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진
1. 두 풍류인, 정상에서 만나다.
한국화단의 두 대가가 한 작품으로 만났다. 분청사기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도예가 윤광조와 생명력 넘치는 화려한 야생화를 통해 독자적 양식을 구축한 인기절정의 원로화가 김종학, 얼핏 보기에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개성 있는 두 대가가 자신을 낮추고 공동작품을 제작했다. 도예가 윤광조가 흙으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김종학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형식의 도화전이다.
화풍과 분야가 다른 이들 두 작가의 공통점은 속세를 떠나 인적이 드문 산에서 생활하며 작업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1979년에 서울을 떠나 30년간 자연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김종학은 강원도 속초에 있는 설악산 밑에 거처를 정했고, 윤광조는 경기도 광주를 거쳐 1994년부터 경주 도덕산 중턱에서 생활해오고 있다. 나름의 자연관과 신념 없이 외롭고 불편한 산속 생활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30년간 야생의 풍광에 젖어 살면서도 최근 이들의 속세에서의 활동은 눈부시다. 흙으로 산중일기를 써내려가는 윤광조는 미국 필라델피아뮤지엄과 시애틀뮤지엄 등 세계굴지의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고,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는 등 한국 도예가로서 국내외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설악산의 정기와 풍광을 붓으로 노래한 김종학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활달하고 격정적인 필치로 생존한 한국 작가 중에서 가장 대중들의 사랑과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로 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모두 자신들이 기거하는 자연풍광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의 댓가를 충분히 얻고 있는 듯하다.
산에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조직이나 규율이 없다. 오직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오묘한 질서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 만든 조직과 규율은 언제나 거시적이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다. 거기에 입안자의 정치적 야망과 욕심이 더해져 개인의 자유와 인간 본연의 본능을 억압하고 짓누른다. 오늘날 현대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희생을 강요하여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면, 자연은 모든 개체들의 개성과 자유를 보존하며 상생을 통한 질서를 유지한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의 법도는 매우 유동적이고 역동적이어서 얼핏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고도의 질서체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법도가 자연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두 작가가 산 생활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러한 자연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정치와 예술은 상반된 논리를 갖고 있다. 정치는 조직과 인적 관계망이 생명이지만, 예술은 그러한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관계망이 끊기는 고독한 순간 시작된다. 이 두 작가는 예술은 고독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고독해지면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본질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자연은 그 상태가 되어야만 스스로의 문을 열어준다. 정치논리로 예술을 하려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요즘 미술 판에서 이 두 작가들의 존재는 하나의 모범이 되고 있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고 풍류를 즐기는 이들의 생활과 정신은 장욱진 선생과 무관하지 않다. 이 두 작가는 모두 장욱진과 인연이 깊다. 김종학은 서울대학교에 다닐 때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장욱진 선생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고, 윤광조는 1978년 장욱진 선생과 현대화랑에서 도화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장욱진은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세속적 지위를 버리고 덕소, 수안보, 용인 등지를 떠돌며 고독하게 자연인으로 생활했다. 조선시대 선비 같은 여유와 낭만, 그리고 어린이 같은 천진함과 해학을 지녔던 장욱진은 오직 술과 그림으로 평생을 기인처럼 살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과거에 종종 볼 수 있었던 이런 예술가 상은 지금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한국 미술계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보다는 국제화에 동조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양문화가 무분별하게 혼용되어 있어서 이제 무엇이 우리 것이고 무엇이 유입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분별력조차 상실한 듯하다.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한국성의 문제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관심이 있다하더라도 접근할 방법이 쉽지 않다. 슬픈 현실이지만 한국의 미술대학에는 한국미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고, 중국미학을 한국미학으로 혼동하기도 한다. 또 고유섭, 최순우 같은 분들이 작고한 이후 한국미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는 이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에서 윤광조와 김종학은 한국적 전통과 미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연구 가치를 있다.
2. 풍류미학은 이어진다.
장르와 화풍이 다른 이 두 작가를 관류하는 한국적 미의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민족의 유전자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풍류정신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우아하게 삶을 즐길 줄 아는 멋스러운 정취이다. 우리민족은 옛날부터 계절 따라 물 좋고 산 좋은 경관을 찾아다니며 술과 가무를 즐기고 자연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한국인처럼 노래를 잘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민족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인들이 골프를 잘하는 이유도 자연친화적인 운동인 골프와 한국인의 풍류적 체질이 잘 맞기 때문이다.
