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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와 투명아크릴판을 소재로 작가는 '허울'이라는 작가 고유의 주제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심화함
허울, 그 존재론적이고 사회학적인 막고충환 | 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동배는 진작부터 자신의 조각을 허울이라고 부른다. 허울이라는 주제를 유지하면서, 매번 이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허울이 의미하는 것, 그 의미를 캐는 것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허울이라는 말은 설핏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려준다. 이를테면 허우대(허울)만 멀쩡했지 실속은 없는 사람이라거나, 겉만 있고 속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그렇다. 그런가하면 허울은 뱀이나 매미 같은 변태동물이 벗어놓은 허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의 허울은 애벌레가 성충으로 성장하기 위해 견뎌왔을 인고의 세월을 암시하며, 그 이면에 존재가 탈바꿈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존재가 거듭나는 계기를, 화려한 비상과 도약을 예비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허울은 한때 존재가 머물렀을 집이며 흔적이란 점에서 알을 상징하며 생명을 암시한다.
이처럼 허울은 겉모습, 표면, 파사드(구조와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장식을 목적으로 덧대 만든 건물의 전면과 그 표면장식), 거듭남의 계기, 그리고 생명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거느린다. 그 이면에는 내면보다는 표면에 의미를 부여하는(사르트르의 실존주의보다는 밀란 쿤데라의 키치에 동조하고, 자기소외와 부조리의식보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더 공감하는) 세대 혹은 시대에 대한 논평이 들어있고, 고대신화로부터 현대에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욕망 즉 자기변신을 위한 소망이 담겨진다.이처럼 허울은 겉보기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나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듯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 환원되지는 않는,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한 축이 존재론적 문제의식에 가 닿고, 다른 한 축이 동시대의 세태와 시대적 풍경에 대한 논평에 연이어진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 그대로, 그 논평 그대로 작가의 작업 속에 녹아든다. 허울은 말하자면 작가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시대를 반성하기 위해 호출한, 작업의 구실이며 매개인 것이다.
처음에 작가는 석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추상작업을 매개로 허울의 개념을 풀어낸다. 추상작업이라고는 했지만 엄밀하게는 알과 같은 유기적 형상이나(그 자체 생명을 상징하는) 신체의 특정 부위를 소재로 한(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반(半)구상작업이고 반(半)추상작업들이다. 형식상으론 사각형의 패치를 덧붙여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 형상을 축조해내는 방식인데(이 방식은 석재를 소재로 한 전작은 물론이고 투명 아크릴 판을 소재로 한 근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 만큼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또 다른 핵심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그 방식과 석재라는 소재가 선뜻 매치 되지가 않는다. 세분화된 사각형의 패치를 덧붙여나가는 과정이 유연한 소재와 어울릴 것 같은데, 작가의 경우에 통돌(덩어리 돌)을 일일이 다듬고 가공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이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단단한 소재로써 부드러운 재질을 흉내 낸다? 무거운 돌을 소재로 하여 가벼운 느낌을 연출한다? 이런 흉내 내기가 의외성을 드러낸다.
사물이 변성되고 물질이 변환되는 어떤 경지(그 자체 중세 연금술과 함께 유대 신비주의의 일종인 카발라에 맞닿아있는)가, 사물과 물질에 대한 선입견을 교정하는 어떤 경계(혹은 탈경계)에의 인식이 읽혀진다.그런데 왜 하필 하고많은 형태들 중에 사각형일까(역시 아크릴 판을 소재로 한 근작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사각형의 패치를 덧붙여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전체 형상을 축조해낸다는 점에서 사각형은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각형을 선택했고, 이 사각형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에게 사각형은 문명을, 문명의 최소단위를 상징하며, 그 기본형에 해당한다. 주지하다시피 문명은 온통 사각형 천지다. 집도, 학교도, 전화박스도, 크고 작은 포장용기들도, 책도, 공책도, 지갑도, 가방마저도 사각형이다. 문명의 산물치고 사각형 아닌 형태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오죽하면 사각형에 빗대어 일상을 풍자한 노래마저도 있다. 작가에게 사각형은 이처럼 문명을 상징하며, 그 형태가 알에 적용될 때 생명(생명의 최소단위)을 상징하며, 사람에게 적용될 때 존재(존재의 본질)를 상징하게 된다. 그 기본형이 모여 알도 만들고(유래하고) 사람도 만든다(유래한다).
석재로는 단단한 재질의 오석을, 그리고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질감과 반투명한 느낌의 대리석을 주로 사용한다. 앞서 살폈듯 그 표면은 마치 사각형의 패치 조각을 덧붙여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 자체도 예사롭지가 않은데, 작가는 여기에 더해 통돌을 무슨 나무나 점토마냥 그 속을 파낸다. 이로써 말 그대로 돌 재질의 허울, 껍질, 그리고 알의 형상이 조형되는 것이다(허울, 알섬). 그리고 그렇게 속이 빈 조형물의 내부에 조명을 장착해 조형물이 면해있는 바닥으로부터 불빛이 발해지게 했다. 특히 대리석을 소재로 한 조형물에서는 소재 자체의 반투명성으로 인해 일정한 양의 빛이 조형물 외부로 투과되고 있어서 더 부드럽고 은근한 느낌을 준다. 알섬이란 제목처럼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알들이 빛의 기운을 받아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다. 이로써 허울은 알이 함축하고 있는 생명의 메타포로서 현상한다.
