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2.
신성희, 페인팅으로 페인팅을 넘어서다
김홍희 (경기도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1. 프롤로그
신성희는 다채로운 색채와 풍부한 질감으로 회화적 맥시멀리즘을 창출한 이 시대의 페인터이다. 회화적 맥시멀리즘의 표상이자 그 만의 고유 브랜드인 누아주(nouage, 엮음 페인팅, 일명 매듭 페인팅)는 화가로서 그가 겪어온 회화적 고민과 탐구, 장고의 실험과 진통이 가져온 창조적 결실이자, 페인팅으로 페인팅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의 회화이다.
1971년 홍익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작가활동을 시작할 당시 신성희는 초현실주의적 표현주의 형상화로 국전과 한국미전에 특상, 특선한 재능있는 화가였고,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마대 위에 마대를 그린 극사실적 모노크롬 <회화 Peinture>로 시대적 사조에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양식을 모색했던 진지한 예술가였다. 마대페인팅으로 시작된 그의 조형실험은 1980년 프랑스 이주 이후 고된 여정을 거쳐 대망의 결실을 맺게 된다. 1983-1992년 사이 미리 채색한 판지를 손으로 찢어 화면에 부치는 콜라주 작업 <회화 Peinture> 연작을, 이후 1993-1996년에는 채색한 캔버스를 길이로 잘라 박음질로 이어 붙인 <연속성의 마무리 Solution de Continuite> 연작을 선보인데 이어 1997년 누아주라는 획기적인 양식을 창안하게 되는 것이다.
<결합 Entrelacs>, <공간을 향하여 Vers Un Espace>, <공간별곡 Peinture Spatiale> 등의 시리즈 제목으로 발표된 이 누아주 작품군은 캔버스 색띠를 박음질하는 대신 그림틀에 엮어 그물망을 만드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방법론으로 제작 당시부터 파리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실로 누아주는 프랑스 파리가 그에게 안겨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다. 한국 화단을 떠난 고독한 작가에게 독자적 조형 실험의 기회를 주고 그것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해 준 것이 바로 파리였던 것이다. 작가는 2009년 10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누아주 조형 실험을 심화시키는 한편, 한국, 프랑스, 스위스, 일본, 뉴욕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지며 누아주의 창시자, 한국의 칼라리스트 페인터로서 정평을 얻게 된다.
70년대의 모노크롬 마대 페인팅으로부터 90년대 후반의 칼라풀한 누아주 페인팅으로의 전환, 그 극적인 변화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모노크롬 미니멀 회화에서 맥시멀 포스트미니멀 회화로의 시대적 양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자신의 끊임없는 질문이 가져온 일종의 회화적 결단이었다. 마대 페인팅으로부터 콜라주, 박음질을 거쳐 누아주에 이르는 그의 전 작업 과정은 화면의 평면성, 물감의 물질성, 그림틀의 한계성 등,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의심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탐구로 점철되었다. 다시 말해 회화적 본질에 충실한 모더니즘 회화, 특히 그것의 극단적 양식인 모노크롬 미니멀 회화를 탈피하려는 작가의 탈미니멀 의지가 창의적이면서 혁신적인 누아주 작품 세계를 구축케 하였다는 것이다.
2. 누아주의 혁신
그리기에서 엮기로
누아주는 전술하였듯이 신성희의 탈미니멀 의지가 맥시멀리즘 미학으로 꽃을 피운 창작혼의 결정체이다. 이러한 누아주가 작가의 개인적 성취 이상의 미술사적 작품으로 주목받는 까닭은 모노크롬 미니멀회화 이후의 포스트미니멀 회화의 용례를 마련하는 시의성 때문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누아주, 즉 ‘엮기’로 ‘그리기’를 대신하는 회화적 혁신의 맥락에서이다.
불어의 사전적 의미로 “맺기, 잇기”의 뜻을 갖는 누아주는 신성희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엮는다 또는 묶는다는 제작 방법을 지칭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론이 그리기 또는 재현을 거부한다는 반회화적 함의를 도출하는 점에서 이미 미술용어로 정착된 콜라주에 비견할만하다. 화면에 실제 사물, 현실의 파편을 부착시킨다는 방법적 의미에서 사용된 콜라주가 ‘재현에서 제시로’라는 새로운 반미학적 개념으로 정초되었듯이, 누아주 역시 엮는다는 방법이 반회화적 의미로 확장 생산될 때에 새로운 미술양식, 미학개념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누아주의 반회화적 양상은 캔버스에 무엇을 그리는 대신에 캔버스를 잘라 엮기로 화면을 재구성하는 일종의 해체주의 방법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우선 캔버스 빈화면에 색채 점묘법이나 드리핑 수법으로 서정적이고 추상표현주의적인 필치의 점, 선, 얼룩들을 그려 놓는다. 그리고는 화가의 자발적 붓질을 담은 이 ‘준비된 캔버스’(prepared canvas)를 1-2센티 폭의 가는 색띠로 잘라 놓는다. 처음에는 이 색띠들을 횟대에 줄줄이 묶으며 밑으로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누아주를 시도했으나, 이내 캔버스 프레임을 사용하여 줄들을 사방으로 엮어 씨줄날줄로 바탕을 메우고 그 위에 다시 붓질을 가하는 본격 채색 그물망 작업으로 개진하였다. 작가는 매듭과 사이 구멍들이 어우러져 촉각적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한 겹, 두 겹을 더 묶으면 음영을 생성시키며 볼륨있는 구조물을 탄생시키는 작업과정과 조형효과에 매료되어 누아주 작업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1997년을 전후하여 실험하기 시작한 이 누아주 작업은, 자신이 그린 캔버스를 자신의 손으로 자르고 찢는 파괴의 고통을 보상하듯, 작가에게 놀라운 미학적 발견과 창작의 희열을 안겨주었다. 묶여진 매듭과 사이사이 구멍들로 구성된 그물망 화면은 더 이상 면이 아니라 부조적 입체면으로 존재하고, 통상적으로 회화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바탕면이 작업 자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색띠의 선묘가 면을 만들고 그 면이 부조적 질감을 획득하면서 선, 면, 입체가 공존하는 가운데 누아주는 회화적 조각, 또는 평면을 탈피한 조각적 회화로 존립하며 장르적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회화의 평면성을 파괴하고 화면에 3차원적 질감을 도입한 탈회화적 누아주를 통해 신성희는 콜라주에 버금가는 회화적 혁명을 수행한 것이다.