풍류는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고 그냥 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과 집착에서 생긴 심신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자연의 기운과 리듬에 조화시켜 다스리는 행위이다. 그럼으로써 사사로운 인간사의 고통과 아집에서 벗어나 흥겹고 현묘(玄妙)한 자연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풍류는 종교에 우선하는 인간 본연의 본능인 민(民)이고 도(道)이다.
일찍이 신라시대 최치원은 중국에서 18년간 학문을 익히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중국인들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유교, 불교, 도교가 하나 되지 못하는 폐단을 발견하고 신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난랑비 서문에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이 풍류다. 그것은 유․불․선 3교를 아울러 포괄하고 있고, 인간 뿐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까지 우주만물을 가까이 사귀어서 감화시키고 변화시킨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包含三敎, 接化群生)”라고 적었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나 중국에서 시작한 유교나 도교가 동양사상의 핵심처럼 받들어지지만, 그것이 곧 한국사상이라고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최치원은 이러한 삼교가 나오기 이전에 우리민족의 유전자에 면면이 이어져 오는 정신을 풍류라고 보았고, 이것은 삼교를 포함하면서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적 정체성과 미의식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풍류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면서도 단일민족으로 오천년의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지켜올 수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화랑도(花郞道)정신은 바로 풍류사상을 근간으로 한 것이고, 이러한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한국적 선비정신을 낳게 했다. 또 이것은 예술적으로 범자연주의 미의식을 형성하였고, 예술가들에 의해 독자적인 조형과 가락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풍류인은 각박한 세속적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순수한 상태로 복원하고자 한다. 이것이 진정한 ‘민(民)’의 개념이다. 민중은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 지성과 이데올로기로 물들기 이전의 순수한 인간을 의미한다. 한국의 민화(民畵)와 민예(民藝)는 그러한 천진한 민의 상태에서 제작한 것들이고, 한국 작가들이 나아가고자 했던 낭만의 고향이 바로 거기에 있다. 식물 같은 인간들의 선하고 무심한 삶을 그린 박수근의 작품이나 동물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이중섭의 가족도, 그리고 해와 달, 새와 인간이 천진난만하게 어우러진 장욱진의 작품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의 민(民)의 상태를 양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민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서구인들처럼 자연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자연의 삼라만상과 교류하고 교감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서구인들처럼 거만한 눈으로 자연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샤만처럼 자연의 영(靈)과 교감하고 외형 안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자연의 리듬을 몸으로 체득하여햐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리듬을 자연의 리듬에 일치시켜 인간적 욕심을 정화하고 승화시켜야 한다. 모든 삼라만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동화되어 즐거운 어울림을 만들고자 하는 심성이야말로 한국미학의 정수이고 이는 풍류심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현묘한 질서를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사람을 놀래게 하고 경이롭게 만드는 ‘예술(藝術)’이 아니라 전인적 인간의 길을 인도하는 ‘예도(藝道)’이다.
3. 윤광조, 흙으로 빚은 바람
도자예술은 본래 풍류적 소양을 강하게 요구한다. 한국이 도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도예의 재료인 흙은 다른 매체에 비해 자기 소리가 강해서 마냥 수동적이지 않다. 도예는 인간의 기술과 의지만으로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흙이 말라가는 과정을 무시하고 불의 적당한 온도를 맞춰주지 않으면 틀어지고 깨져버린다. 도공은 필연적으로 흙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은밀한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겸허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흙과 연애하듯이 교감을 나누어야 흙의 변덕을 다스릴 수가 있다. 또 아주 작은 변화에 의해 예키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논리적 계산으로 측정될 수 없는 고도의 감(感)이 요구된다.
자연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윤광조는 특히 고려 말 조선 초에 등장한 분청사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분청사기는 민(民)의 소박한 심성과 자연과의 교감이 가장 활발하게 드러난 도자기로 숙달된 기교보다는 형식에서 벗어난 자유와 파격이 특징이다. 청자는 신비한 비취색과 세련된 형태를 추구하려는 도공의 의지가 강하고, 백자는 절제와 격조 있는 비움의 미학을 통해 선비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분청사기는 인간과 자연의 흥겨운 어울림에서 오는 자유분방한 흥(興)을 드러낸다. 윤광조는 체질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강한 청자나 절제를 요구하는 백자보다 자유분방한 흥을 중시하는 분청사기가 잘 어울리는 작가이다.
