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보이는 것 그 너머’로 제시되는 사진을 이용한 작품 15점 (108×162cm, 60×90cm) 가량이 전시된다.
The Philosophical Forest
철학적인 숲 숲이 깊고, 흔적 없이 어둡다. 첫 눈에는 빛의 편린 한 두 점이 어른거리는 어슴푸레한 나뭇잎 장막 같다. 실은 ‘어슴푸레’보다 더 어둡다. 김태철의 작품들은 처음에는 검정의 속성 그대로 형상이 거의 없는 듯 보이지만, 작품의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나면 형상들이 점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은 밤의 현상이 아니다. 숲에는 태양빛이 비치지만 숲의 장막에 가로막혀 빛이 줄어들면서, 부드럽게 분칠한 듯한 검정 들판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인쇄과정의 지극한 미묘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 숲들에는 등장인물이 없으며, 다음 목적지를 암시하는 통로도 보이지 않는다. 숲은 그 고유한 빛 속에서 응시의 대상으로 재현된다.
인류 사상사에서 숲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치 인간들이 나무에서 내려오자마자 다시 고개를 돌려 나무를 올려다보기 시작한 것 같다. 숲은 인간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나타내는 은유로서 종교와 철학 담론에 두루 걸쳐 등장한다. 문화적으로 중요한 은유들이 모두 그렇듯이, 숲의 의의는 그 대략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면서 다양하다. 김태철의 작품들은 이러한 전통 안에서 움직인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나무 몸통의 기울기가 작품 가장자리의 수직· 수평선에 대비되면서 그 중요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형식을 잘 갖춘 작품이다. 그와 동시에 대단히 구상적이어서 잎사귀의 어른거림이나 나뭇가지의 선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공간은 1cm 너비도 채 되지 않는다. 숲의 잠재력을 일깨워서 사색을 부추기는 이 작품들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정신의 숲 | 정신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숲이 있다. 그 가운데 동화와 신화에 나오는 숲은 어두운 숲이다. 이는 아이들이 버려지는 곳, 그래서 늑대들이 그림자 속에서 제 먹잇감에 살금살금 다가가는 숲이다. 문명보다 먼저 있었던 숲이며, 문명과 결코 타협하지 않을 적대관계로 남아 있는 숲이다. 이는 또한 훈육과 사회화 과정에서 억눌린 우리 무의식의 욕망들을 반영한다. 이 욕망들은 우리 존재의 마지막 한계선까지 떠밀려 가지만 우리가 아무리 파괴시키고 싶어 해도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무성해지므로, 숲은 우리가 감히 인정할 수 없는 우리의 일부다. 숲은 우리 안에 있다.
어두운 숲은 미신의 온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흔하다. 미신적인 숲에서 벗어나 햇빛 비치는 이성의 명징함으로 옮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이 바로 진보라는 명목으로 지구 곳곳에서 ‘삼림파괴’를 자행해 온 밑바탕이다. 숲이야말로 계몽의 적이며, 자연은 인류가 문명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정복하고 진압해야 할 대상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기반을 둔 또 다른 변주에서는 숲이 두려운 존재로서 그 자체로 살아 있으며 인간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천 년을 살아 온 거대한 나무들에 비하면 인간은 모기나 나비 정도에 불과하다. 숲은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 아니라는 발상을 구체화하여 인간의 이기주의를 허물며, 지구별에 함께 사는 존재들 모두 인간과 꼭 같이 생명의 권리를 지닌다는 점을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 숲-자유의 공간(숲-집) | 그러나 정신의 숲이 전부는 아니다. 숲은 지금까지 자유의 공간을 상징하기도 했다. 장 자크 루소에게 숲은 인간의 오래된 주거지로서, 인간이 다른 창조물들처럼 창조물의 하나로서 고독과 자유를 누리며 살던 터전이었다. 이 숲은 집이다. 어두운 숲처럼 문명 이전에 존재했지만 우리가 아끼는 모든 것들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보존되는 곳이다. 이 숲은 우리의 모든 기본적인 욕구(음식, 물, 보금자리, 때때로 함께 하는 동행)를 제공하는 곳이면서 사회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욕구(패션, 지위, 명성, 독창성)의 과도함을 드러내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특히 무엇보다 설화들 속에서 숲은 도시와 마을들이 독재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은둔하는 곳이다. 나무의 오래디오랜 나이와,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오래된 숲의 나이는 그 자체로 태곳적부터 내려 온, 빼앗을 수 없는 인류의 권리를 상징하게 된다. 설화에서 사람들은 권력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둔 자연스러운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숲에 모여든다. 아마존이나 인도네시아, 라플란드처럼 오늘날까지도 숲에 부족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 그 부족민들은 인간 고유의 자유를 지켜 온 마지막 전초기지이자 환경 지킴이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신화에 대한 21세기 식 반전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숲은 이런 생태적인 삶을 자연스럽게 지켜주는 양식이기보다는 숲 자체의 생존을 위해 점차로 부족민들에게 의존하는 형태로 변해왔다.