조각적 회화/회화적 조각
누아주 양식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게 차원적으로 장르적으로 비고정적인 양면가치적 존재양식에 기인한다. 그물망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화면 상단이나 가운데 또는 가장자리 일부를 장식하거나 간에 그의 대부분의 누아주 작업은 그물망 회화이자 질감있는 부조로서 정통 회화와는 다른 비재현적이고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인 사물적 오브제성을 획득하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오브제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품 프레임의 사각을 굴리거나 (<공간적 회화 Peinture Spatiale>, 2000), 색띠를 프레임 밖으로 삐져나오게 하여 (<공간적 회화>, 2000) 캔버스 회화의 사각성과 직선성을 약화시킨다. 역삼각형 (<결합 Entrelacs>, 1998)이나 원형(<소우주 Microcosme>, 1999)같은 변형캔버스에서는 비화화적 오브제성이 더욱 부각된다. 색띠를 3겹으로 엮은 일부 작품들은 그 자체가 입체적 구조물로 호소력을 갖는데, 작가는 한걸음 더나아가 실제 3차원 구조물을 제각하기도 한다. 그림틀을 부셔서 재조립한 수직/수평의 지지체에 철사를 감아 새장 같은 공간적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색띠를 입힌 2000년의 <공간 회화 Peinture Spatiale>는 제목 그대로 회화적 조각이자 조각적 회화이다. 여기서 작가는 캔버스 해체에 이어 프레임 해체를 통해 재창조를 시도한 것이다.
누아주는 색띠의 그물망으로 질감 있는 표면과 현란한 색채의 코디네이션을 일궈내며 조형적 맥시멀리즘을 창출한다. 이러한 효과는 그물망의 비규칙적 짜임새, 즉 손맛을 물씬 풍기는 풍요로운 자유조형으로 더욱 고조된다. 실로 신성희 누아주의 조형적 풍요는 양손으로 당기고 묶는 작가의 마술적 손동작의 유희로부터 비롯된다. 하프나 가야금 연주자와 같이 그는 한 손으로 색띠를 당기고 밀고, 다른 손으로 묶거나 늘어뜨리며 씨줄과 날줄, 구멍과 구멍, 겹과 겹 사이를 누빈다.
붓을 잡은 화가의 손이 물감, 캔버스와 맞닦드려지는 순간 물질적 상상력이 발동하듯이, 신성희의 손이 색띠를 잡는 순간 직감적 결단이 우연적이면서도 제어적인 그물망을 직조하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까지 다 조절할 수 있다. 내 손이 허공 위에서 마디 마디를 직접 결정한다”는 작가 진술이 알려주듯, 작가는 손가락으로 집중과 분산의 에너지를 조절하며 구조적으로 장력있는 팽팽한 표면, 조형적으로 미궁같이 복잡한 색띠의 카오스를 창출한다.
새로운 공간주의
색띠는 작가에게 물질적 재료 이상의 창조적 매체로 기능한다. 캔버스로부터 잘려진 줄들로 다른 종류의 캔버스, 즉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면, 동시에 선이자 면이자 부조로 존재하는 탈차원적 화면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색띠는 말하자면 파괴 후의 재건설, 해체후의 재창조를 일궈내는 창조적 부활의 매체인 것이다. 색띠로 부활된 그물망 누아주는 그것이 바탕면이거나 작품 표면이기 이전에 무수한 색띠 매듭과 그것이 생성하는 빈 구멍들로 존재한다. 실로 누아주를 대변하는 색채와 질감의 맥시멀리즘은 구멍과 매듭의 맥시멀리즘이기도 하다.
볼록한 매듭과 오목한 구멍, 채워진 매듭과 텅빈 구멍의 교차로 구성되는 누아주에서 물질적이고 촉각적인 매듭 만큼 중요한 조형요소가 비물질적이고 비촉각적인 구멍이다. 신성희에게 이 구멍들은 평면적이고 표면적인 화면에의 도전인 동시에 새로운 공간미학을 정립하는 생성적 공간이다. 이미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를 뚫거나 베어내는 방식으로 2차원 화면의 한계를 초극하는 ‘공간주의’ 회화를 제안하였다. 폰타나의 작업이 화면에 대한 공격, 파괴의 흔적으로 존재한다면 신성희의 누아주는 일단 파괴된 캔버스 줄로 빈구멍을 생성시키는 재창조의 맥락에서 차별화된다. 신성희는 그물망 누아주로 화면을 대치할 틈, 공간을 확보하며 폰타나와 다른 새로운 공간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다. <공간을 향하여 Vers Un Espace>, <공간별곡 Peinture Spatiale> 등 공간을 지칭하는 연작 제목들이 시사하듯이, 공간은 그가 창조하고자 하는 최종의 미학적 목표가 된다.
