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생
황나현 평론
자연으로의 여정 그리고 순수
박옥생(미술평론가,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1. 자연 탐색의 여정
황나현은 얼룩말을 통한 대자연의 생명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작가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을 동경하고 자연이 주는 감성을 체화하기를 꿈꾼다. 그래서 동양의 오랜 관념 속에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合一)과 합치(合致)의 관계 설정이 중요한 주제였다. 현대 물질문명의 고도화에 따라 자연의 파괴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탈에 따른 자연이 가지는 본성에로의 회귀는 현대인들의 갈망인 것이다.
작가 황나현이 보여주는 얼룩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식물성으로 가득 찬 풍성한 화면들은 현대인들의 메마른 정신에 시원한 바람을 주입한다. 사실 작가는 ‘얼룩말의 숲(Zebra's forest)’이라는 화려한 색채와 시선을 끄는 조형성으로 우리 앞에 신선하게 등장하였다. 그의 화면 속에는 제의의 몸짓으로 가득 찬 원시인들의 군집과 갖가지의 꽃들로 화려하게 장엄한 태고의 숲이 연출되었는데, 작가에겐 자연의 본성은 아프리카의 원시림과 같이 다가온 듯하다. 그리고 인간의 눈을 닮은 선한 얼룩말들이 무한한 생명성을 드러내며 연출되었다. 작가는 분명 자연의 무궁한 생명력과 원시성에 감동받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어 선보인 ‘공작부인(The duchess)’ 은 인간을 은유한 얼룩말을 치장하고 장엄시킴으로써, 인간이 가진 감정의 깊고 낮은 경계에서의 모습들을 가시화 시킨 것이었다. 이는 귀족과 같은 동일선상에서 느끼는 자연이 가진 화려함 속에 숨겨진 내밀성과 다양성을 조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작가 황나현에게 자연은 그의 조형세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신성한 산이다. 그는 산을 오르듯, 생명을 느끼며, 험난한 계곡을 체험하듯이 하나하나의 탐색의 여정을 가시화 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원시성과 같은 태고의 자연, 그 자연 속에서의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삶의 과정들은 단계 단계의 작가의 시선을 투과한 후 원시성, 생명성, 화려함과 같은 자연의 특정한 본성들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금번 전시에서 새롭게 보여주는 ‘천사(Angels)'에서는 날개를 단 얼룩말을 보여줌으로써 천사의 맑고 깨끗한 모습에서 자연의 순수성을 도출해 내고 있다. 천사는 신의 전령이나 하늘(神)세계와 인간의 매개자이다. 비가시적인 세계의 신성한 존재이자 문화상징에서는 빛, 태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태양상징의 다른 모습이 천사일지도, 빛의 다른 모습이 천사의 행위적 성격인지도 모른다. 날개를 달고 갖가지 꽃으로 장엄한 얼룩말은 싹을 틔우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태양의 신비한 힘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동화 속의 실재하지 않는 “엷은 꿈”과 같은 천사의 이야기에 행복해하며 즐거웠던 추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천사는 작가에겐 어린 시절과 같이 뇌 속에 남아 있는 행복한 추억의 대표적 상징물인 것이다. 이는 원시성과 치장으로의 장엄함에서 확장된 작가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어릴 적 꿈과 희망의 가시화로 승화된 것이다. 날개는 초월하는 힘이나 자유에로의 꿈, 정신의 비상(飛上)이라면 그 날개를 타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작가의 욕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2. 꽃을 인 얼룩말 그리고
망아(忘我)와 순수(純粹)에 관하여
사실, 황나현의 대표적인 조형은 풍성한 꽃을 이고 있는 눈이 맑은 얼룩말일 것이다. 화관을 쓴 미술사적인 도상(圖像)들은 불교의 노사나불과 같은 특정 불상이나 관음보살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는 고대의 인간이 신에게 기도를 올릴 때, 샤먼과 같은 의례를 치르는 주재자가 하늘(神)과의 접신을 용이케 하기 위한 안테나와 같은 도구로서의 행태가 조형적으로 계승되고 변형되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꽃을 인 조형이나 꽃을 든 형상은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비의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서천으로 떠나는 바리떼기는 모란꽃을 들고 있으며, 문수보살도 연꽃을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지물(地物)들은 그 시대와 지역의 특수한 문화적 환경이 도상적으로 유행하여 전통이 되었을 법 하지만 꽃을 이거나 든 것은 신과의 교감,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특수한 행위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집단적 표현(collective representation)이라 하겠다.
작열하는 봄빛으로 가득 찬 낙원에 소담하게 피어있는 꽃들을 한껏 올린 황 작가의 얼룩말들이 이러한 집단적 표현으로서의 고전의 도상과 상징들과 교차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 오롯하게 하나로 정신을 모으는 순간으로 간주된다. 장자(莊子)에서는 사물을 잊고 하늘을 잊는 일, 그것을 망아(忘我)라 하며 망아의 사람이야말로 하늘(자연)의 경지에 들어간 자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망아를 위한 방법적 모색이 이러한 특정한 행위나 물질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망아는 자연합일의 단계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며 자연과 교감의 순간이라 하겠다. 작가 황나현의 조형들은 이러한 망아를 위한 극치의 장엄들을 구조화 하고 있으며, 작가의 내면이 갈구하는 원시세계, 순수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인 것이다.
이로써 만나는 세계는 잠자는 감성을 일으켜 세우는 기쁨과 환희의 순수한 세계이다. 이는 실재와 환상이 교합하여 만들어진 감성 너머 존재하는 자연인 것이다. 순수는 정신과 하나되어 자연의 이치와 통하고 합해지는 것이라고 했듯이, 작가가 구현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태고의 원시성으로 회귀하고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게 된다. 이는 황나현의 화면 속에 심신(心身)의 안정을 유도하고 현대인의 병을 치유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작가는 가깝지만 아주 먼 어린 시절의 깊고 뚜렷하게 자리 잡은 동심의 나라를 재생시키고 있는 듯하다. 원시성, 몰입, 순수는 어린아이와 동일한 개념들이라 한다면, 작가의 순수로 장엄한 천사의 세계는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보인다. 그것은 외부로 향하였던 시선이 내면화, 체화되어 유년기와의 일정부분 융합과 해체를 거침에 따라 마음의 시선으로 숙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황나현의 그림은 생명력과 신선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며 가슴으로 번져오는 감동을 준다. 인간을 은유한 동물과 자연이라는 주제는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주제이자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고 기쁨을 던지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안에서 작가의 화면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되고 또한 성숙되어 관자의 마음에 잃어버린 낙원으로의 마음의 문을 열어 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