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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공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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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공간전
2011.1.19 ▶ 2011.2.6
초대일시 | 2011.1.19 pm 5:30



They are alive

우징| 작가노트



현대미술에 있어서 특히 조각에 대해 철이라는 재료가 주는 의미는 비단 현대 문명을이루는 재료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물질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 또한 그 철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표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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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물질들 중에서 Fe(철)의 비중은 가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철은 그 구조가 단단하며 물과 공기를 만나면 녹(RUST)이 생겨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그 철의 형태가 없어지게 된다. 공기나 온도에 민감하여서 여름과 겨울에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져서 그의 부피가 달라지기도 한다. 열을 가하면 부드러워지거나 액체로 변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기에 어떤형태로도 변화가 가능하다. 같은 철들을 녹여서 붙이는 경우가 용접이다. 절단하거나 연마가 가능하며, 연마를 통해서 광채가 난다. 마치 거울 같이 만들 수도 있다. 철은 덩어리가 커질수록 무게가 무거워 진다. 같은 크기의 돌 보다 더 무거운 이유는 철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들이 더 작고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중력에 더 민감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구 역사 상, 철이 가져다 준 상황들은 가히 인간의 문화를 살리고 죽이는 물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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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러한 철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느끼고 있다.

철은 나의 조각 생활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난 재료이다.철이 내게 주는 느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재료라는 것이다. 철만큼 부드러운 재료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그리고 또 하나,철은 정직하다. 내가 어떻게 만지는가에 따라 그 반응은 각양각색이다.기분 좋을 때와 나쁠 때, 그리고 노여움과 평정을 찾았을 때… 다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러한 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각으로 표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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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뜻한 철

철로 구(원형)나 다른 형태들로 용접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 낸 후 그 내부에 전기 열선을 설치하여 손을 대면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철의 이미지는 차가운 온도를 가지고 있고, 단단한 물질이며, 무거운 재료이면서 녹이 생기면 더럽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그러한 철이 따뜻한 것이다. 왠지 엄마의 품 속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같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작품은 시각 장애인들도 손을 댈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볼 수 없는 작품을 손을 대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철은 이미 물체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난 것이다. 철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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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장이 있는 철

나의 철 조각은 뛰고 있다. 조각을 만지면 아주 가벼운 진동을 느낄 수 있다. 철 작품 내부에 실제 나의 심장 박동을 녹음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관객은 나의 심장 박동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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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숨 쉬는 철

철 조각 내부에 펌프를 설치해서 공기가 흐르게 만든다. 호스를 통해 공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관객은 철 조각 안에서 마치 철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임지연, 몸의 투쟁, 너의 몸은 전쟁터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영화 301 302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한 여자는 신경성 식욕부진을 앓고 있고, 다른 한 여자는 신경성 폭식증이라는 또 다른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폭식증에 걸린 여자는 원래 요리사로서, 남편을 위해 요리하는 일과 섹스 파트너 말고는 할일이 없다. 그런 여자에게 남편은 점점 싫증을 느끼고,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여자의 요리하는 일은 점점 먹는 일과로 변질된다. 식욕부진을 앓고 있는 다른 여자는 자유기고가로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몹쓸 일을 겪은 이후로 성을 멀리하고, 덩달아 음식마저 거부한다. 그런 여자에게 폭식증에 걸린 여자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어줄 새로운 대상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매번 음식을 가져다주고, 그녀는 그녀대로 그 음식을 매번 쓰레기통에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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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임지연이 주제로 삼고 있는 살과 음식과의 관계와 관련한 의미 있는, 흥미진진한 사실들을 예시해준다. 즉 섭식장애의 원인이 신경성이라는 점, 그 중에서도 특히 좌절되거나 왜곡된 성적욕망과 관련이 깊다는 점, 그리고 그 결합(성적외상과 섭식장애의 결합)이 종래에는 불통과 소외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섭식장애는 문화병의 한 유형이다. 성적 결핍이 공허와 권태(권태만큼 현대적인 질병이 또 있을까)를 불러오고 그 빈 자리를 음식으로 대체하는 것이며, 정신적 외상을 몸에 대한 파괴충동(몸에 대한, 몸을 통한 단죄 혹은 처벌?)으로 보상받는 것이다. 외관상 성적외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 이를테면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려는 정상적인 동기 역시 알고 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성적외상을 미리 피하려는 심리적 과정에 의해 추동된 것이란 점에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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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입(구강기)은 동시에 의식(외상)을 지우는(적어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의식한) 행위란 점에서 배설행위(항문기)와 통한다. 먹는 쾌락(고통?)과 싸는 쾌락(고통?)이 공모하는 것이며,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단죄가 이율배반적으로 연동된 것이다. 살과 음식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그 의미가 정신적 외상과 섭식장애와의 관계로, 욕망(특히 성적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단죄의식과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된다.