1998년의 <공간을 향하여>에서는 작은 빈 구멍들이 합해져 큰 구멍 하나가 만들어진 듯 그물망 한쪽이 뻥 뚫린 구멍으로 남아 있다. 같은 해의 <공간을 향하여>에서는 태양 또는 우주처럼 크게 뚫린 원형 공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1996년의 <결합>에서는 누아주 그물망이 중앙화면에 원형의 고리를 만든다. 결국 1999년의 <소우주 Microcosm>와 <생명 공간 Espace Vital>에서 작가는 세포 같은 그물구멍이 원형의 우주공간으로 확산되는 진화적 함의를 가시화하듯 누아주 고리로 가장자리를 두른 원형 캔버스를 제작한다. 그의 <소우주>는 거시적 우주에 대한 미시적 소우주이지만 동시에 그물구멍으로부터 진화된 대우주인 것이다.
신성희의 누아주가 창조하는 것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공간, 텅빈 구멍이다. 구멍은 틈, 간극, 여백, 공동, 허의 표상이지만 신성희에게 그것은 창조를 위한 숨통, 호흡, 쉼표, 일단정지로 각인된다. 작가는 공기와 빛이 통하는 구멍, 켜와 켜의 사이 공간으로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며 누아주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누아주는 생명의 그물망이요, 신체와 정신, 손과 작품을 잇는 신경망이자 나와 타자, 작품과 관객,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소통망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성희의 그물 구멍 또는 공간은, 작품 <생명공간>이 암시하듯 결핍이 아니라 충만, 주변이 아니라 중심, 끝이 아니라 시작, 죽음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마대 페인팅: 마대 위에 마대 그리기
1974-82년 사이의 신성희의 초기작 마대 페인팅은 색채, 양식, 개념에서 누아주와 극대조를 이루는 점에서 주목을 환기시킨다. 당시 캔버스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마대 위에 마대의 한올 한올을, 때로는 올이 풀린 실밥까지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군은 <회화>라는 시리즈 제목이 말하듯 그리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회화 작업이다. 그는 마대의 형태는 물론 마대의 음영효과와 재질감을 재현하기 위하여 매 올마다 3회 이상 붓질을 가한다. 직물공의 손노동을 환기시키는 이러한 반복적 붓질로 그려지는 마대 페인팅은 일필휘지의 대담한 추상표현주의 회화나 기계적으로 구성하는 도안적, 기하학적 추상과 다르게 고도의 회화적 기교를 요구한다. 마대 페인팅은 바로 누아주를 가능케 한 신성희의 정교한 손솜씨의 산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화> 연작들에는 이미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 질문과 함께 그리기에 대한 반란이 깃들어 있어 비평적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마대 페인팅에서 작가는 실제 마대 위에 마대 이미지를 재현하면서 바탕과 형상, 배경과 이미지를 동일화하는 동시에 실상과 허상을 대비시키고 이를 통해 그림이 착각, 환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자 했다. 실상과 허상의 대비는 화면 가운데 또는 가장자리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비워둔 여백이나 직선이나 사선형의 공백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회화의 존재론을 부인하고 회화의 역사에 도전하는 것이다.
회화의 역사는 원근법, 투시법, 단축법 등, 평면의 화면 위에 3차원적 입체감과 공간적 깊이를 재현하는 회화적 테크닉의 발명과 맥락을 같이 하며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테크닉에 의거하여 외부세계나 사물의 외양을 모방하는 재현적 형상예술 또는 환영예술은 19세기말 예술의 자율성과 형식성을 중시한 모더니즘 미학의 도래와 함께 위축 되고 추상예술에 미술사의 중심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20세기 이후 무수한 모더니스트 화가들은 화면의 평면성과 물감의 물질성을 강조하며 평면적이고 표면적인 미니멀 추상회화를 창조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1970년대의 한국 화단은 모노크롬 페인팅이라는 한국적 미니멀 회화를 등장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성희는 마대 페인팅으로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면서도 독자적인 자신 고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신성희 마대 페인팅의 동시대성은 한올 한올 반복 되는 마대 패턴의 추상성과 마대의 갈색톤 색상에서 비롯된다. 즉 그의 마대페인팅은 마대의형상화이면서도 섬세한 질감과 균질적 표면이 추상성을 더욱 강조시키는 갈색의 올오버 모노크롬 추상회화였던 것이다. 추상화를 방불케하는 추상적 극사실화로 작가는 추상화 일색의 시대에 부응하는 한편, 형상과 추상, 재현과 제시의 경계를 허무는 자신 고유의 양면가치적 미학을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마대 페인팅의 쟁점은 마대 위에 마대를 그린다는, 즉 평면 위에 평면적 사물을 그린다는 회화적 전략에 깃들어 있다. 미국의 네오다다이스트 재스퍼 존스가 성조기, 과녁, 숫자 등 본질적으로 평면인 대상을 평면의 화면에 재현하였듯, 신성희는 평면으로 존재하는 갈색의 마대를 갈색의 마대 위에 그림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를 그린다는 회화적 딜렘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대 페인팅에서 제시된 회화적 반란, 그리고 그것으로 시작된 누아주의 혁신을 콜라주의 선구자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 콜라주를 레디메이드로 확장시킨 마르셀 뒤샹, 뒤샹의 다다이즘을 계승한 재스퍼 존스의 회화적 고민과 결단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4. 판지 콜라주와 박음질 캔버스: 마대 페인팅과 누아주 사이
