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는 9월1일부터 10월10일까지 다양한 소재에 펼쳐진 고암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이응노-경계에서, 경계를 넘어>전을 개최한다. 대전광역시이응노미술관에서 2010.5.4~8.22에 열린 『이응노-경계를 넘어, 墨으로 부터의 變奏』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널리 알려진 고암의 문자추상과 군상은 물론, 몽돌, 비닐을 사용한 작품들을 포함한 다양한 작업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고고학 연구로 유명한 연세대학교 박물관은 기존에 있던 이응노의 미술적 가치외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새겨 놓은 미래 유물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응노
‘불란서에 살면서 불어를 모르는 오직 한 사람의 외국인’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삶을 마감한 이응노의 오랜 벗 오지호가 기억하는 생전 그의 모습이다. 30여 년을 생활한 나라의 말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에 속할 것이다. 그것도 자타공인 현대 미술문화의 종주국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정의 뒤에는 단순하지 않은 이유가 있음직하다. 그로 하여금 외부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줄 외국어를 선택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디아스포라적 존재감을 떨치기 위해서 이응노가 선택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외부와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 자신을 있게 해주었던 기억들과 단절될 수 밖에 없는 경계선 위를 걸었던 이응노. 그는 예술가에 앞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한 인간이길 갈망하는 수도자였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다. 나는 그래도 고독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다. 나는 혼자 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항상 그림을 그렸다. 땅 위에, 벽에, 눈 위에, 그리고 검게 탄 나의 피부에 손가락이나 나뭇가지 또는 돌을 가지고서... 지금도 그때처럼 항상 그림을 그리는 일, 그것만이 변함없는 나의 행복이다.”
지상의 권력은 언제나 지상의 권력을 탐하는 자를 탄압하는 대신, 그들의 권력을 욕망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두려워하며 공격해왔다. 사람이 만든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화려한 구속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권력이 제안하는 달콤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응노가 작가세계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던 1970년대, 한국을 지배하던 견고한 정치체제의 폐해의 희생양이 되는 경험이 선택이 아닌 운명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인간 이응노는 역설적으로 참담함에서 작가 인생의 절정을 완성시킨다. <문자추상>과 <인간>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문자는 정교한 기호체계들의 정점에 위치한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그 중 으뜸의 정교한 체제를 반영하고 있는 문자다. 유교의 전통이 여전했던 시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응노에게 한자는 세상을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첫 문이었다. 달리보면 문자를 구성하고 있는 선과 선의 원래적 관계를 바라보려고 한 <문자추상> 작업은 기왕에 그가 보고 있었던 세계관에 대한 도발인 동시에, 인위의 극에서 무위를 탐구하고자 하는 자유의지의 소산인 셈이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있다. 작은 미생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우주위를 흐르는 별까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움직인다. 아니 살아있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피곤함과 친숙함에 빠져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살아있어도 죽게된다. 이응노는 생전 한 번도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의식을 투영할 소재를 채택하는 것에도 가림이 없었고, 기억을 새겨 담을 표현 재료를 택함에도 거침 없었다. 종이, 천, 돌맹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한 재료로 했던 <옥중미술>은 그 절정이다. 오랜 세월동안 규정됐던 미술세계의 규칙마저도 그의 의지를 구속할 순 없었다.
“나의 그림이 변하여 가는 과정 속에서 옥중 체험은 한 번 더 나에 대해서 눈을 뜨게 했다. 만년이 되어서 늦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눈을 뜨게 한 것으로 나를 다시 젊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개의 인간이 삶의 마무리를 하는 나이에 젊음으로 회귀한 이응노가 80년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 내어놓은 <인간>시리즈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의 노래였다. 사회를 움직이게 하고, 방향짓게 하는 원천이 영웅같은 한 사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의 손잡은 운동에 있다는 발신기호는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는 한국인들만으로 작업의 수신자를 국한되지 않았다. 핵확산에 반대하는 서구인들에게도 춤추듯 얽혀 움직이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의미있는 내용으로 발화했다. 자유라는 ‘인간의 道’ 앞에 동양과 서양의 경계는 무의미한 일이다.
고암 이응노가 세상을 떠난지 이십년이 넘었다. 그가 떠난 세상은 여전히 혼란하다. 명백한 피아구분이 가능했던 고암 생전과 달리,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시대는 피곤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 아둔한 일로 치부되곤 하는 2010년의 한국에서, 고암 이응노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화폐가 아닌 인간의 어깨 뿐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기 위함이 아닐까.
윤현진(연세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