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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인 해석에서는 서구적인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차용, 그 전체적인 윤곽은 분명히 오방색 개념을 중심에 두는 동양사상 및 철학을 수용.
부귀, 장수, 행복, 사랑의 세계를 지향하는 기원의 부적신항섭 | 미술평론가
그의 작품세계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조형미는 다름 아닌 생명의 광휘를 선명히 드러내는데 있다. 그 방법의 하나로 밝고 경쾌한 색채이미지를 구사하는 것이다.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야말로 생명의 환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에 그렇다. 꽃은 원래 그 모양과 색깔이 화려한 원색이어서 생명체로서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밖에 나비와 같은 곤충류 그리고 각종 새들도 아름다운 색채로 치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아름다운 원색을 지닌 소재를 모아놓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광휘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를 원색적인 이미지로 바꾸어놓는다. 그리하여 작품은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로 충만하다. 일반적으로 원색만을 모아놓으면 시각적으로 혼란스럽기 십상이다. 즉 밝고 화려한 색채들끼리 서로 부딪쳐 산만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서는 화려한 원색일색인데도 시각적인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원색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운데 상승작용을 일으켜 발색이 더욱 돋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이러한 시각효과는 배경, 즉 소재를 제외한 바탕을 단색으로 통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검정색이나 암청색, 청색, 오렌지색, 연초록 등의 단색이 소재를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더러는 단색 위에 유사한 색반으로 표정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단색으로 통일하고 있다. 붉은색이나 노란색 또는 초록색 등으로 소재의 형태를 표현한 경우, 바탕색은 어둡게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순도 및 명도가 높은 순색, 즉 원색의 색가는 더욱 상승하게 마련이다. 특히 바탕색이 검정과 같은 무채색이나 군청이나 암록과 같은 어둡고 짙은 바탕색 위에서 순색은 한층 돋보인다. 순도의 차이는 없으나 배색의 효과로 인해 시각적으로는 더욱 염려하게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바탕을 단색으로 처리할 경우 이미지의 통일성이 강화된다. 어쩌면 원색들이 난무하는 상황인데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도 바탕을 단색으로 통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두운 색채, 그 가운데서도 검정색 바탕은 원색의 색가를 한층 높여준다. 검정색은 원색을 돋보이는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동일한 순색일지라도 흰색 바탕과 검은색 바탕은 현격한 시각적인 차이를 보인다. 흰색바탕의 경것에는 순색의 순도가 오히려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어두운 바탕색을 선호하는 그의 작품에서 색채의 순도가 높다고 느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원색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이 시각적인 자극이 덜하고 어느 면에서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강렬한 원색의 발색이 억제되고 있기에 그렇다. 이는 특별한 색채감각이라기보다는 바탕색과의 관계에 기인한다. 아무튼 자극적인 원색을 구사하는 가운데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채색기법을 터득함으로써 시각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형태를 규정하는 윤곽선 역시 단색으로 처리된다. 대체로 원색보다 명도 및 채도가 현저히 낮아진 중간색 선이 대다수이다. 따라서 원색으로 처리되는 소재의 발색을 낮추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이때 중간 색조의 윤곽선은 소재와 배경의 경계에서 원색과 원색의 상충을 완화시키는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다. 이 또한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짐짓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색채배열 방식은 서구회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 가운데 민화를 연상케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십장생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통적인 색채배열 방식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궁이나 사찰 등 건축물에서 쓰이는 단청은 물론이려니와 각종 민속기물에서 볼 수 있는 청, 적, 황 삼원색은 오방색에 근거하는 것이다. 민화를 비롯하여 관혼상제와 관련된 복식 및 기물에서도 이들 삼원색을 중심으로 한 원색적인 색채배열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색채배열 방식은 전통적인 색채배열 방식인 오방색에서 비롯되고 있다. 청, 백, 적, 흑, 황은 방위상으로는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는 상징색이다. 이는 우주만물을 음양오행으로 해석하는 동양사상에서 비롯된다. 밤낮의 변화와 사계절의 순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주만물의 생성 및 소멸을 음양오행의 이치로 풀이하는 것이다. 우주 및 자연은 물론 인간사 모두가 음양오행의 원리에 부합한다. 음양오행의 원리를 색채이미지로 나타낸 것이 오방색이다.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음양오행 사상을 근거로 하는 오방색을 채택함으로써 전통회화로서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발상이다. 물론 조형적인 해석에서는 서구적인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그 전체적인 윤곽은 분명히 오방색 개념을 중심에 두는 동양사상 및 철학을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크릴을 사용하는데도 서양의 회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서구 회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색채배열 방식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삼원색을 중심으로 한 색채배열은 독특한 한국적인 정서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형태를 단순화하고 평면에 가까운 굵은 단선 화법으로 형태를 묘사하는 것은 단청기법과 유사하다. 원근법이나 명암기법을 배체한 지극히 간결한 평면적인 화법이야말로 단청 특유의 기법이다.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단순명쾌한 조형적인 해석이다. 이와 같은 색채기법 및 형태 묘사는 단청에 근거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은 스승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풍곡 성재휴의 작품세계로부터 감화를 받은 흔적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형태를 압축하는 굵고 힘찬 수묵의 단선기법은 풍곡의 산수화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이다. 더구나 그처럼 굵고 힘찬 단선의 윤곽선 안에 원색으로 채워 평면적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하는 화법은 그대로 풍곡의 조형세계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로부터 한 걸음 진전하여 서구적인 평면회화에 가깝게 더욱 단순화시켰다. 그러면서 아크릴 물감이라는 서구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완전한 색채회화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수묵화로 입지를 다진 그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인 영향인지, 또는 회화정신의 근본을 동양사상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 서구회화와는 완연히 다르다. 달리 표현하면 서구적인 듯싶으면서도 결국은 한국적인 그림이 되었다. 재료를 바꾸었는데도 그 형식 및 내용이 한국적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 결코 서구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만큼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풍긴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수묵산수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삼원법이나 원근법에 준한 사실적인 공간감을 수용했다. 기존의 수묵산수화를 아크릴로 바꿈으로써 나타나는 조형적인 변화가 감지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형태를 평면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윤곽선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형태의 세부를 소거하고 단순화하여 마침내 윤곽선과 평면적인 색채이미지를 조합하는 형식미에 도달하게 된다.
(중략)
그의 작품 명제는 “부귀” “장수” “행복” “평화” “사랑” 등이 반복적으로 쓰인다. 이러한 명제는 필경 그 자신의 자연관 및 인생관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 자신의 관점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사계절의 순환을 주재하는 조물주의 절대적인 능력을 인식하게 되고, 그를 통해 사색의 창이 열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자연을 매개로 하는 사색 또는 사유의 전개는 범신론적인 철학에 이르게 되고 또한 자신의 삶, 즉 인생철학을 깨우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는 여기에서 자연과 인간이 동화되는 삶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리라. “부귀” “장수” “행복” “사랑” “평화” 등의 명제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원적인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그림을 통해 자연의 진면목을 이해하게 되고,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을 제재로 하는 것도 다름 아닌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 및 존귀함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기원의 부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전체 평론 중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