마대 페인팅과 누아주 사이의 과도기 작업으로 판지 콜라주와 캔버스 박음질 작업이 등장한다. 전자는 손으로 찢은 판지 조각을 콜라주 수법으로 부쳐 만든 작품군이고, 후자는 길게 자른 캔버스를 재봉틀로 봉합한 박음질 작품군으로 해체 후의 재창조라는 맥락에서 누아주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미니멀 마대 페인팅에서 맥시멀 콜라주로
판지 콜라주는 파리에서 1983년경부터 실험하기 시작한 연작으로 마대 페인팅과 마찬가지로 <회화>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회화로, 여기서는 골판지나 산화 방지 처리된 판지에 색점과 얼룩을 그리고 나서 그것을 손으로 찢어 구기거나 접어 아크릴판에 다시 붙이는 콜라주 작업으로 수행되었다. 페인팅 위에 부분적으로 부착되는 통상적 콜라주와 다르게, 작가는 판지 조각을 화면 전체에 부쳐 새로운 올오버 등가화면 화면을 만든다. 그리고 콜라주된 화면에 다시 붓질을 가해 질감과 색채의 멀티플 층위를 만들며 미니멀 마대 페인팅으로부터 맥시멀 콜라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 콜라주 작업에서부터 작가는 무엇을 그리느냐 보다는 어떻게 그리느냐에 유념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어떻게’와 함께 작가는 마대 페인팅에서 유지했던 재현적 대상을 저버리고 대신 추상세계로 진입한다. 동시에 마대에서 침잠했던 색채를 핵심적 조형요소로 부활시키는 한편, 찢기, 붙이기 등의 비회화적 행위로 평면성의 파기를 시도하고 3차원적 질감을 생성시킨다. 모노크롬 마대에서 결핍되었던 색채와 질감, 그 풍요로운 물질성이 재현을 대체하는 제시물로 등장하며 콜라주의 본래적 의미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1985년에 이르면 아크릴 판이라는 지지체를 배제하고 판지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판지 조각들로만 화면을 구성한다. 찢어낸 판지 조각들로 새로운 판지를 구축하는 이 작품군에서 작가는 지지체와 그림을 일치시키며 누아주가 보여주었던 탈회화적 조형논리를 예시한다. 기채색된 판지를 찢어 콜라주로 재구성할 때 군데 군데 생기는 구멍이 요철면을 만들면서 누아주와 같이 스스로를 부조적 회화 또는 3차원적 오브제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브제성은 1985년이나 1988년의 <회화>가 그 예증이듯이, 짤라진 판지 단면이 만드는 울퉁불퉁한 화면 가장자리에서 더욱 부각된다. 1992년 <회화>는 하단이 삐죽삐죽 잘려나간 반타원형으로, 1989년의<회화>는 티셔츠 모양의 변형화면으로 회화적 사각성을 벗어나는 오브제성을 강조한다.
판지 콜라주는 붓으로 그리기보다는 직접 손으로 찢고 부치는 손놀림으로, 특히 종이라는 유기적인 재료와 화가의 손이 만나 일궈내는 창조적 유희를 통해 마대 페인팅과 다른, 그러나 누아주가 보여주게 될 자유 조형, 열린 구성을 획득한다. 종이와 물감의 물질성과 직접성으로 조형적 맥시멀리즘을 발산시키는 이러한 콜라주 작업에서 마대 페인팅에서 억제되었던, 그러나 누아주에서 만발할 칼라리스트 면모가 발견된다. 한국의 유교적 문화전통, 억제되고 절제된 백의민족적 미학정서와 사뭇 다른 프랑스의 자유스런 문화적 분위기속에서 작가는 색채와 조형의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향한 작가의 내면적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색이 저급하고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던 70년대 한국화단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억압되고 숨겨진 해방적 표현주의 충동의 부활이기도 하다.
박음질로 캔버스로의 복귀
작가는 판지 콜라주를 제작하던 시기에 동일한 방식의 캔버스 콜라주를 병행 제작하였다. 캔버스는 그의 조형 실험의 궁극적 매체로서, 이젤화를 부정하고 떠나려는 욕망만큼 집요하게 그를 붙든 것이 바로 캔버스였다. 회화를 부정하면서 <회화>라는 제목을 고수하듯 그는 캔버스를 조각내 박음질하는 행위로 캔버스에 복귀한 것이다.
캔버스에 대한 집념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1993년에 등장한 박음질 캔버스였다. 콜라주나 누아주에서와 같이 캔버스 바탕면에 색채가 베어들도록 미리 색점과 얼룩들을 그리고, 여기서는 5센티 정도 폭으로 잘라 봉합하듯 재봉틀로 이어 박는다. 이때 박음질 이음새를 겉으로 돌출시키고 그 시접 부분을 커터로 잘라 거친 솔기가 명암을 유발시키도록 하는데, 이와 함께 이 박음질 캔버스는 이전의 콜라주, 이후의 누아주와 같은 부조적 입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연속성의 마무리>라는 이 연작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작품군은 콜라주에서 제기된 탈회화적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박음질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한 시도를 마무리, 완결시킨다.
박음질 캔버스는 입체적 화면, 촉각적 표면이라는 점에서 판지 콜라주의 조형적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손으로 찢어 손가는대로 부치는 콜라주의 무작위적 배열에 비해 여기에서는 정확히 선을 긋고 직선으로 박는 조직적 구성으로 정돈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색채면에서도 박음질 캔버스 경우 채색되지 않은 이면 솔기가 앞으로 노출되면서 한톤 가라앉은 중후한 느낌을 준다. 차후 누아주에서 박음질 캔버스의 직선적 구도가 자유형의 유기적 구도로 전환되고 칼라도 한층 화사하고 풍부해진다. 이렇게 볼때 색채나 구성에서 박음질 캔버스보다는 이전의 판지 콜라주가 누아주의 원형이 된다. 그러나 캔버스 줄을 사용하여 새로운 화면을 만든다는 점에서 박음질 캔버스가 누아주의 선례를 이룬다.
