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의도 :
得道Archive
-得道Archive : 득도로 가는 길의 방법을 모아놓은 예술 정보 창고.
인고의 행위를 통해 정신과 육체의 합일을 이루려는 작업 방식은 수행의 그것과 닮아있다. 득도 아카이브의 작가들은 작업에 임함에 있어 바로 이 수행과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를 창조하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노동, 예술적 가치창조를 위한 노동집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유발하게 하는 숭고미적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다. 동양인의 삶에서 종종 道를 터득하는 길을 득도라 부른다면 시각예술에 있어 이들이 보여주는 예술적 노동은 마치 득도의 길을 가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작품에 대한 열의와 긍정적 집착이 단순한 동어반복의 개념에서 벗어나 일종의 고뇌와 간섭 없이 진행되는 이들의 행보를 답습해보며 진정한 가치에 대한 숭고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면 어떨까? 그래서 그들의 작업의 방식이 결과물에 국한되지 않고 과정의 아름다움까지 전달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노동의 결실일 것이다.
강인구의 엮은 돌들은 쉽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자연에서 왔지만 인간의 필요에 의해 공사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그런 돌들이 제 역할을 다했거나 혹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의미 없이 길에 나뒹굴고 결국 강인구 수집의 카테고리로 들어앉는다. 그리고 다시 작가의 손에 의해 철사의 묶이고 엮이며 새로운 사연의 예술작품으로 재탄생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돌을 엮는 작가의 손길은 수행과 같으며 하나의 수행이 전시를 통해 공개되어 소진되고 나면 다시 돌들은 제자리를 찾고 강인구 작업의 끝은 바로 그 지점이 된다.
김윤수의 풍경은 하늘과 바다의 넓이와 크기도 유한함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그가 만든 풍경은 실존하지 않지만 진정하게 보이며 유한한 풍경이지만 무한으로 감지된다. 노동의 집약으로 이루어진 골판지와 비닐들이 겹겹이 쌓이고 첩첩히 가라앉아 확언되지 아니한 무한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 담담하고 무심한 작가의 행위는 수천, 수만의 반복을 통해 고행과 같은 작업의 방식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지만 그 결과물은 오히려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적막과 유사하다.
박소영은 미묘한 낌새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 챈다. 덕분에 버려진 의자도 못쓰게 된 선풍기도 생의 기운을 재빨리 회복한다. 회복의 내면엔 치열한 작가의 고민과 노동의 손끝이 예리하게 박혀 있지만, 모조 잎사귀로 뒤덮여 예술이라는 신생물질로 태어난 순간 역시 작가의 감각 있는 유머와 재치를 보여준다. 필요를 다한 것들을 뒤덮은 것이 어찌하여 생물의 가짜를 대놓고 표방하는 모조잎사귀란 말인가. 덕분에 일차원적인 순환이나 회복이 아닌 좀 더 차원 높은 감상을 하게 되지만 혹여 감각적인 작가에 의해 잠시 기분 좋은 놀림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이길우 작품화면 속 ‘구멍’의 역할은 생각보다 많다. 향이나 인두로 일일이 얇은 순지에 구멍을 내는 작업은 일단 대단한 노동력을 요구하며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구멍’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작가의 노동을 보여주는 데 멈추지 않고, 작가의 속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동문서답-가변>은 시대마다 다른 미의 상징, 비너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동문서답-流, 遊>는 옛 풍경에 현대적 인물을 동어반복으로 등장시키며 친절하게 흐르는 세월과 노니는 현재를 설명해준다. 나름대로의 에피소드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작업은 그 노동만큼이나 오랜 사유를 전제로 하며 그 사유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역할 역시 ‘구멍’, 그것이 크다.
정광호는 오늘도 큰 바느질을 한다. 비조각적 조각(non-sculptural sculpture)이라 명명하고 있는 그의 작업은 만들고 깎아내지 않는다. 가는 구리선을 엮고 매듭지으며 이루어 낸다. 그러다보니 속이 훤히 보이며 mass 역시 정확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이루어낸 조각의 새로운 속성을 누가 조각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새로운 물성(物性)을 부여받은 꽃과 항아리들은 이내 일상의 그것과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정광호라는 작가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바느질 하듯 엮인 구리선이 가져다 준 노동의 결과물이므로 정광호의 비조각적 조각을 나는 오늘 큰 바느질이라 불러 본다.
정정엽의 곡식들이 움직인다. 작품이 쌓이면 배가 불러 좋다는 곡식시리즈들이 9년 만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붉은 팥알 하나하나 노동자의 땀방울이 베어 있다고 믿고 사는 이 작가의 회화는 노동자의 그것만큼이나 힘겨운 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 곡식의 노동의 결실이 붉다 못해 검은 건강한 팥이라면 정정엽 노동의 결실은 바다도 되고 얼굴도 되는 팥의 또 다른 유기체 모습이다. 이러한 작가의 이야기는 나에서 시작해서 오로지 나로 끝나는 소모적 ego가 아니라 나로 시작하지만 이웃과 사람들로 다시 시작되는 움직이는 공동의 이야기가 된다.
홍상식의 집착은 아름다워 보인다. 쏟아지는 일회용품 중 빨대를 배치하고 돌출시켜 만들어지는 형상들은 집착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속이 빈 빨대를 물질문명으로 대입하여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 과정상 드러나는 개념을 짜깁기 보다는 작가의 習과 그만의 조형언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점을 달리하고 돌출의 힘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예리하게 포착해 내는 작가의 눈은 섬세한 손을 이용해 긋는 선이 아니라 드러나는 선, 구멍으로 만든 용감한 면, 빨대라는 작은 실물 자체가 아닌 심상의 큰 덩어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조형적 언어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은 모든 빨대라는 소재와 집착이라는 노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의 집착을 아름답다고 말하려 한다.
이렇듯 그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을 단순한 노동집약적 작업이라 설명하기보단 사유의 틀을 은유적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은 작업 방식을 통해 한 단계 위의 득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이 제공한 그 득도의 방식을 우리가 향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득도의 길을 모아 놓은 아카이브일지도 모른다.
자하미술관 책임큐레이터 김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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