| 정치적인 숲 | 어떤 특정한 인간 집단에게 집을 제공하는 역할과 아울러, 숲은 수천 년 동안 공동체 이미지로 기능해 왔다.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숲을 독립적인 생태계로 연구하는 학문을 통해 입증된 내용이다. 이는 정치적인 숲으로, 다른 식물군이나 동물군처럼 나무들도 뚜렷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나무들의 조화로운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완벽한 공간이다.
정치적인 숲은 또한 독특한 개념 한 가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동화에 나오는 어두운 숲이 나이, 힘, 권력(해를 끼치는 권력)의 차원으로 묘사될 때 정치적인 숲은 협력과 상호 원조로 읽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여전히 대중의 경제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원시적인 다윈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한다.
김태철의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 1990년대 후반 한국에 불어닥쳤던 IMF 위기의 사회적인 결과들에 응답한다. 당시 극동 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들처럼 한국 경제는 급격한 경기불황에 빠져 긴급구제를 받아야만 했다. 긴급구제에 뒤따른 구조조정은 혹독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감지되는 실정이다. 물질적인 부에 지나치게 연연하게 만든 경제적 불안정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회를, 자연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김태철의 작품들은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사회정책을 지배해 온 근시안적 물질주의에 하나의 대안과 수정안을 제시한다. 숲은 세계 자본으로부터 강요된 것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 신성한 숲 | 마지막으로, 신성한 숲이 있다. 유사 이래로 산과 함께 나무들, 골짜기, 숲들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숭배되어 왔다. 전 세계에 걸쳐 사찰의 건축양식은 대개 기하학적인 형태로서 나무 위의 공간을 재현하는 형태를 띠는데, 나무 위의 공간은 바로 사찰이 유래하게 된 곳이며 사찰이 지키고 있는 아주 오래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신성한 숲은 사색(contemplation)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숲의 거룩함은 인간의 행동 변화를 요구하며, 때로는 인간이 숲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숲에 들어가기 전에 신(神)들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하거나, 혹은 숲 인근에서는 사냥할 수 없다는 식의 여러 금기들을 지켜야 하기도 한다. 숲의 근원적인 가치는 실용적이거나 생태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숲은 우리의 생각을 물질적인 조건들에서 떼어내 우주적인 공간 이해로 나아가게 하려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숲은 여러 면에서 훌륭하고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이 모든 특성들은 우리 존재가 진화하는 과정의 형이상학적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의 숲이기 때문이다.
김태철의 이미지들은 이렇듯 철학적인 숲 사이에서 제 고유한 공간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의 숲들은 특별한 장소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각각의 작품이 촬영된 특정 장소가 있다 해도, 작품들은 그 장소에 국한된 특수 가치를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숲 일반에 대해 보여준다. 작품에 포착된 우연한 모습에서 숲의 진수를 뽑아내려 한 노력이 보인다. 작품들에는 한국적인 독특한 관점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도 묻어나 있다. 작품 속의 어둠은 무섭지 않은데다 그림자 뒤에 숨은 괴물도 없다. 더구나 이 작품들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를 담고 있다. 이들은 숲에 있는 나뭇잎의 수를—세지 않고서— 낱낱이 상상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러나 나뭇잎들 모두를 마음속으로 떠올리려 애쓰다 보면 관찰자는 상상력에 압도되면서 숭고함의 끝자락까지 이끌려 간다.
