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락
김효준의 회화양식은 단견에 사실적으로 비추어진다. 문제는 바로 그 '사실적'이라 평가되는 그의 그림이 가장 비사실성인 것, 즉 시물라크르(simulacre)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가 사진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여 가상성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가 그린 풍경이나 장면들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즉 그의 회화는 유사 사실적인 풍경이다. 작가는 주로 도시의 내부외의 풍경을 사진처럼 그린다. 흔히 일상적인 도시풍경이라는 것을 작가는 재현한다. 그렇지만 일상성이 곧 사실이라는 공론에 대해 작가는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그림으로 정착된다. 그러므로 사진=사실이라는 의식의 등가에 비판적인 태도를 지녀야만 그의 작품을 더 잘 볼 수 있다.
사진과 같은 그림이라고 평가를 내리면 작가는 울컥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집약된 노동, 즉 수없는 붓질에 의해서 완성된 회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사진의 손쉬운 포착이나 기계적이고 즉각적인 재현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공론에 불과하다. 김효준의 회화는 사진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전자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잠시 기웃거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단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사진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과 그의 언사가 그렇다. 리히터의 회화는 사진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닮기를 원한다. 그야말로 사진을 재현하는 포토리얼리즘의 극단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후자는 김효준에게서 찾을 수 있다. 표면상 그의 그림은 너무나 사진을 닮아있다. 더 나아가 그의 화면은 영화나 비디오 동영상의 스틸 컷처럼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오래 전부터 영화에 관련된 미술을 해 왔다. 순간성은 화면이 담지하고 있는 시간의 모듈이다. 빠른 시간을 잡아내는 데에 카메라의 메커니즘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인간이 눈은 모든 것을 읽기에는 아무래도 부적당하다. 그렇게 읽혀진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평상적인 모습에 놀란다. 사실 거의 모든 사실주의 화가들은 일상적인 것에 그리고 평범한 것에 천착한다. 이것은 감정을 누르고 차가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김효준도 사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만, 포토리얼리즘의 부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진을 이용하지만, 그는 사진이 가진 냉혈적인 시각에 반문을 한다. 그의 의도적으로 어설픈 재현이 그것을 반증해준다. 그의 회화성은 재현의 빈틈없는 완벽함과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이것으로 인하여 김효준은 이전의 메카니즘에 가까웠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거리를 준다. 그 빈틈에서 그는 비판적 사유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김효준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 그림은 도시의 밤풍경이다. 약간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시간대이거나 아니면 술 한 잔이 생각나는 그런 저녁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시의 풍경은 길 위에서 본 것들이 많다. 끊임없이 질주하는 현대인의 시각을 대변하는 듯이 작가의 시선은 자동차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러니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사색 따위를 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스냅에 가까운 인상주의적 시선이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속도를 암시하지만, 그림은 이 해석을 계속 추론하도록 요구한다. 즉 이 속도는 자본주의사회가 형성해 놓은 생존의 리듬이고, 그것에 길들여지고 지속적으로 자본에 의해 부추겨진 욕망의 진행속도이기도 하다.
이 숨 가쁜 시선 속에서 도시는 정작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밤의 도시는 현란한 조명의 가면 속에서 치부를 감춘다. 자본주의의 구체적인 쓰레기들과 상흔들은 이 불빛 속에서 결국 사라져 버린다. 남는 것은 인공의 불빛들이 형성하는 온갖 라인들과 그 선들이 형성하는 가상의 천국들이다. 하긴 자본주의의 천국은 거침없는 소비 그리고 배설의 장소이다. 욕망은 화려한 조명의 색채에 의해 포장된다. 김효준이 그려내는 리히터의 방식을 닮은 회화적 풍경은 바로 이 욕망들을 직시하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 직시는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취한 시선의 렌즈를 우리에게 들이댐으로서 욕망의 허상을 더 잘 보게끔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유흥가의 한 건물을 그려낸 풍경에 관심이 간다. 어렴풋이 더듬어지는 건물의 외관을 뒤덮고 있는 간판들은 이 풍경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간판은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을 매혹적으로 포장한다. 모든 것이 일회용이 되어가는 듯 그런 물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편의점이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띠는 것은 단지 김효준의 그림을 통해서 인지한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이것을 굳이 그림으로서 우리의 잊을만했던 욕망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단계에 이르면 김효준의 회화 언어는 가파른 어조로 우리의 잠재된 소비와 배설욕망을 힐난한다. 그리고 이후에 밀려드는 허탈감을 공유하려고 한다. 이쯤에 이르면 그의 그림은 이제 객관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사실주의의 경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이 된다.
이 낭만적인 허탈감은 홍상수 류의 영화와 닮았다. 그리고 그의 그림들은 부조리가 일상화된 사회 속에서 부유하듯 헤매는 현대인들의 존재감을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몇몇 실내의 풍경은 이러한 감정을 잘 포착한다. 그리고 그 표현은 영화의 앵글과 닮았다. 아마도 홍상수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비스듬히 쳐다본 어느 맥주 바의 실내나 피시방의 침침한 복도는 작가가 탐색하고 직접 경험한 다른 차원의 밤풍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방황하는 현대도시인들의 시선과 그들의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단순히 개인적인 멜랑콜리 정도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 김효준의 회화가 지닌 미덕이다. 그의 발언은 보다 구체적이고 비판적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고민 없이 재현의 형식적 방법론에만 빠져 있는 다른 작가들과 완연히 구별된다) 그림의 시선은 목적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시각적 공황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이 보는 도시의 스펙터클과 이와 대조되는 개인들의 존재론적 소외는 거대 자본주의의 가상적 현실과 소비와 배설로 이 체제에 끊임없이 소진되는 개인들의 실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만들어준다.
김효준의 사실주의 회화는 가장 비사실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작에 속하는 놀이동산을 그린 그림은 어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가의 "디즈니랜드는 미국이란 국가가 하나의 허상(=시물라크르)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즉 전체가 시물라크르가 되어버린 도시나 공원 혹은 유흥지를 소요하면서, 또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찰자 -즉 마치 어떤 현상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한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1인칭의 관찰자 시점을 고수하면서 바라본 현실들이다. 즉 가면을 쓴 현실을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자체를 말한다. 그의 회화가 사실주의일 수 있다는 점은 그가 이 허상들을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바라보게 하는 르포르타주와 같은 어조의 사실주의는 하지만 현 사회의 욕망의 공범이 되어버린 작가의 고해성사처럼 또한 낭만적인 정조를 지닌다. 이 둘의 이질적인 결합이 김효준의 그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