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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산수화를 현대적 의미로 새롭게 해석하여, 구상과 추상의 결합으로 생긴 동 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미감으로 만들어진 현대판 산수화를 그리는 전래식의 박영덕화랑 초대전
전래식의 미술세계임영방 | 전(前) 서울대학교 인문대 교수, 전(前) 국립현대미술관장
전래식(全來植)은 오랫 동안 몸담았던 대학을 떠나 오로지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때로는 희열에 들뜨기도 하고 때로는 앞이 안보이는 절망감으로 수없이 주저앉으면서도, 끝없는 탐색의 길을 찾아나선 구도자처럼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느 직업이나 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특히 예술창작은 작가의 이상(理想)을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로써 만족하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예술가의 여정에는 종착역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예술가의 길이 끝이 없고 험난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전래식은 기쁨과 좌절을 넘나드는 어려운 창작과정을 그저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흘리고 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경지로 진리에 세계에 다가서려는 구도자처럼. 아마도 그의 작품에서 속세의 어지러움을 떠난 평온함이 감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께다.
그렇다면 전래식은 예술창작이라는 미로의 길을 어떻게 더듬어왔는가? 전래식이 이제껏 추구한 길은 동양의 전통산수화를 소재로 삼아 통상적인 자연의 ‘산’의 묘사에서 벗어난 새로운 느낌의 ‘산’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산’의 모습이 아닌 존재의 근원을 나타내는 ‘산’을 담아보고자 했다. 또 전래식은 자연을 움직이는 생명력, 질서, 원동력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저 너머의 세계에서 느껴질 수 있는 고요함이 깃든 그런 자연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그가 찾아나선 길은 조형언어를 통한 구도의 길이었다. 이토록 어려운 길을 택했기에 그의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답없는 결과에 수없이 낙담했고 그 과정에서 어지간히도 많은 화선지를 휴지통에 버려야했다.
전래식는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시작했지만 실경산수에서 오는 진부함과 안일함에서 벗어나고자 일찍이 비구상세계로 눈을 돌렸고 그 결과 1982년에는 작품 ‘여정’(餘情)이 제 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여한다. 전래식이 비구상으로 선회한 것은, 단순히 현상계를 시각적으로 잡아내는데 만족지 않고 생성변화하는 우주만물의 근원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정’이라는 제목의 그림들을 보면 마치 만물이 혼돈(chaos)상태에서 질서있는 세계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우주창조적인 느낌도 들기도 하고 현상계에서의 변화의 흔적을 읽어낼 수도 있다. 작가는 얼룩, 우연적인 이미지, 예기치않은 효과등을 이용해서 생성하고 소멸되며 변화를 거듭하는 우주만물의 원천적인 양상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 후에도 탐험의 길을 계속되어 1984년부터는 ‘적’(跡)이라는 제재로 마치 작은 사각형의 패턴들을 돌무더기처럼 쌓아놓은 것같은 그림을 그린다. ‘적’시리즈는 앞서의 ‘여정’에 이어지는 것으로 최소의 단위체들이 집합을 이루고 움직이면서 우주적인 질서를 형성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밀어내는 듯 잡아당기는 듯 서로 맞물리면서 움직이는 작은 단위체들의 집합은 우주만물이 생성되가는 원초적인 우주의 모습이라 여겨지고, 우주만물의 태동은 리듬감과 음악성을 수반하고 있다. 우주는 더 이상 나누고 쪼갤 수 없는 무한한 다수의 원자(原子)들로 이루어졌다고 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얘기, 그리고 우주의 내적인 조화는 음악으로 감지된다고 한 피타고라스의 말이 되새겨진다.
근원을 찾아가는 10여년간의 탐구의 시간을 가진 후 전래식은 1988년 다시 산수화로 돌아온다. 이제 전래식이 보는 산은 시각으로만 잡혀지는 ‘산’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움직이고 용트림하며 술렁이는 느낌“을 주는 산이어야 했다. 현상계의 모습과 그 현상계를 움직이는 원천적인 힘을 담고 있어야했고, 시각의 눈으로 본 모습과 정신의 눈으로 본 모습 모두를 갖고 있는 ’산‘이어야 했다. 그 결과 구상과 비구상이 합쳐진 전래식만의 독특한 그림세계가 나오게 되었다. 그를 위해 먹과 융화가 잘 되는 화학성의 물질인 아크릴도 함께 사용하여 먹이 번지면서 파생되는 물감의 여운대신 과감한 색감의 흔적을 얻고자 했다. 또한 서양화에서 빌어온 면분할기법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재료와 기법은 화선지보다는 천을 요구했고, 자연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하기 위해 모래를 아크릴에 섞은 거친 색면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작가는 비구상에 가까운 자연의 형상(形象)을 분명한 표상으로 만들어 구상과 비구상이 혼합된 새로운 조형언어로서의 산수화를 산출해낼 수 있었다.
전래식은 동양의 전통산수화를 그리면서 이렇듯 서양화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어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전통에서 이탈된 서양화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작가의 생각은 아주 단호하다. 자신의 그림들이 동양화의 본령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으니만큼 그림도 그에 맞추어 달라져야 하고 새로운 조형속에서 ‘우리’의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자연관에 입각한 전래식의 산수화는 수려하고 웅장한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지만, 그러한 외관과 함께 그 속에서 분출되는 강한 생명력이 같이 담겨져 있다. 그렇기에 그의 산수화는 세부묘사에 충실한 사실적인 자연미보다는 자연의 강한 기세와 기운, 위풍이 서려있는 정신성을 더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를 위한 방법으로 작가는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여백’(餘白), 살아있는 ‘선’(線)이라는 동양화의 기본원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여백의 공간에서의 선의 자취를 공간에서 생명이 살아 숨쉬는 듯 약동하는 양상으로 고양시켰다. 그래서 그의 산수화는 표피적인 외관이 아니라 만물이 소생하고 생동하는 활성적인 기(氣)와 그 신선함이 발산되는 자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기법에서 작가는 구체적인 외양을 멀리 하고 원색위주의 채색대신 담백한 색감과 단순하고 소박한 색조조화를 택했으며, 강약이 교차하는 거친 붓질, 생략, 함축된 표현이라는 방법을 썼다. 그의 산수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간략하게 생략된 형상으로 묘사된 소나무 한 두 그루는 구상세계에 대한 작가의 향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작가는 이를 “함축된 나무형태는 생명력의 표현이고 핵심적 포인트 역할을 하는 나의 기호”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전래식은 산수화를 통해 자연의 외관적인 아름다움, 그 안에 내재해있는 웅장한 힘, 용트림하면서 태동하는 태초의 장렬한 모습, 영겁의 세월을 거쳐온 흔적, 그 모두를 담고자했다. 그를 위해 전래식은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들었고 서양화기법과 동양화기법이라는 구별없이 그 모두를 활용했다. 전래식의 산수화는 자연이 주는 웅장함, 그 태초적인 기운, 세월의 변화를 모두 감내한 위풍당당함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의 세계에서의 정적감이 짙게 배어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전래식은 소위 말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경계’(境界)를 허물고 그 모두를 담고자 했던 것같다.
작가 전래식의 끝없는 발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