사람을 통해 나오는 작품이 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술을 즐기는 윤광조는 언제나 삶을 관조하고 유쾌한 해학과 번쩍이는 눈매에 날카로운 혜안이 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짓궂은 장난기가 넘친다. 그래서 그와 같이 있노라면 언제나 유쾌한 심오함을 느낀다. 그의 마음속에는 숨기고 은폐되어 있는 상처나 응어리가 전혀 없어 보인다. 피해의식이 없어 언제나 당당하고,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이 관조하고 낄낄거리며 속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 속마음이 세속인에 비해 그리 깨끗하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그는 그것을 감추고 숨기려 하지 않고 들여다보며 흥을 만들어낸다. 사실 자연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렇게 거룩하고 심각하지 않다. 옆으로 걸어가는 게의 모습이나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타조, 엉덩이에 부채를 단 것 같은 공작, 껌벅거리는 소의 단순한 눈매, 자연은 알고 보면 잔잔한 해학으로 넘치는 곳이다.
하얀 머리를 뒤로 묶어 도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윤광조는 자상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많아 매우 인간적이다. 그는 장자의 자유로움을 따르고 있으나 세세한 인간사를 초월하지 않고, 붓다의 불심을 따르고 있으나 불교의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공자의 선비정신이 있는 것 같으나 거룩하고 권위적인 격식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다. 어느 때면 도인의 경지가 느껴지지만, 아마도 그렇게 솔직하고 철이 없어 보이고 폼 잡지 않는 도인은 한국에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종교를 포용하면서도 종교라는 형식 이전의 순수한 인간의 도를 인간적으로 드러내는 진정한 풍류인이다.
이런 한국 특유의 민성(民性)으로 제작한 작품은 중국 도자처럼 과장됨이 없고, 일본 도자처럼 여리고 답답하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매우 치밀하고 섬세함이 있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투박하게 흩트리는 여유와 파격이 있다. 격(格)은 언제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서 파괴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것도 붙잡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 이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길이고 풍류 미학의 정수이다.
그가 거주하며 작업하는 곳은 바람이 세서 바람골이라 불리는 곳인데, 얼마 전까지 인터넷과 핸드폰이 되지 않았던 외진 곳이다. 도저히 사람이 살기 힘들 것 같은 그곳에 그는 손수 집을 짓고 조수도 없이 홀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사방팔방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그는 해와 달이 연출하는 낮과 밤의 풍광과 사계절의 오묘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교감하며 그 감동을 흙으로 빚는다. 언어화할 수 없는 대자연의 미묘한 기운이 작가의 오감을 통해 준비 된 텅 빈 마음에 채워지면 손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렇게 탄생된 그의 작품은 촉각으로 스며든 바람골의 대기와 바람, 그리고 눈으로 마신 도덕산의 산세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의 크지 않은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것이 단순한 조형이 아니라, 거기에 작가 특유의 풍류심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우리 민족의 미의식이 밀도 있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4. 김종학, 바람이 꽃이 되어
30년째 설악산에 거주하여 설악산 작가로 알려진 김종학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잘나가는 작가였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미대와 미국 프렛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하여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고, 젊은 시절 윤명로, 김봉태 등과 반(反)국전 운동을 벌이며 전위적인 현대미술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그는 삶의 심한 풍파를 만나 부인과 헤어지고 나이 40 초반에 도피하다시피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선배, 동료, 비평가 등 주변을 의식하며 살다가 설악산에 들어가면서 자연과의 진솔한 만남이 시작되었고, 도시사람 김종학은 순수한 풍류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실의에 빠져 맹수처럼 설악산을 돌아다니고, 절벽에서 생을 접을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때 주변에 무심히 피어있는 할미꽃을 바라보며 그는 마음을 되잡았다. 그 곱고 아름다운 꽃망울은 거친 야생에서 세찬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우고 핀 것이 아닌가. 사실 식물도 비바람의 시련을 겪지만 인간처럼 스스로를 한탄하고 절망하여 깊은 감정의 나락으로 빠지지는 않는다. 식물은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 관계를 맺으며 적응할 뿐이다.