김태철의 작품들에는 전통적인 요소들이 대단히 많다. 자유로이 걸려 있는 작품들은 그림을 그려 넣은 두루마리를 연상시키며, 숲 이미지는 수세기에 걸쳐 한국미술의 대들보 역할을 해 왔다. 최고의 한국 풍경화들 다수가 그렇듯이 김태철의 작품들은 전경을 심연의 공간과 병치하지만, 김태철은 전통적인 관례를 뒤집어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근접한 것에 강조를 둔다. 멀리 있는 산허리가 나무의 큰 가지들 사이로 언뜻 보일 수는 있다 해도 관심의 중심이 되기보다 오히려 전경에 있는 작은 나뭇잎들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그친다. 작품들 중 일부는 숲의 심연을 묘사하지만, 이 심연은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남아 대개 잔가지와 줄기들의 복잡한 문양을 돋보이게 하는 역광으로 작용한다. 원경을 암시하는 것이 숲의 확장에 대한 발상을 전달하는 기본이지만, 그것이 더 가까운 숲의 풍경을 구성하는 면과 선들의 상호작용과 겨루지는 않는다.
작품들은 전통적으로 이미지의 가장자리에 강조점을 두어 회화에 비해 항상 역동적이다. 가장자리를 단호하게 잘라 매우 극적으로 표현한다. 가늘고 기우뚱한 나무줄기가 옆면이나 윗면에서 잘리기도 하는데, 이는 추상적인 요소로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경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작품의 경계 너머에도 숲이 계속된다는 표시로 기능한다.
역동적으로 가장자리를 강조하는 것이 전통이라면 김태철은 이러한 기법을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는데, 그림 표면의 맨 앞으로 작품의 내용을 가져오는 식이다. 관찰자는 뒤로 물러나 먼 거리에서 숲을 응시해서는 안 되며, 그림의 맨 앞부분을 강조하는 이 장치를 통해 숲의 깊숙한 곳으로 초대된다.
숲의 한 가운데 내던져진 듯한 이 느낌은 작품 안에 지표면이 거의 없는 탓에 더욱 강화된다. 관찰자가 상상으로라도 자신의 발을 내디뎌 주변을 탐색할 만한 안전한 장소가 전혀 없다. 지표면 없음은 이미지를 특정한 시공간의 그물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의 하나다. 사람들이 보통 숲이 땅에서 생겨나 바닥과 상층부를 지닌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김태철이 묘사하는 숲과는 전혀 다른 종류다. 대신에 그는 커튼처럼 드리우고 무게감 없이 떠 있는, 이 작품들이 인쇄된 종이와 같은 숲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숲을 통과해—그리고 아마도 그 너머로—이동하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걷기로는 안 된다. 지표면 없음은 무게 없음으로 연결된다. 나무들은 흙에 뿌리를 내린 게 아니라 거의 종이 위에 부유하는 듯이 보인다. 관찰자도 이와 비슷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땅과 하늘 사이 미지의 공간에 머문다. 그리고 숲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고려해 볼 때 이 공간적 위치 자체도 영적인 암시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김태철이 묘사하는 숲은 외부의 어딘가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라는 뜻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물질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숲이다.
작품들이 어두운데도,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햇빛이 늘 어느 정도 있다. 때로는 중간 거리쯤에 있는 고독한 나무의 몸통 하나가 조밀하게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를 뚫고 온 햇빛의 줄기를 만난다. 이렇게 드문 빛의 편린들은 사실 우연적이어서 기본 요소가 아닌데도 첫눈에 어둠 속에서 중심이 되는 초점인 듯 보인다. 작품은 빛의 운동을 필수로 하는 것들 중 하나지만 이 작품들은 빛이 형태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작가는 빛이 어떻게 특정한 물체에 떨어지는가에 대해서보다는 빛이 있든 없든 형태가 어떻게 연속되는가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키는 일에 관심을 둔다. 이 작품들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인상파’에 속하지 않는다. 시간의 범위 안에 있는 순간들의 가치에 대한 표현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굳이 시간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이 작품들은 시간 너머에 있는 순간들에 관여한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든 혹은 떠 있는 상태든 태양의 과정은 작품이 관찰자에게 끼치는 영향들 가운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시간 안의 특정한 순간에 매여 있는 보통 작품에 이런 식의 효과를 시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일 터여서, 김태철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 특징은 작품이 그저 그러하도록 작품의 장치를 통제하는 김태철의 기술을 입증할 뿐이다.