콜라주와 박음질 작업의 두드러진 차이는 전자가 작가의 직감적 결단과 손동작의 유희에 의존했다면, 후자는 캔버스에 채색한 후 자르고, 팽팽히 당기며 박고, 솔기를 자르고, 일으켜 세워 프레임하는 다단계의 공정 과정과 그에 따른 집단 협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실로 신성희는 ‘팩토리’를 방불케하는 협업체제를 가내에 갖고 있다. 미대 출신의 부인, 건축가 아들, 패션 디자이너 딸로 이루어진 이 4인체제 수공업 팩토리는 신성희의 화업의 추동력이 되었다. 가족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작가의 창조적 영감이 구체화되고 제작의 방법론이 모색된다. 전통적으로 가사나 여성 노동으로 폄하되어 온 재봉질이 현대에 들어와 다수의 남녀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제작 수단으로 활용, 원용되고 있지만, 신성희의 경우 가족의 장르별 전문성과 기술적 역량으로 단순히 수단 이상의 재창조의 기제, 또는 창작의 모티프로 등용되면서 박음질 캔버스라는 새로운 결과물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5. 에필로그
콜라주에서 박음질을 거쳐 누아주로 연결되는 신성희 작품세계는 페인팅을 넘어서는 페인팅으로 요약된다. 이는 찢어 붙이고, 잘라 박거나, 손으로 엮어 만드는 비정통적인 제작 행위로 구현된다. 그러나 그는 그리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판지를 찢거나 캔버스를 자르기 이전에 색점과 얼룩을 그리고, 완성된 콜라주 화면이나 박음질 캔버스 또는 누아주 그물망 위에 다시 붓질을 가했다. 작업의 처음과 마지막 과정에서는 틀림없이 붓을 든 것이다.
작가의 붓에 대한 집착은 1999-2000년 사이에 제작된 <붓>, 2000년의 <붓과 시계>등 일련의 드로잉 작업이나, 실제 자신의 붓을 레디메이드로 사용한 <회화로부터>(2003)와 같은 소품 조각에서 명시된다. 그는 붓을 비롯해 그가 작업에 사용하는 칼, 가위, 자, 팔레트, 작업 당시 착용했던 안경, 돋보기, 그밖에 거울, 시계와 같은 일상품, 심지어는 아이들의 장난감까지 그리거나 화면에 부착시켰다. 작가는 틈틈이 이러한 사물들로 소품 조각을 만들고, 때로는 종이나 골판지를 포개 만든 두터운 판지 속을 파내 그것들을 안치시키는 오브제 작품을 제작하였다. 신성희는 오브제 작업과 관련해 “나의 작업에 헌신하였던” 고마운 도구들, 그에 못지않게 정든 생활용품들에게 “나보다 더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집”을 지어준다고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진지하고 단호한 작가정신과 대조되는 훈훈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다.
신성희의 오브제나 소품 작업에 사용되는 일상 사물들은 작가의 인생관이나 예술관을 표출하는 내러티브나 상징의 모티프가 된다. 그가 가장 애호하는 레디메이드의 하나인 거울로 만든 작품 가운데 철사를 구부려 엉켜놓고 중앙에 거울을 부착시킨 <자화상>(2004)이 있다. 거울의 반영원리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거울을 보는 사람이 자화상의 주인이고 그러므로 관객이 작품 <자화상>의 소유자라는 참여와 소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관객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거울은 관객과 작품을 이어주는 끈으로 작용한다.
붙이고 박음질하고 엮는 창작 행위 역시 예술과 삶, 작품과 생활, 작품과 관객, 나와 이웃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끈이자 결합의 기제이다. <연속성의 마무리>라는 그의 박음질 작품은 박음질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박음질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누아주로 연결되어 색띠의 그물망 속에 우리마저 엮는다. 누아주는 신성희 자신의 말 처럼 “참치, 꽁치, 연어, 광어 등” 모든 것을 건져내는 “어부의 그물”에 비견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연하고 수용적인 보자기에 유추될 수 있다. “너와 나, 물질과 정신, 긍정과 부정, 변증의 대립을 통합하는 시각적 언어”로서의 그의 누아주는 작품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원하는 인간 신성희의 인격이자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누아주가 존재하는 한 그도 존재한다. 이것이 신성희가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까닭이다.
강수미
1.Nouage Painting, Shaped Surface
- 신성희의 ‘회화-공간’
Ph. D. 강수미 (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시작하며: 캔버스의 증언
“우리는 입체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갖고 평면에서 태어났다. (...) 작가 신성희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나라의 존재자가 되게 하였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여기서 ‘우리’란, 그림이 그려지는 공간 중 가장 아카데믹하고 일반적인 공간인 ‘캔버스’이다. 그러니 서두에 인용한 말을 다시 번역하면, ‘신성희 작가가 캔버스에 예술의 존재를 부여했다’고 입체가 되기를 꿈꾸는 평면 캔버스가 말했다는 것이다. 한갓 사물에 불과한 캔버스가 이런 말을 했을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을 누구에게 전해 듣는가? 인용구에 호명된 바로 그 사람, “작가 신성희”로부터이다. 그는 2005년 작가 노트에 “캔버스의 증언”이라는 부제를 붙여 이렇게 써놓았다. 그러니 이때 캔버스의 말은 사실, 본인이 ‘회화라는 예술의 나라’에서 성취한 바를 넌지시 자평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지난 2009년 10월 유명을 달리한 故 신성희 작가는 40여 년 동안 일관되게, 그러나 동시에 대략 4번 정도의 커다란 형식적 분절을 만들어내면서 회화 작업을 했다. 그것은 1. 구체적 형상을 재현함으로써 ‘실재와 환영의 관계’를 실험한 단계(1970년대 중후반-80년대 초). 2. 판지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조각낸 후, 다시 하나의 ‘콜라주 그림’으로 재구성한 단계(1980년대). 3. 캔버스 천에 그림을 그린 다음 그것을 일정한 크기의 띠로 잘라내고, 다시 그것을 ‘박음질해서 단일화면’으로 조직한 단계(1990년대). 4. 캔버스 화면을 그림 띠들로 묶고 매듭지어(‘누아주: nouage’) 입체화시킨 단계(2000년대)로 나눌 수 있다. 나는 이 네 단계를 신성희 회화 전체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는 결정적 계기들로 본다. 이를테면 ‘1. 형상 재현의 단계’가 초기에 속하고, ‘2. 콜라주 단계’가 중기에 속하며, ‘3과 4의 단계’를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은 본문에서 하기로 하고, 다시 “캔버스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자.