한국 예술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 의존함으로써 인생의 난관과 좌절을 승화시키고자 했다. 심청전 같은 판소리를 보면, 인간의 의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극적인 한(限)의 상황이 설정되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이 자의식이 제로가 되면 진공의 순간이 오고 한의 응어리가 액화상태로 변하면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무심의 상태에서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김으로써 슬픔과 기쁨이라는 분별을 갖기 이전의 상태에 도달하고 감정의 제로상태에서 진정한 자연의 리듬을 만나게 한 것이다.
김종학이 젊은 나이에 겪은 삶의 상처와 애환은 이처럼 자연을 만나 치유되었고,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설악의 무성한 나무와 폭포, 꽃들은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삶의 모진 바람은 작품에서 신바람으로 변하여 거친 터치와 화려한 오색으로 뿜어져 나왔다. 호박꽃, 나팔꽃, 산수유, 엉겅퀴, 야생에 만발한 이런저런 꽃들은 강렬한 태양 아래 자태를 드러내고 이름 모를 새들과 나비, 벌레 등과 어우러지는 화면은 축제의 장이다. 그의 작품은 결과로서 당연한 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송이 꽃이 피기 위해서 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풀벌레와 땅 속의 미생물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의 기운과 호흡을 나누면서 변해가는 자연의 세계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인간적 좌절을 자연의 리듬으로 승화시킨 한(限)의 미학이다.
그의 작품은 설악산을 돌아다니며 자연과 눈이 맞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잭슨 폴록이 술에 취하여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면, 김종학은 자연에 취하여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계산해서 나오는 그림이 아니라 자연에 취해서 이성을 잃고 그린 그림이다. 그는 술 마시듯이 자연을 마시고 자연에 흠뻑 취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취기가 감돌고 울림이 있다. 냇물의 흐름, 나무와 꽃, 나비와 풀벌레 사이에 흐르는 자연의 울림을 기운생동 하는 일필의 필력으로 잡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문인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환기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색채의 풍요로움을 포기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드러낸다. 그는 현대미술의 거창한 담론보다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솔한 감정을 존중하고, 구속 없는 자연의 도움을 얻어 인간 본연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
이러한 한국인 특유의 정서는 그가 좋아하는 조선시대 반닫이며 사방탁자, 그리고 옛 여인네의 자수에서 얻은 듯하다. 그는 한국 전통 민예품이 지니고 있는 고졸하고 질박한 느낌을 읽어내는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다. 김환기나 도상봉 같은 작가들이 조선시대 백자에서 미감을 얻었다면, 김종학은 목기와 민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 실제 그는 목돈만 생기면 목기와 민속품을 수집했고, 애지중지 모아온 일급 목기 3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전통 민예품의 정서와 설악산의 자연이 만나 탄생된 결과물이다.
5. 도화(陶畵), 바람과 꽃이 만나
이번 두 작가의 도화합작전은 설악산에 사는 김종학 화백이 스케치 한 것을 가지고 경주 도덕산 바람골에 사는 윤광조의 작업실에 와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번 전시회는 산에서 산을 오간 두 풍류인들이 1년 반 동안 작업한 결과물들을 보여준다. 윤광조가 도판에 화장토를 발라 밑 작업을 하고 나면, 김종학이 쇠못이나 대꼬챙이 같은 것으로 도판 위에 드로잉을 하거나 부조로 붙이는 방식이다.
이상적인 합작전은 각각 자신의 개성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상보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평소 화통하면서 섬세하고 자상한 윤광조와 달리 김종학은 과묵하면서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번 합작전은 여성적인 기질의 윤광조와 남성적인 기질의 김종학이 흙과 드로잉으로 만나 꽤 괜찮은 궁합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만남은 자유분방한 분청사기와 솔직하고 꾸밈없는 민화의 만남이자, 경주의 바람과 설악산의 꽃이 만나는 장(場)이기도 하다. 이러한 만남에 의해 개성적 주체는 하나로 어우러지고 서로 상생하는 ‘접화군생’의 세계를 이룬다.
