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안국약품(주) 갤러리 AG에서 신진작가공모 4번째 작가 송영욱의 개인전이 열린다.
“기억의 더께” - 송영욱
2009 신진작가공모IV 삶의 더께박 천 남 | 미술비평,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쓰러져가는 트럭 한 대가 처량하게 놓여 있다. 전시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이 낡은 트럭은 놓여있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가느다란 투명줄에 몸을 맡긴 채 처절하게 천정에 매달려 있다. 이미 오래전에 용도 폐기되었을 법한 이 작은 트럭은 한 눈에 보아도 더 이상 달릴 수도 없고 제 힘으로 온전히 일어설 수도 없는, 몸도 목숨도 다 되어버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태로 보인다. 세상 풍파에 거침이 없이 한동안 달리기 성능을 뽐냈던 트럭은 원래의 철제 거죽과 수천가지의 부속품들이 모두 거세된 채, 좀비처럼 마냥 흐느적거리고 있다. 차라리 퍼져서 바닥에 널 부러져 있어야 트럭 스스로도, 보는 이도 부담이 없을 것 같은, 이 미라처럼 낡고 쭈글쭈글 말라비틀어진 트럭은 손대면 재로 변할 듯, 빳빳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관객을 향해 돌진할 태세로 버티고 있다.
송영욱이 선보이는 이번 설치작업들은 흡사 수분 등의 유기질과 생명질이 다 빠져나가 아예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곤충의 시신을 연상시킨다. 이들은 마치 곤충이나 파충류가 껍질을 벗어 놓은 것처럼, 꼬투리나 껍질만 전시장에 남겨 놓은 채 일체의 유기적 실체를 전시장 밖, 어디론가 흩어 버렸다. 세상 저 멀리, 이른바 탈각(脫殼)시켜 버렸다.
그것은 비단 트럭만이 아니다. 푹신함을 생명으로 했던 소파,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배어 있는 출입문, 한창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목마, 어디론가 떠날 때 든든한 친구이자 동반자였을 이런저런 가방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전시장에 함부로 누워 있거나, 구겨져있으며 때론 나름의 줄을 이루어 전시장 바닥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영화처럼, 이들이 서로 싸움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님 저 고약한 표정의 트럭이 가정집으로 돌진이라도 한 것일까?
정신을 챙겨 주위를 돌아보니 다수의 회화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의자와 목마와 이런저런 사물들이 그림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모두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형태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다. 바람과도 같은 무언가에 쓸려 지워져 있거나, 심하게 화면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마치 의도된 흔들림과 과다 노출된 사진 결과물을 보는 듯하다. 불안한 느낌과 함께 공연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젊은 작가 송영욱은 이 장면들을 '이사'에 대한 기억으로 설명한다. 이사. 누구나 적게는 한두 번, 많게는 수십 번의 이사를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이사에 대한 추억, 특히 어릴 적 이사 가던 날에 대한 기억은 이른바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새로운 집,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보다는 애써 버리고, 마지못해 떨치고 가야하는 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더 크게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든, 또는 권력이나 명예이든, 사람이 가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산다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송영욱의 작업은 버리지 못하는 작금의 이런저런 세태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이사에 대한 추억을 소재로 한 송영욱의 이번 작업들은 작가 자신이 경험한 이사와 관련한 개인적인 경험이나 그와 관련한 기억, 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나버린 시절의 생각을 떨쳐버리거나 환기시키려는 스스로의 반성적 노력으로 이해된다. 즉 움켜쥐고 놓아버리지 못한 그 무엇, 또는 애써 지나치고 지나쳐버린, 아쉬움이 크게 남는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 혹은 그것을 스스로 벗겨 버리려는 작가의 애끓는 탈각(脫却) 행위로 이해된다.
송영욱의 작업은 하루에 떠낼 수 있는 범위와 양이 제한되어 있다. 그 제한된 흔적들이 시간차를 두고 이어지면서 하나의 결을 이루고 나아가 독특한 표정과 질감을 이룬다. 사물에 한지를 얹고 두드리며 이런저런 표정을, 세월을, 기억을 담아내고 떠내는 과정은 극히 섬세함을 요한다. 작가의 내밀한 감성과 기억이 교차하며 사물의 표정과 묵은 내면의 때, 즉 더께가 고스란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세월의 주름을 들춰내며 감정의 골을 숨김없이 찍어낸다. 그것이 합성수지로 코팅이 되어 하나의 표정으로, 일정한 형태로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부서지며 다시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다. 이 하나하나의 물리적 조각과 기억의 편린은 손을 베일 수 있을 만큼 얇고 날카로운 예각을 때론 뾰족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다시 묵묵히 접착제로 붙여나간다. 때론 그것들에 의해 살이 찍히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을 반복하며 송영욱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돌아다본다. 송영욱의 이른바 ‘삶의 더께를 떠내는 작업’이 떠내려는 대상 전체를 석고와 같은 물질에게 한꺼번에 맡기는 일반적인 캐스팅 작업과 엄연히 구별되는 이유다.
물에 젖은 조그마한 한지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실물 크기로 직접 떠내고 다시 한지의 양면에 합성수지를 발라 빚어낸 송영욱의 독특한 껍질들은 풀을 잔뜩 먹인 종이처럼, 기름이 잘 배어 있는 장판지와 같은 경화된 질감을 보인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일견 화면 속 사물들은 견고하게 화면에 안착되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시장의 그것들은 보기와는 달리, 손대면 쪼개질 듯, 불면 날아갈듯, 마치 시나브로 지워져 버릴 기억의 편린들처럼 수많은 조각들이, 붓질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오늘도 불안한 듯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