지인의 기억에 따르면, 신성희 작가는 생의 후반 즈음에 40년의 긴 화력 인생을 함께했던 캔버스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 캔버스에게 생명을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자면 그저 하얗고 평평한 사물에 불과했던 자신들(캔버스들)에게 다차원적인 공간을 만들어주고, 바람을 불어넣어주고, 색을 부여해주고, 형체를 빚어주어 고맙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성희 작가와 캔버스 간의 이 에피소드는 얼핏 주술적 이야기나 물활론(animism)의 한 구절처럼 다소 난센스에 작위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일화가 지시하는 핵심 의미는 깊다. 그것은 비의(the esoteric)와는 달리 논리적으로 명쾌한 현대미술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신화적이기보다는 오랜 시간 ‘회화’라는 특정 장르와 ‘캔버스 및 물감’이라는 특정 질료들을 통해 실행한 한 인간의 예술 실천을 압축하고 있다. 요컨대 그 의미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에서 폰타나(Lucio Fontana)에 이르기까지, 또는 폴락(Jackson Pollock)에서 스텔라(Frank Stella)에 이르기까지, 모더니즘 화가들이 탐색했던 회화 고유의 정체성과 공간 문제이다. 현대미술사에서 그 유명한 ‘세계 재현의 한 방식으로서 회화’와 ‘회화의 이차원 평면성(flatness)’ 문제 말이다. 작가 신성희는 그 이슈를 자신의 회화 작업 이력 전체를 통틀어 일관된 개념으로, 그러나 대략 네 가지 다른 형식적 방법론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가 여기 이 글을 통해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신성희 작가의 그 같은 ‘개념과 형식 실험이 상호작용한 회화 세계’이다.
1. 회화의 형상성: 가시적 환영의 마디를 끊어내고
20세기 초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지지했던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타라부킨(Nikolai Tarabukin)은 「이젤에서 기계로」라는 글에서 “모든 회화적 형식은 자연주의나 인상주의처럼 대상적이든지, 입체파나 미래파처럼 비대상적이든지간에 본질적으로 형상적이다.” 고 썼다. 요컨대 그의 주장은, 회화란 그것이 명시적으로 세계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든, 그 재현의 회로를 벗어나 작가의 관념이나 개념에 따라 수행한 것이든 간에, 형상(figure)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각형 평면이라는 ‘주어진 형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만 떠올려도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 아니다. 즉 사각형이라는 형태 자체가 일정 정도 회화의 형상적 속성을 규정짓는 것이다. 또 타라부킨이 말하는 회화의 근본 특성으로서 형상성은, 우리 감상자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캔버스에서도 어떤 형상적 이미지(figurative images)를 연상하고, 그 연상 작용을 근절시키지 못한다는 사실만 환기해도 충분히 공감할만하다. 그래서 형상성은 한편으로 회화의 고유한 특수성이자, 다른 한편 화가들이 벗어나기 힘든 회화 예술의 속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신성희 회화의 출발점 또한 바로 이 이슈 어디쯤에 있었다고 본다.
1970년대 중후반, 신성희의 작품 중에 일명 ‘마대 위에 마대’ 연작이 있다. 이 작가의 초기작 중에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그 그림들은 올이 굵은 잿빛 마대 천위에, 그 천의 씨실과 날실, 그리고 그 결의 음영을 그대로 모방해 그린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경향과는 달리, 다소 거친 붓 터치로 천의 텍스추어를 따라 그린 그 그림은, 보는 이의 ‘눈을 속이기 위한 그림(trompe l\'oeil)’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목적은 본래의 천과 그 위에 그림으로 재현된 천을 공존시켜, 감상자로 하여금 ‘실재-시각적 환영’ 사이의 미묘한 존재론적 차이, 그러나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시각질서를 의식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사물로서 마대 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마대 천 그림, 그리고 마대 천 그림을 통해서 가시화된 마대 천의 직물구조, 이렇게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시각의 질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동어반복으로서 신성희의 ‘마대 위에 마대’ 그림은, 숙명적으로 형상적 속성을 떼어낼 수 없는 회화에 의도적으로 ‘환영(illusion)’을 강조함으로써, 실제 ‘마대 천’과 ‘마대 천처럼 보이는 것’ 사이의 관계를 문제시한 ‘개념 회화(conceptual painting)’라 봐야 한다.
시각적 눈속임이 아니라, 작가가 회화라는 특정 영역에서 문제시하는 내용을 회화적 실천을 통해서 해결하기. 나는 여기에 신성희 작가의 회화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자 방법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대 위에 가시적 환영의 마대’를 그리던 초기 그림에서부터, ‘콜라주 회화’, ‘박음질 회화’를 거쳐, 그가 마지막 십여 년 동안 매진했던 일명 ‘누아주 회화’에 이르기까지를 꿰는 열쇠라 본다.