수동적인 캔버스와 달리 마르는 과정에 맞추어야 하는 흙 작업은 그리기가 까다롭기 때문에 흙 작업을 처음 하는 김종학이 더 긴장하고 흥미로웠을 것이다. 색채화가인 김종학은 이 뜻 깊은 만남을 위해 자신의 장기인 색채를 버리고 처음 대하는 흙과 진지한 만남에 충실했다. 캔버스에서 하던 숙달된 필치가 위축되고 조심스러워졌지만, 기교 없는 어수룩한 표현은 오히려 소박하고 천진한 민화의 정신성을 부각시켜주었다. 결과적으로 분청사기의 파격적인 자유분방함과 민화의 소박하고 천진난만함이 어우러져 매우 한국적인 도화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섭리와 민성(民性)에 도달한 인간의 소박한 꿈이 어우러진 인간화된 자연을 보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중국 도자기처럼 불후의 걸작을 위한 인간의 초인적 의지 대신에 미와 추를 구분하기 이전의 순수하고 무심한 마음이 있다. 일본 도자기처럼 화려하고 정교하지는 않지만, 지성을 넘어서는 따스한 온기와 본능의 힘이 있다. 또 서구 미술처럼 자극적이고 경탄할 만한 무엇은 없지만, 고요하고 편안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유쾌하고 해맑은 마음을 들게 한다. 이것이 바로 잊혀져 가는 한국적 풍류미학의 정수가 아닐까.
김형국
1.
불가는 사람들이 서로 소매를 스치는 일도 억겁(億劫)의 인연이라 했다. 인연을 말하자면 중국의 발상법이 훨씬 인간적이다. “동료는 전생 3세에 걸친 친척(同僚三世親)”이라고. ‘겁’은 상상을 넘어서는 시차원임에 견주어, 3세라 하면 조손(祖孫)도 서로 대면할 정도의 백년이니 훨씬 피부에 닿는 실감의 세월이다.
동료는 함께 일하는 사람. 조직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인연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난 사람이기 쉽다.
살펴보니 동료 가운데 동료라 하면 순전히 뜻이 맞아서 함께 작업해나간 예술가들만 한 동료도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 아닌가. 하나같이 “하늘 위아래에서 오로지 혼자라는 자부심(天上天下唯我獨尊)”의 존재들이고, 개성의 화신들이다.
설악산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살아가는 사이 “또 다른 설악산이 되고 말았다.”며 동양화가 송영방 화백이 별악산인(別嶽山人)이라 작호(作號)한 김종학 화백(畵伯)과 경주 안강 땅의, 도둑이 득실거릴 정도로 외지다 해서 그 단어를 앞에 붙여 산 이름으로 부르다가, 필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말도 있듯이, 어질고 좋은 산을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해서 ‘도덕산’이라 고쳐 부르는 곳 자락에 가마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급월당(汲月堂) 윤광조 도백(陶伯)이 어쩌다 서로 만나 수년에 걸쳐 도화(陶畵)작업을 해냈으니 그 인연이 예사 인연인가. 높디높은 산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산짐승들도 끼리끼리는 어느 길목에선 만나기 마련이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2.
김종학․윤광조 도화전은 화공(畵工)과 도공(陶工)이 ‘일 대 일’ 역할분담으로 만나 한쪽은 흙을 굽고 한쪽은 그림을 그린 합작전은 우리 도화사에서 아주 희귀한 경우에 든다. 내 기억으로 삼십 여 년 전, 역시 윤 도공이 서양화가 장욱진과 함께 그런 역할비중으로 합작한 ‘장욱진 도화전’(현대화랑, 1978. 2.23 -28)이 첫째였고, 이번이 그 두 번째가 아닌가 싶다.
장 화백이 도화에 관심을 가졌던 시점은 도자기 관심이 조금 부활하던 1970년대 중반이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여유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일부 부유층에서 고급 생활자기의 소요가 늘었지만, 고작 일본 「노리다께」같은 외제품을 선호하는 정도였다. 한편 조선왕조가 망한 이후 내리막길이던 전통자기는 1960년대 중반 한일교류가 다시 열리고부터 일본인들의 차완(茶碗) 취향에 호응함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한계를 느꼈던 도공들이 예술자기의 국내 활성화를 위해 명망 화가들의 그림을 담으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순수미술을 고집하던 화가들도 마침 종이 또는 캔버스가 아닌 다른 표현매체를 실험하고픈 자극을 받는다. 그게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 바로 1970년대 중반의 사정이었다. 전통기법의 백자에다 김은호, 김기창 등의 이름난 동양화가들, 그리고 한지에 먹으로 ‘먹그림’도 그리기 시작하던 장욱진도 서양화가로서 드물게 참여한 ‘안동오(安東五) 백자전’이 1970년대 중반 신세계백화점 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회 이름에 화공 대신 도공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만큼 화가들의 참여가 부수적이었던 당시 사정을 말해준다.
