와 바이오그래피를 그녀의 도움으로부터 되찾고 자신들의 고유한 ‘의사인격’의 내러티브로 옷 갈아입게 된다.
“그녀는 조금은 어리석고 순진하답니다. / 늘 사람들에게서 속아 넘어가지요. /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착하답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요.”
베이지 색의 원피스와 바지를 받쳐 입은 ‘알프스 소녀’ 풍의 인형을 고졸하면서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그녀의 작품 <순진한 소녀>에 작가가 붙인 위와 같은 텍스트는 단지 그러한 하나의 예일 따름이다. 책더미 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는 금발의 인형을 그린 또 다른 작품 <책 읽는 소녀>는 다음과 같은 ‘의사인격’의 내러티브를 작가로부터 부여받기도 한다.
“프랑소와즈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 그녀는 영리하고 조용하며 / 또한 멋쟁이이기도 하지요. / 그녀는 친구들과 외출보다는 집안에서 책 읽기를 / 언제나 더 원한답니다.”
인형에게 이름 지어주기와 같은 명명(命名)의 체계와 같은 일반적인 역할놀이를 넘어서, 인형에게 독특한 퍼스낼리티를 부여하면서 ‘의사인격’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려는 태도는 작가 김승희의 독특한 역할 놀이가 귀결시킨 지점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실상 페이크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라는 허구의 내러티브와 맥을 같이 한다. 페이크다큐멘터리가 사실을 일부 변조해서 사실감을 극대화시키거나 허구를 사실처럼 위장, 조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김승희의 역할놀이가 갖는 허구의 내러티브는 후자와 오버랩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승희의 회화에 나타난 ‘허구에 대한 조작의 내러티브’가 관객에게 가슴 따뜻함으로 호소할 수 있는 까닭은 인형이라는 허구의 사물에 작가가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작가가 인형의 배경으로 침투시키고 인형과 또 다른 인형들과의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연극적 장치가 허구의 상황임을 엄연히 알면서도 우리가 그녀의 회화에 몰입할 수 있는 까닭도 그러한 것이다.
무표정한 인형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직임 없는 인형에 활발한 잠재적 운동성을 부여하는 연극적 장치는 그녀의 일본과 프랑스 유학시절 공간연출학과 연극연출학 전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작품 <모델>에서처럼, 외출을 위해 무엇을 입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이는 속옷 차림의 늘씬한 인형 뒤로 널브러져 있는 코르셋, 외투, 거울, 빗과 같은 소품의 배열도 연극적이지만 단순히 두 남녀를 마주하게 고려한 작품 <시골에서 사랑을>에서 보이는 인형의 배열도 연극적이다. 특별한 배치 없이 많은 인형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가족 시리즈’는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군상들처럼 보이도록 작가는 인형들을 정면을 향하게 위치시켰다. 그 뿐인가? 의상을 제거한 올 누드의 군상들 위로 조명을 비추는 이미지를 그려 넣은 작품 <아틀리에> 또한 그녀가 고려한 ‘극적 장치’를 연상하기에 족하다. 인형과 인형 사이의 배열 그리고 인형과 그에 따른 소품들의 배열은 극적 장치를 강화시키면서 인형(들)을 둘러싼 허구의 내러티브를 창출한다. 아기자기한 배열의 방식과 극적 구성은 그 허구의 내러티브를 이내 동화와 같은 따뜻한 내러티브로 변모시킨다.





인형의 집_‘포지티브 월드’
작가 김승희가 그리고 있는 ‘인형의 세상’은 포지티브의 세계이다. 구체관절인형을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파괴적인 인체의 형상을 사진 작업으로 창출했던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벨머(Hans Bellmer) 이래로 포스트모던 류의 많은 작가들이 인형을 현대인의 피학적, 가학적 욕망의 인간 대체물로 활용하면서 네거티브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면, 김승희의 입장은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그녀에게 인형은 인간의 대리 충족물 혹은 인간의 대체물이기보다는 인격체의 유사인간이 된다. 그것은 인간 외형의 공유만이 아니라 감정, 정서, 의식을 공유하는 유사인간이다.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인형의 집’이 주인공 노라가 남편의 인형이었던 삶을 떨치고 탈주해야만 했던 네거티브의 공간이었다고 한다면, 작가 김승희의 ‘인형의 집’은 성인이 된 이들이 망각하고 있던 어린 시절의 유사인간인 인형의 존재를 추억케 하는 포지티브의 공간이다.
그러나 작가 김승희가 대면하고 있는 인형 역시 끊임없는 작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다. 마치 그것은 세월을 먹어도 늙지 않는 피터팬 처럼 영원한 어린이의 세계에 안착하고 있는 미완성의 존재이다. 인형에 대한 역할놀이를 통해서 사회성과 소통의 체계를 학습하면서 아동의 범주를 벗은 우리가 동생에게 인형을 물려주고서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것과 달리 그녀는 여전히 인형에게 남아있다. 작가는 ‘인형 놀이’가 아닌 ‘인형에 대한 역할놀이’를 통해서 인형에게 사물로서의 위치를 탈각시키는 대상화의 시선을 벗기고 그들을 또 다른 주체로 등극시키기 위해 오늘도 분주히 붓을 들어 그들을 보살핀다.
연극적 장치로 우리에게 추억의 공간으로 이동케 하는 그녀의 ‘인형의 세계’ 혹은 ‘인형의 집’은 관객들에게 포지티브의 공간을 되뇌게 하고 인형과의 교감을 성취케 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작업이 남기는 과제 또한 없지 않다.
최근 그녀 스스로도 고민의 불을 지피고 있듯이, 작가 김승희에게 남겨진 관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보편적 감성의 범주를 의도적으로 탈주하지 않았던 ‘인형의 세계’라는 그녀만의 거주의 공간으로부터 이제는 조금씩 탈주하는 ‘의도적인 전략’일 것이다. 그녀는 최근 전시를 통해서 ‘인형의 세계’ 혹은 ‘인형의 집’이라는 순수의 예술세계로 흠뻑 잠입했던 그간의 열정을 조금씩 냉각시키는 또 다른 회화적 전략을 성찰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쉴 틈 없이 붓을 들어 그들을 부지런히 보살피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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