2. 콜라주: 그림의 형체를 구성하며
1971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꾸준히 활동하던 신성희는 1980년 도불(渡佛)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약 3년 정도 서구의 미술 현장을 경험하고자 떠났지만, 결국 이때의 출발이 신성희의 대부분 인생과 예술이 형성되고 완결되는 정착점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왜 이때 작가가 한국 화단을 떠날 결심을 했느냐 인데, 지인에 따르면 당시 모노크롬 및 앵포르멜 일색이었던 한국 주류 미술계에서 신성희는 일종의 갑갑함과 더불어 ‘색’을 쓰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색채에 대한 열망’이 그의 중기 회화를 대표하는 콜라주 연작을 낳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작품들에는 빨강, 노랑, 초록색의 다양한 터치가 화면 전체를 커버하고 있는데, 마치 폴락의 액션 페인팅이 그런 것처럼 색채와 붓 자국(brush strokes)이 그림의 표면을 자유롭고 격렬하게 횡단한다. 그런데 나는 이 콜라주 연작에서 색채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림의 형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도불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부터 신성희는 정형화된 캔버스 틀을 버리고, 콜라주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그 작업은 판지에 컬러풀하게 그려둔 그림을 일부러 조각내서, 그 이미지 파편들을 투명 아크릴 판 위에 붙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것이 점차 특별한 지지대 없이 오직 이미지의 조각들을 맞대고 겹치는 콜라주 방식을 통해서 그림을 완성하는 단계로 이행해갔다. 지지대가 사라짐으로써, 그의 그림은 이제 사각형이라는 회화 전통의 제한되고 관례적인 형체를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비정형의 몸체 혹은 형상을 띠며 진화했다. 예컨대 그것은
(1985)에서 보듯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형상을 띠거나, (1989)에서처럼 유기체적 형태로 다양화한 것이다. 어떤 감상자는 후자의 그림에서 선사시대 조각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보여주는 풍만한 여체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신성희의 콜라주 연작들에서는 그림의 표면을 떠받치고 있는 물리적 구조로서의 ‘프레임(frame)’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벽화나 천장화, 거리의 그라피티가 아닌 한, 일반적으로 현대의 그림은 틀의 힘을 빌려 일정한 형태와 크기로 한정된다. 그 틀은 한 장의 사각형 도화지일 수도 있고, 잘 깎은 나무막대를 네모로 댄 것일 수도 있다. 화가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왁구’, ‘샷시(sash)’, ‘패널(panel)’, ‘쉬포르(support)’ 등으로 부르는데, 여러분이 가령 유화작품을 뒤집어 봤을 때 드러나는 십자형 나무 뼈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신성희는 바로 그 그림의 뼈대, 물리적 구조를 매우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림의 최전면, 그러니까 감상자가 바로 ‘그림’이라고 지각하는 가시성의 표면(surface)에 극히 집중했던 것 같다.(일례로 그의 19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 초 작품 중에는 캔버스의 뒷면을 그대로 화면에 모사한 연작이 있다.) 요컨대 초기 신성희는 그림을 떠받치는 비가시적 구조인 프레임을 그림의 가시적 주제로 삼는 시도를 했다면, 중기에는 콜라주 회화의 경우처럼 극도로 프레임을 축소하는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실험의 경우는, 그림에서 지지대 역할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그림의 표면에 입체적인 공간감과 유일무이한 형체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스텔라의 ‘shaped canvas’에 유비해, 신성희의 작업을 ‘형체화된 표면(shaped surface)’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미 1988년 미술평론가 이일은 신성희의 당시 콜라주 그림들이 “자유로운 규격과 형체(形體-shape)에 의해 (이는 아마도 캔버스화에 있어서의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에 버금가는 것일 수 있을 것” 이라며, 그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나는 이일의 평론을 읽기 전에 신성희 회화의 핵심이 ‘표면을 형체화하는 것’이라 가정했음을 밝히고 싶다. 내 사고의 독창성을 강변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그 만큼 이 작가의 그림들이 시대적 한계와 논자의 개별 관점을 넘어, 보는 이들이 비슷하게 떠올리고 함께 공유할만한 미적 경험과 사고를 촉발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신성희의 콜라주 연작은 회화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 특이성, 이를테면 사각형 틀 위에 평평한 표면으로서 그림이라는 관례적 인식과 감각을 깨고, ‘실제 양감과 형태를 갖고 있는 표면’, 그리고 프레임이 단지 획일적 구조로서가 아니라 ‘그림의 유일무이한 형체로서 기능하는 차원’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감상자에게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3. 박음과 매듭: 표면으로 3차원 형태와 공간을 빚어내기
“자, 이제 우리도 저 사물들과 생명체처럼 그림자를 만들자. 허상의 그림이 아닌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 회화의 옷을 입고 빛 앞에 서자.”