화가가 전면에 나선 도화전도 열린다. 유화 전문의 장욱진은 1977년, 경기도의 한 가마를 빌려 거기서 성형한 백자에 그린 작품만으로 도화개인전을 꾸민다. 화가의 아내가 앞장 선 불사(佛事) 기금마련을 돕기 위한 비공개 기회전시였다. 소문을 들은 당대의 안목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장욱진과 윤광조의 도화전을 부추긴다. 윤광조의 분청(粉靑)바탕이 간결한 선묘(線描)가 특징 있는 화가의 화풍과 잘 맞아 떨어질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욱진을 드물게 만나면서도 “장화백의 일상에 대해서 늘 먼발치에서 우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라 스스로 적었듯이, 최 관장은 진작 화가와 깊은 지우를 쌓았다. 한편 박물관을 들락거리면서 옛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살피면서 그것의 현대화에 진경을 보이던 윤광조에게 “달덩이 같은 작품을 길어 내라”는 격려의 뜻을 담아 당신의 스승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의 당호인 ‘급월당’을 전해줄 정도로 가까이 아끼던 처지였다.
최 관장이 도화작업을 화가에게 권한 데는 아마 조선시대 화원들의 도화작업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백자는 도공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 마련이었지만, 드물게 화원들도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분원 등지의 가마터를 찾았다. 김홍도(金弘道, 1745-?),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장승업(張承業, 1843- 1879) 등이 특출한 도화를 남겼다는 기록이 오늘도 전한다.
장욱진과 윤광조가 함께한 도화작업은 그릇을 성형해서 반(半)건조된 그릇 위에 도공이 화장토를 바르고 나면 화가가 그 굳지 않은 화장토에다 대꼬챙이나 못 같은 것으로 선묘하기도 하고, 또 초벌구이가 된 분장 그릇에 철사(鐵砂) 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도화작업의 대상이 됐던 분청그릇은 모두 도공이 즐겨 만들던 항아리, 붓통, 주병, 사발, 연적 같은 그릇이었다. 이 성과물을 갖고 1978년 여름, 장욱진․윤광조 도화전이 현대화랑에서 개최된다.
3.
삼십여 년 전 장욱진과 어울렸던 작업을 마음의 영예로 간직해온 윤광조가 당대의 서양화가 김종학과 함께 일 대 일로 만나 갖는 합작전은 그의 도화작업으론 두 번째가 된다. 두 사람 합작에 처음 다리를 놓은 이는 재미 조각가 한용진이다.
나도 함께 간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작업할 때는 한용진은 즐겨 윤광조가마를 찾는다. 당신이 사는 산골을 ‘바람골’이라 부르는 윤광조에게 능히 맞바람을 칠만한 이가 풍운의 한용진. 두 사람은 바람이 바람과 어울리는 그런 교유를 이어왔다.
2006년에 김종학의 설악산 화실을 위해 거기서 돌조각 작업을 하던 한용진은 모처럼 찾아온 윤광조에게 김종학과 함께 작업해보기를 권한다. 장욱진과 어울렸던 작업 이후 무려 30년이 흐른 시점에서 미술대학에서 장욱진을 배웠고 이후 알게 모르게 생활스타일이 닮아 ‘장욱진 줄기’가 분명한 김종학과 함께 작업할 기회는 옛말대로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산중고수(山中高手)들이 어울린 자리이니 문답이 없을 수 없다. 급월당 이 먼저 묻는다. “나는 색을 안 쓰는 사람이고, 선생은 색을 쓰는 사람인데 어떻게 작업하면 좋겠는가?” 별악산인이 화답한다. “내가 색을 안 쓰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도화작업이 잉태하는 발단이 된다. 2008년 말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작업은 1년 반 동안 이어져 마침내 그 결실이 이번 도화전에 오롯이 모였다.
4.
