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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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의 근작 개인전을 앞두고 그의 평창동 작업실을 방문했다. 8순의 예술가는 유난히 건강해 보였다. 그의 작품 앞에 서니, 왠지 알 수 없는 기운이 생생하게 솟구쳤다. 1000호에 이르는 대작 등 전시를 막 앞둔 작품 한 점 한 점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는 막연하게 노화가의 새로운 작품 변화, 지속 속의 변화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김창열이 물방울 그림을 세상에 처음 내놓은 것은 1973년.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물방울 그림은 꾸준히 양식화의 길을 걸어 왔다. 무엇보다 물방울이 맺혀 있는 표면, 요컨대 지지대의 시대적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그는 처음에 캔버스 마대에서 출발해, 점차 신문지 모래 나무판 등 다양한 재료를 끌어들였다. 1990년대 이후 〈회귀〉 시리즈부터는 한자(漢字)를 그린 캔버스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지대의 변화에 따라 물방울은 실로 ‘천(千)의 얼굴’을 드러낸다. 홀로 당당히 맺혀 빛나는 자태를 뽐내고 있는가 하면, 가족처럼 무리를 지어 방울방울 매달려 있기도 하고, 방울져 있다가 이제 막 탁 터진 듯하고, 때로는 터져 흐르다 그대로 얼어붙은 것 같은 모양도 있다. 물방울 그림은 모두가 곧 사라질 듯한 찰나를 붙잡고 있다. 존재와 부재, 허(虛)와 실(實)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 짜릿한 긴장….
마침내 근작의 변화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변화는 한자가 새겨진 바탕 화면에 물감을 흩뿌린 자국이다. 작품에는 물방울이 터진 자국처럼 일종의 드리핑 기법이 도입되어 있다. 그리하여 물감은 서로 엉키고 엉켜 있으며, 때로는 물감이 캔버스 피부를 살짝 침투해 들어간다. 선염 기법의 응용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일궈낸 저 표면과 한자와의 조합은 마치 비석의 표면 같은 형상을 떠올린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어 온 비석 위에 번져 있는 이끼 같은 시간의 흔적이 영롱한 물방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간의 흔적 구석구석에 유난히 따스한 온기가 흐른다. 근년에 들어 김창열의 그림은 온화한 갈색 톤이 부쩍 늘어났다. 물방울과 지지대의 부드러운 동화, 충돌 없는 화해, 부분과 전체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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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심은 마땅히 물방울에 쏠려 있다. 김창열의 화면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물방울이다. 그는 참으로 고집스레 물방울을 그려 왔다. “물방울의 의미가 참 다양하지요?” 나는 혼자 입 안에서 말을 굴렸는데, 김창열 화백이 바로 되받았다. “나도 그때그때 물방울의 의미를 다르게 말했지.” 그런데, 이 말이 그 날 김창열 화백과 주고받은 작품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는 마냥 내 이야기를 아무른 코멘트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혹 그의 물방울의 의미가 또 다시 변하고 있는가. 오늘, 이 시간의 물방울은 또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이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이후, 여러 비평가들의 ‘물방울론(論)’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이를테면 구상/추상, 재현/개념, 동양/서양 등의 대립적 논제를 오가는 수많은 비평들에서 물방울의 의미가 드러난 바 있다. 기실 김창열의 작품은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모두의 해석이 두루 통하는 그림이다.(이러한 풍부한 해석의 폭은 분명 김창열 예술의 독자적 매력이다.) 그럼에도 김창열 작품의 비평은 대체로 서구 모더니즘의 지각주의 혹은 형식주의에 기초한 논거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게 사실이다. 그것은 김창열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미술의 세계화 혹은 서구화 과정에서 거쳐야 할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미술평론가 유진상이 적절하게 요약했듯이, 김창열의 물방울이란 (1)대상과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자 (2)전체와 개별자 사이에서 일종의 상징적 질서 혹은 배치를 이루어내는 계기 (3)서구 재현미술의 완결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동양의 미학적 태도로 재해석하고 고양하는 일종의 주석(註釋)으로 간주된다.