어린 시절 우리가 믿었던 것처럼 유령은 그림자가 없다. 반대로 실체만이 그림자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이미지(image)는 ‘유령, 모조, 가짜, 허상’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유래했다. 요컨대 이미지는 그 태생에서부터 ‘유령의 속성’을 부가 받았으며, 실재보다 열등한 ‘허상’으로 정의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위에 인용한 신성희의 작가노트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해석하자면, 작가는 이차원 평면 회화의 이미지를 ‘우리’ 또는 ‘허상의 그림’으로 지칭하면서, 이제 그것들이 ‘사물과 생명체처럼 그림자’와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이 노트는 앞으로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성희 자신이 2000년대 들어서 본격화한 ‘누아주’ 회화의 성과를 보고한 것이다. 이 시기 작품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의 표면이 3차원 형태를 갖고, 3차원 공간을 확보하면서, 그 스스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하나의 오브제(object)가 됐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들인가? 예컨대 <공간별곡>(2000)을 통해 설명해보자. 이 작품은 일견 사각형 캔버스에서 화면의 1/5 하단을 여백처리하고, 그 윗부분에는 다채로운 색선으로 추상을 시도한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단의 여백은 캔버스 천 그 자체이고, 그 면에서부터 뻗어나간 천 자락들과 다른 캔버스 천에 그린 그림의 자락들이 묶이고 매듭지어지면서 입체 공간이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 입체 공간이 나머지 4/5 화면을 풍부한 공간감과 깊이, 다양한 질감의 세계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공간별곡>은 평면에서 입체로 그림이 이행해간 순간을 보여주고 있으며, 묶음 또는 매듭이 평평한 표면을 볼륨과 그림자를 가진 입체공간으로 변모시키는(transform) 상황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공간별곡> 시리즈만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 <평면의 진동>이나 <소우주> 시리즈가 모두 이 같이 그림 자락들을 화면 위에서 묶거나 매듭을 짓는 기법을 통해 구현됐다. 앞서 어딘가에서 밝혔듯, 여기서의 묶음 또는 매듭을 불어로는 ‘누아주’라 한다. 그리고 신성희는 이 기법을 통해 ‘공간을 소유한 회화’ 또는 ‘입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실현한 회화’인 누아주 그림들을 만들어냈다. 작가 본인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신성희는 앞서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해둔 주장들을 작가 노트에 썼던 것이다.
그런데 누아주 회화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이전 단계에서 했던 작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 집중적으로 했던 연작이 바로 그것인데, 앞서 나는 이 시기를 신성희 작업의 3 단계로 분류하고, ‘박음질한 회화’로 명명했다. ‘연속성의 마무리’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시기 연작들은 방법적으로 설명하면, 캔버스 천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들을 1~3cm 넓이로 길게 잘라 일종의 수많은 그림 띠로 분해한 후 다시 그 조각 띠들을 바느질로 누벼서 하나의 화면으로 만든 그림이다. 유추컨대, 작가는 연속성이란, 분리 불가능하고 유일성을 가진 하나가 아니라, 불연속하는 여러 부분들과 이질적인 파편들의 조화 또는 종합의 시도라 생각한 것 같다. 이는 철학에서 전체성과 부분, 보편과 일반, 유일무이성과 다수, 연속과 불연속, 단일성과 이질성의 위계적 관계를 논쟁할 수 있는 중요한 테마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신성희 작가가 이 문제를 시각예술 작품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그림에 3차원 공간과 그림자를 주고자 하는 작가의 면모에서 이미 예측할 수 있듯이, 신성희는 이미지를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간주하는 관습적 사고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그런 시대착오적 회화 개념과 창작 습관에 기대거나 안주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오히려 분명히 화가에게 가장 소중할 수 있는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해체하고, 그 해체한 부분들을 바느질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통해 그림의 2차원 정체성과 이미지의 속성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시된 그림은 예컨대 (1994)에서 보듯이, 거칠게 잘린 캔버스 천의 솔기들과 다양한 색채가 조우하면서 현기증 나는 가시성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또는 그 솔기들 밑으로 떨어지는 미세한 그림자와 그 솔기들이 그림을 횡단하면서 만들어내는 직선이 동기화하면서(synchronize) 역동적 화면을 건축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공간의 전개, 화면의 건축이야말로 이후 신성희 작가의 후기 대표작인 ‘누아주 회화’를 결정지은 창작 메커니즘이라 단언한다. 왜냐하면 이차원 평면의 단일 공간이 그림 띠로 잘리고 해체되면서 스스로를 열었던 덕분에 나중의 묶고 매듭지어지는 그림이 가능할 수 있었고, 화면 위로 미세하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박음질 선으로부터 캔버스 전체를 입체 공간으로 만드는 <공간별곡>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스꼬(Gilbert Lascault)는 신성희의 에서 “연속성의 마무리란 계속성의 중단, 분리, 절단, 틈, 균열, 사이, 금을 말한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나는 이때 그의 작품이 계속성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었다기보다는, 중단과 분리를 넘어 조화와 통합의 ‘다차원적 회화-공간’으로 나아가려는 도정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마치며: 그림이라는 존재, 또는 그림이라는 존재자
캔버스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그 캔버스에 생명(자체의 공간)을 부여하고자 한 화가. 회화에 이질성을 도입함으로써, 오히려 회화의 정체성을 극대화하고자 한 모더니스트. 그림의 환영성(illusionism)을 드러내어, 반대로 그림이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하거나 대리될 수 없는 독자적인 실재(the real)임을 공식화하고자 한 개념적 작가. 신성희 작가의 40년 미술세계와 수많은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내가 발견한 이 작가의 가장 주목할 부분이자 그의 예술이 가진 본질적 힘은 이와 같다.
신성희의 그림들은 이를테면 작가 자신이 노트에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회화 세계 안에서 ‘존재’를 획득했고, ‘존재자’로 남았다. 이때 존재는 이제까지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환영에 대한 메타 환영으로 출발해서, 조각난 그림들의 접붙임과 그림 띠의 박음질을 거쳐, 묶음과 매듭으로 질적 변화(trans-quality)를 겪었다. 또 이때 존재자는 모방적 그림에서 시작해, 콜라주와 박음질 회화를 관통하고, 누아주 회화에 도달하면서 형식적 변화(trans-form)를 다양하게 전개했다. 이 두 변화는 일견 개별적으로 나뉜 듯 보이는 작가의 네 단계(앞선 서두에 내가 임의로 분별했던 그 단계들)가 실제로는 연속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해서, 그 연속은 ‘불연속 속에서의 연속성’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신성희 작가가 이미 90년대 작품 제목이었던 으로 자기 예술의 특수성을 정의해 놓았다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요컨대 이 작가는 자신이 ‘회화의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매번 새롭게 실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