작가가 이 작품들에 붙인 제목 ‘보이는 것 그 너머’는 작품들의 역설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눈에 보이는 예술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만든다는 것이 이상한 욕망인 듯하지만, 이는 눈에 보이는 작품들에 대한 반대(anti)가 아니다. 작가는 보이는 것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제 조건 아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만져지는 것들, 그리고 상품화할 수 있는 것들만 최소한의 가치라도 지닌 듯이 여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된다. 바로 여기에 신비주의로 통하는 문이 있으며 김태철의 작품에는 확실히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란 단어는 흔히 실증과학이 분류해내지 못하는 경험의 범주에 이름을 붙일 때 이용된다.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모두 조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완벽하게 눈에 보이는 경험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작품을 통해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일련의 생각들이 촉발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기를 바란다. 천왕성의 발견에 대해 글을 쓴 바 있는 시인 노만 니콜슨Norman Nicholson은 해왕성의 궤도에서 일어난 작은 탈선에서 영감을 얻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오직 알려진 것 속에 있는 이음매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썼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암시함으로써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속에 있는 작은 이음매를 조우하도록 해 준다.
조나단 클락슨 박사 | 예술의 역사와 이론 강사 | 카디프대학교 예술대학부
Dr. Jonathan Clarkson | Lecturer in History & Theory of Art | Cardiff School of Art & Design UWIC
▶ 전 시 명 : 보이는 것 그 너머 (김태철 개인전)‘BEYOND VISIBILITY'
▶ 평 론 명 : 철학적인 숲(The Philosophical Forest) - 조나단 클락슨 박사(영국 UWIC대학교)
▶ 작 가 명 : 김태철 / Kim, tae-chol, 8654kim@hanmail.net / 011-468-8564
▶ 전시기간 : 2010. 10. 6 (수) ~ 10. 15 (금) 오픈 : 10. 7(목) PM. 5시
▶ 전시장소 : Gallery so |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18-17 Tel: 02-548-9648
▶ 관람시간 : AM. 10:00 ~ PM. 6:00
▶ 관 람 료 : 없음
| 작가경력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생활미술과 졸업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개인전
2010 갤러리 SO, 서울
2005 예술의전당, 청주 / 토포하우스 갤러리. 서울
1997 김내현 화랑, 소울 / 무심갤러리, 청주
1995 포이어 갤러리 / 돈 비산트 갤러리, 울버햄프턴, 영국
1988 롯데미술관, 서울
단체전2010 Taking Issues (Howard Gardens Gallery, Cardiff, UK)
2009 제2회 청주국제북아트전 (한국공예관, 청주)
2008 북아트 2008 한국-일본전, 서울, 한국, 오사카, 일본
2008 국제 북아트 메이킹 페스티벌 (비움아트갤러리, 서울)
2007 디자인 플러스 북아트(진선갤러리, 서울)
2007 서울국제북아트전 (코엑스 태평양홀, 서울)
2006 국제판화 네트워크(헤이리, 파주)
2005 프랑크푸르트 북페어(프랑크푸르트 도서전홀, 독일)
현대판화정예작가초대전 (우림갤러리, 서울)
2004 서울 세계 북아트페어(코엑스 태평양홀, 서울)
판화 2004 - 새로운 모색과 실험전 (한전프라자갤러리, 서울)
2002 런던 아티스트 북페어 2002(The London lnstitute, London) 외 다수
현 :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시각디자인 전공 교수
코리아북아트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회원
한국디자인학회 이사, 한국일러스트협회 회원
전 : 청주시예총 회장 역임
한국미술협회 충북지회 회장 역임
한국미술협회 청주지부장 역임
한국일러스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