개성의 작가들은 한마디로 ‘불같은’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이라 하면 두 불길이 맞불을 이루는 형국. 맞불이 큰일을 내자면 홑불도 차갑게 얼어붙은 주변을 녹여 없애버릴 만큼 붉다 못해 파랗게 타오르는 화염이어야 한다. 바로 두 작가의 오늘이 있기 까지도 공통되게 주변 환경의 냉혹과 주변 사람의 냉소를 녹여버릴 불같은 열정이 있었다.
윤광조가 도덕산 아래 바람골에 자리 잡음은 인생역정에서 만난 가정 풍파를 이기려면 작가정신의 재도약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결단이었다. 한때 간첩도 출몰했다는 깊은 산골 터전은 마침 일대의 농수원(農水源)이 되는 저수지 바로 위쪽인 까닭에 정착이 애매한 외지인에게 쉽게 건축허가를 주지 않은 곳이었다.
투기가 아닌 현지정착의 확고한 의지를 물증 해주려고 윤광조는 컨테이너를 옮겨놓고 거기서 절대생존을 이어간다. 화장실이 제대로 있을 리 없는 극한생활이었으니, 도시의 달동네집이 뜻밖에 깊은 산촌에 둥지를 튼 꼴이었다.
한 해 뒤 건축허가를 받는다. 형편대로 공사를 하다 보니 집은 겨우 뼈대만 갖출 뿐이었다. 거처의 벽채는 미장(美裝)을 하지 못해 시멘트 블록이 그대로 노출된다. 겨울이면 삭풍이 집안으로 곧바로 몰려드는 궁벽(窮僻)이었다.
사람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했다. 현대화랑 이웃에서 결혼 초년생활을 꾸리던 초임 판사 유천(油泉) 김동건(金東建)은 장욱진․윤광조의 도화전을 보았던 감동의 연장으로 두 작가와 왕래해 온 사이. 수원지방법원장 시절인가, 서울고등법원장 시절인가 윤광조의 집치레가 저럴 수 없다며 현지의 후배 지법원장을 통해 인부 주선을 청해서 마침내 벽채 미장공사를 마무리 짓는다. 스스로의 궁색을 내색하지 않은 채 ‘큰소리’치기로 호가 난 윤광조도 크게 감복을 받은 나머지, 아직 굳지 않은 시멘트 몰탈을 분청자기의 화장토인양 거기에 쇠못으로 한마디 공덕 사항을 적는다. “유천 선생 덕분에 미장하다. 2004.9.3 급월당” 벽채에 새긴 공덕비, 그 아니 이색적인가.
나는 1978년의 도화전을 계기로 처음 안면을 튼 이후, 술자리 등에서 장욱진을 함께 모시는 등 윤광조와 왕래하기 시작했다.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빛나는 경력이라지만, 자식들에게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던 도공들에게 세습제를 강요하던 조선 중엽의 법제(1543년)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도예 전업작가 생활은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고달프기 짝이 없는 천업(賤業)이었다.
도자는 말할 것 없고 그림 또한 전업작가로 살자면 특히 경제사정 등에서 홀로 서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은 내가 나중에 전기(傳記)를 적었을 정도로 오래 왕래했던 장욱진을 통해서 잘 듣고 있었다. 걸핏하면 “화가는 예순부터”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 나이 정도에 이르러야 자신도 납득하고 남도 납득하는 화풍(畵風)이 바로 설 수 있다는 말로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나이 정도 되어야 스스로의 작업으로 겨우 경제적 독립도 가능하다는 뜻도 담았지 싶다.
장욱진의 말에 빗대어 아직 생활이 불안정한 마흔 즈음 윤광조에게 종종 나는 “나이 쉰까지 버텨라.”는 격려의 말을 보태곤 했다. 장욱진이 살았던 시절은 주위에서 그림공부를 천형(天刑)으로 여겼지만, 이제 세상은 말로는 예술가 직업도 할 만하다고 여기게 되었음을 감안, 열 살 정도 에누리해서 나이 쉰이라고 말했던 것. 나중에 들은 바로, 내 말에 의지해서 물레를 돌리는 직업병으로 종다리 혈관에 혈전(血栓)병을 얻는 등 각종 어려움이 닥칠 때도 참고 살아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전에 공연히 무책임한 말로 사람을 현혹했다 싶어 자책감이 들곤 했다.