나는 김창열의 작품, 저 물방울의 의미를 앞의 형식적 비평의 입장보다는 작가의 삶을 둘러싼 정황적 비평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20세기의 한국을 살아온 동년배의 예술가들, 그 질곡의 삶의 체험에 녹아 흐르는 물방울의 의미를 찾고 싶은 것이다. 물방울이란 형태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또 그 물방울이 한국(혹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규명해 보는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창열은 해방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 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체험하면서 수차례 사선(死線)을 넘었던 세대다. 이러한 역사를 껴안고 그는 1960년대 앵포르멜 운동에 동참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상흔〉,〈제사(祭祀)〉등과 같은 앵포르멜 작품에서는 어두운 화면과 거친 마티에르를 통해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깊은 상흔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회적이라고 했지만, 실상 당시 김창열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찌그러진 희미한 인간 형상이나 총에 맞아 쓰러진 주검 위의 탄흔 같은 흔적을 그려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도 “앵포르멜 작품은 총에 맞은 인간의 육체, 탱크에 무참히 짓밟힌 인간 군상을 상징적으로 그리려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요컨대 이 시기 김창열의 작품은 전쟁으로 죽어간 넋을 달래는 엄숙한 제사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체류 시절의 〈구성〉 시리즈에는 일종의 알이나 구(球), 핵 같은 형상이 등장한다. 이후 1970년대의〈현상〉 시리즈에서 그는 앵포르멜의 ‘뜨거운 추상’을 넘어 기하학적 추상으로 경도되는 가운데, 구멍이나 갈라진 틈새 사이로 삐죽삐죽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이미지를 그려냈다. 흘러내리던 액체는 하나의 둥근 덩어리로 진화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난 일〉(1972)에서는 하나의 물방울 형태를 띠면서도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호한 하나의 투명한 결정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을 탄생시킨다. 이것이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의 전사(前史)다. 저 영롱한 물방울이 맺히기까지 김창열 작품에는 언제나 자신(한국인)이 겪었던 역사의 트라우마가 선명하게 깔려 있었다.
김창열은 물방울 그림으로 마침내 성공의 길을 걸었다. 그는 달마대사의 득도해탈(得道解脫)의 길처럼 오직 물방울 그리기로 오늘에 이르렀다. 화가 김창열은 모든 상처와 고통으로 점철된 트라우마를 물방울 속에 용해시켜, 분노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리는 평안과 평화의 세계를 이룩해냈다. 물방울은 어두운 트라우마를 씻어내고 새로운 빛으로 이끄는 정화(카타르시스)의 세계다. 그는 말한 바 있다. “마치 스님이 염불을 외듯 나는 물방울을 그린다.” 여러 연구자들은 김창열의 그림 세계를 선 불교나 도가 등 동양사상과 결부시킨 바 있다. 그래서 김창열을 자주 ‘구도자’에 비유하곤 한다. 곧 스러질 듯한 찰나의 물방울을 영원 속에 잡아두는 일. 이것이 바로 공(空)의 세계, 무(無)의 세계가 아닌가.
3
나는 ‘물방울’이란 단어에 새삼 주목해 본다. ‘물방울’은 ‘물+방울’이라는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방울’이란 ‘작고 둥글게 맺힌 액체 덩어리’다. 그리고 이 방울은 ‘방+울’이라는 음절로 또 다시 분해할 수 있다. 방은 ‘방(房)’이요, 울은 ‘울타리’ 혹은 ‘비어 있고 위가 트인 물건의 가장자리를 둘러싼 부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물방울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부터 ‘물로 울타리를 친 하나의 투명한 방(세계)’이다. 요컨대 이것을 더 확대하면, 물방울은 그 자체가 하나하나 열려 있는 우주적 단자(單子, Monad)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자란 그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이를테면 수화 김환기의 〈점화〉에서 드러나는 점 하나하나의 단자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김창열이 그린 물방울 하나하나는 작은 우주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저 다채로운 표정의 물방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물방울 저마다는 우리들 기억의 저장고로부터 아련한 추억을 불러내는 따뜻한 정감을 품고 있다. 물방울은 우리를 또 다른 시공간과의 만남, 그 시간의 여백으로 끝임 없이 밀어 넣는다. 어린시절의 티 없이 맑은 마음 같은 개인의 소사(小事)에서부터 희로애락의 눈물 등 한국 역사의 저변을 유유히 흐르는 집단적 기억에 이르기까지…. 화가 김창열은 이 모든 사상(事象)의 단자를 저 투명한 물방울 속에 한꺼번에 녹인다.
나는 이쯤에서 김창열의 물방울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본다. 물방울을 죽은 이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극락왕생을 비는 씻김굿 같은 의미로, 또는 인간사의 죄악을 씻는 세례(洗禮) 같은 의미로 말이다. 요컨대 김창열의 물방울을 정화수요 성수(聖水)로 확대 해석해 보는 것이다. 다시 저 영롱한 물방울 보라! 김창열의 물방울에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의 빛줄기가 흠뻑 젖어 있다. 그 투명한 빛줄기가 오늘도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