그리고 이후 투명 아크릴 판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로 넘어간다. 편의상 넘어간다고는 했지만, 아크릴 판을 소재로 한 작가의 최초 작업은 석재보다 앞서 이미 1997년에 처음으로 시도된 바 있고(허울-그 채울 수 없는. 일상적인 기물을 소재로 한), 이후 그 소재가 달라졌을 뿐(일상적인 물건으로부터 인체로), 방법의 큰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사각형의 패치를 덧붙이는 것은 여전한데, 패치와 패치를 볼트로 고정하기도 하고 판과 동일한 아크릴 성분의 막대를 녹여 접합하거나 한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점토로 소재를, 이를테면 사람형상을 빗는다. 그리고 그 형상 그대로 폴리로 떠낸다. 일반적인 경우에 이렇게 떠낸 형상으로 마감되기 마련이지만, 작가의 경우에 그 형상은 다만 소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형상을 지지대 삼아 그 표면에 아크릴 판을 덧붙여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작가 특유의 공정이 수반된다. 말하자면 형상은 유기적 곡선과 섬세한 굴곡으로 축조돼 있어서 그 표면에 형상 그대로 평면의 아크릴 판을 덧붙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작가는 열풍기를 동원한다.
아크릴 판이 열풍기의 열을 받아 유연해진 짧은 순간을 이용해 형상의 외형을 따라 아크릴 판의 형태를 고정시키는 것이다(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 작업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방법으로 판과 판을 덧붙여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거쳐 형태가 완성되면 내부의 폴리로 떠낸 형상과 외부의 아크릴 판을 덧대 만든 형상을 분리시킨다. 이로써 폴리 형상은 말 그대로 소지를 위한 과정에 머물게 되며, 아크릴판을 축조해 만든 조형만으로 허울이란 주제의식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최종적으로 허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해본 것인데, 예상할 수 있듯 그 과정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투여했을 노동의 시간은 마침내 허울을 벗어던지고 비상을 꿈꾸는 애벌레의 기다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람이, 사람의 허울이, 한때 머물렀을 존재를 침묵으로써 증언하는 허물이 태어난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아크릴판 대신 폴리 형상으로 만든 세트작업을 선보인다. 등신대 크기의 인체군상을 제작한 것인데, 실제 그대로를 재현했다기보다는 실제의 인체를 모티브로 하여 이를 다소간 양식화하고 추상화한 것이며, 보기에 따라선 마네킹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표면에 펄 성분이 함유된 은회색 우레탄 도색으로 마감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감지되는 인공적인 느낌이 <레드카펫>으로 명명된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의미가 포토 존과도 통하는 레드카펫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이면 누구든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스타열망의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스타의식은 그 이면에 자기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고 있다. 스타의식과 소외의식은 말하자면 별개의 것이 아닌, 그 자체 존재의 이중성을 대변해주는 양날의 칼이다.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스타를 열망하게 하고, 스타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하고, 마침내 스스로 스타 되기를 열망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실현된 스타는 진정한 자기와는 분리된 또 다른 자기에 지나지가 않는다. 작가는 이처럼 분열된 자기에서 또 다른 종류의 허울을 본다. 스타(그리고 스타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 자신을 일종의 상품으로서 이해하고 또 제시한다는 것, 궁극적으론 인격의 사물화를 실현한다는 것, 이 일련의 현대적 현상(병리현상?)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그 허울은 사회학적인 의미로까지 그 지평이 확장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 소망을 다른 버전의 작업으로 변주한다. 바로 <나비의 꿈>으로 명명된 작업이다. 속이 빈 거대한 알과 그 표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나비 떼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알과 꿈과 비상과 소망을 상징하는 나비가 의미론적으로 오버랩 된 작업이다. 알을 허울이 변주된 경우로 본다면, 그 표면의 나비는 마침내 허물을 벗고 비상하기에 이른 성충(진아 곧 진정한 자기로 거듭난 존재)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런가하면 나비가 나풀거리며 나는 날개 짓을 보면 왠지 꿈꾸는 듯 하고 비현실적인 듯해서 장자몽이 떠오른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와 객이 하나로 스미는 경지. 엄밀하게 말해 허울은 겉과 속이 따로 없다. 허울의 투명한 막은 최소한 그 경계를 강화시켜주기보다는 허무는 쪽에 가깝다. 마침내 허울을 벗어던진 나비는 꽤나 상징적이다. 생명을 경유하고 문명을 지나쳐온 허울이 또 다른 도약을 예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