경제적 여유는 몰라도 작가적 활동은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다. 필라델피아, 시애틀 등지의 미국 유수 박물관에서 초대전이 열렸고, 2004년엔 ‘올해의 작가’로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도 받았다. 마침 연전에 지방에서도 서울의 서넛 기관이 수여하는 문예대상에 버금가는 시상제도가 있다며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윤광조를 강력 추천했다. 내 추천도 일부 주효했던지 운 좋게도 윤광조도 일 년 정도 작업할 수 있는 상금이 딸린 좋은 상을 받았다. 내가 일찍이 공연히 던졌던 생소리에 담긴 마음의 빗을 조금은 탕감했다싶어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모른다.
“쉰 살까지 참아라.”는 말을 믿어준 도공이 고마울 뿐이다. 내 격려의 말은, “세상사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는 불가의 가르침처럼, 결국 자신 내면에서 다지고 다지려는 믿음에 작은 호응이 되어주었을 뿐인데도, 그걸 두고두고 고맙다한다.
한 수 더 떠서 2009년 7월에 서울 오는 길이라며 뜬금없이 내 아호를 하나 지었다며 전화로 말문을 연다. ‘한이(閒怡)’라 지었다 한다. 내 사람됨을 일러 “한가롭되 게으르지 않은(閒而不怡)” 작자라 싶어 그렇게 지었다는 것. 듣고 보니 내 약점을 잘도 꿰뚫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밥통 교수로 별로 하는 일 없이 반생을 편하게 보냈으니 좋은 쪽으로 “한가했다”함은 틀린 말이 아니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도 내 전공과는 거리가 먼 예술판을 하릴 없이 많이 기웃거렸으니 듣기 좋게 “게으르지 않았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지 싶었다. 아니 내 아호로 지어준 ‘한이불이’도 곰곰이 따져보니 윤광조가 자신을 다스려온 말이 틀림없지 싶다.
지인의 아호를 짓기란 여간 독서가 없으면 감히 생심하기 어려운 일. 그렇다. 좋은 말과 글은 깊은 독서가 없으면 나올 리 없다. 지난 2008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경암학술상 예술부분 수상 소감에서 작업세계를 간단히 압축한다. “미쳐야 한다. 그러나 미치면 안 된다.... 이 지극히 상반된, 모순덩어리들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이 예술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난초를 그림에, 법이 있어도 안 되지만 또한 법이 없어도 안 된다(寫蘭 不可有法 亦不可無法)” 했던 추사 김정희의 유명 화론과 직통한다.
윤광조는 독서가 좋은 사람이다. 아니 겉보기보다 훨씬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5.
김종학 또한 자연에서 구원을 얻으며 살아남은 역정이 윤광조와 닮은꼴이다. 장년에 본의 아니게 가정적 역경을 만나 전형적 도시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설악산으로 ‘잠입’한다.
내가 화백 이름을 처음 듣기는 1973년 가을, 장욱진 화백을 통해서였다. 이듬해 서화 수집품이 볼만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도 만나고 귀품(貴品)도 만나고 싶어 지인에게 다리를 청해서 서울 집을 찾았다. 수집한 한국현대명화를 보여주는 자리에서 그때만 해도 아직 우리 사회가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 하던 이중섭, 박수근을 재발견한 경위와 기쁨을 열정으로 말해주었다. 그때 인상은 우리 현대화를 보여주는 손길에선 화업(畵業) 대신 미술대학시절부터 쌓아온 안목으로 명화 수집의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고, 곧 이어 단원 수집품 등 고화(古畵)를 보여주는 손길에선 옛 그림에서 온고지신의 배움을 얻으려는 듯이 보였다. 한마디로 김종학의 입지는 좀 헷갈렸다.
그 뒤로 띄엄띄엄 만났다.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우연히 조우했을 때는 뉴욕의 미술대학에 적을 걸고 있다했다. 화가의 길을 다시 확인하고 정진한다는 말이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난 1980년대 초는 이전과 달리 설악산 산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전의 비구상 작품세계를 떠나 설악산과 그 산자락의 들꽃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구상작가로 변신해있었다. 그 변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산에서 만나는 들꽃이 그렇게 아름다운데 그걸 어찌 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응수한다.
타의로 시작되었던 설악산 생활의 적응은 죽음을 생각하는 번민의 연속이었다 한다. 번민은 내가 직접 듣기도 하고 직접 술회한 것을 읽기도 했다. (김종학, “자연을 마음대로 그렸습니다(구술)”, 김형국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