한편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살과 음식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심리적 외상에서 나아가 자본주의의 기획과 맞물린다. 즉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필요생산물 이상의 잉여생산물을 생산하며, 이는 그대로 필요양분 이상의 잉여양분을 체내에 축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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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잉여양분이 각종 질병을 불러들이고, 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재차 자본이 투여되어져야 한다. 이 일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입맛을 길들이는데, 각종 화학첨가물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화학첨가물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이와 동시에 각종 질병을 퍼트리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 화학첨가물들은 무슨 예쁘고 아기자기한, 귀엽고 깜찍한 팬시상품들 같다. 그 속에 독을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은,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유혹은 작은 욕망으로 하여금 더 큰 욕망을 원하게 하고, 없던 욕망마저도 만들어낸다. 유혹과 욕망이 없으면 자본주의도 없다. 결국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환영이다. 임지연의 작업은 이렇듯 살과 음식과의 관계와 관련한 심리적인 외상을 다루는 한편, 때로는 자본주의가 그 심리적 외상을 유혹하기 위한 기제로서 전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임지연 | 작가노트

체계성을 가지고 순환하는 이 사회에는 많은 구성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 기능하며 존재한다. 인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서 이성과 감성을 배분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 문제없는 듯 평온한 흐름 속에서도 각각 작은 요소들끼리의 갈등이 발생한다. 언뜻 사소한 듯싶으나 이 충돌은 점점 불거진다. 이 엄연한 대립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인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의 형태로 드러난다.

인간은 이런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을 취한다. 이런 정신적 방어 자세는 곧 비만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현상이 사회를 대변하듯 사람의 몸 자체가 정신의 반영에 따른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대사작용-순환과 소화, 배설-등이 어긋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음식을 섭취하고 그것을 소화하며 유지되는 몸이 과도한 섭취로 인한 잉여에너지의 축적으로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초 대사량이 감소하고 소화와 배설에 문제가 생기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며 곧 모든 대사 작용은 극한의 상황, 마비의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며 인간은 쉬지 않고 신체에 과도한 영양을 공급한다. 소화되어 흡수되는 적정량을 넘어서면 나머지는 몸 속 곳곳에 쌓이게 된다. 이때 생성된 불필요한 지방이 결국 몸의 외형변화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정신적인 치유라고 착각한다. 미각은 이런 착각의 우선적인 도구로서 작용하며 음식의 과도한 소비 이후, 빚어지는 비만이라는 결과를 충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 우리는 이러한 몸의 외적 변화를 일종의 심각한 증후군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고통에서 벗어난 충족과 쾌락의 상태라고 합리화시킨다.

몸으로부터 시작된 고통을 음식을 통한 쾌락- 정신적 충족감-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노력은 부질없게도, 또 다른 신체적 고통-비만-이란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사회 속 현대인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통해 혁명이라 지칭할 수 있는 급속한 문명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수없이 등장한 문명의 이기로 인해 삶의 형태는 달라졌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사학자들을 비롯한 일부는 진보로서의 역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진정한 진보와 풍요로움을 이루었는가? 오히려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은 끊임없는 내부적 갈등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곳곳에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문제들이 산재해있다.

그것들은 다만 문명이라는 미명하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나의 작업은 설치, 비디오와 사진으로 지극히 문명화된 현대 사회와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개인을 표현한다. 비만으로 나타나는 정신적 증후군은 쾌락이란 형태로, 고통스러운 현대인을 위로해주는 도구로 둔갑했다. 대중들도 내 작품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고 만지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내 작품의 외양 –형태와 색- 에서 시선을 두며 아름다움이 주는 위안을 받는다, 여길 것이다. 그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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