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1-02-09 ~ 2011-02-15
김희진
02.730.4854
JH GALLERY에서는 'ST-AR-TING 신인발굴 프로젝트'의 선정작가 기획전을 개최합니다. 'ST-AR-TING 신인발굴 프로젝트'는 미술대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년간의 과정 중 선정된 5명 작가의 개인전으로 이루어지며 2011년 2월 9일부터 15일까지 김희진 작가의 전시가 열립니다.
김희진 작가는 자신이 대비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자신만이 믿고 의지하는 사물, 행동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징크스’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물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닌 그것을 통해 행운을 가져다 줄 어떤 존재 혹은 현상을 믿는 것으로 일반적인 불운의 징크스가 아닌 자신만의 긍정의 징크스를 만들어낸 작가는 그것을 개인만의 종교화하고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듯 자신이 만들어낸 징크스를 믿고 따릅니다. 그런 행위로 인해 내가 기대고 의지하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게 하여 불안감을 덜어내고 긍정의 마음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온 작가의 성장기와도 같은 ‘st-ar-ting 신인발굴 프로젝트’ 는 단기적 지원에서 벗어나 작가의 가능성을 믿고 꾸준히 지원하여 창작열을 이끌어내는 장기적 지원의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도 JH GALLERY는 지속적인 지원으로 역량있는 작가들을 위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것입니다. JH GALLERY의 행보와 작가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작가노트>
개인적 징크스의 종교화 작업
1. 나의 종교성
사람들은 누구나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종교성이란 단어의 의미는 초인적인 어떤 대상에 기대고 의지하여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성정에 한정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종교성을 지닌, 종교적인 사람이다. 나는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내가 열심히 그것을 믿고 따랐을 때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가진 종교성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부모님 모두가 직장 생활을 하시고 난 할머니 댁, 친척집, 다른 사람 집에 맡겨지며 자랐다.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나는 항상 보모님이 나를 두고 어디로 떠날 거라는 마음이 커져 불안증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심해져서 집, 부모님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고 사회성이 부족해져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기도 했단다. 사실 이 시절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이 거의 없고,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난 내 주변에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혹은 그것이 사라져 버릴 조짐이라도 보이면 매우 불안해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잠시 집 앞 가게에 가신 사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항상 집 앞에서 울고 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불안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나는 항상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걱정하고 그것에 미리 대처하려 하며, 모든 것이 대비되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떠날 때도 여권과 티켓 등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까봐 복사본을 3,4개는 만들어서 넣을 수 있는 주머니에 다 챙겨 넣고, 시험 때는 새로 산 펜이라도 혹시 안나올까봐 2,3개는 더 챙겨간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일에도 미리 걱정하고 대비책을 다 마련해 놓았을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이러한 예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안증이 나를 어떤 것에 의지하게 하는 종교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예를 든 상황과 같은 일상에서의 사소한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의한 불안증은 약간의 대비, 준비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대비할 수 없는 상황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죽음이나 사고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나보다 더 유능하며 초인적인 존재에 기대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에 기대고 의지하는 행동을 통해 나는 내가 대비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대비한다고 느낀다.
2. ‘징크스’ 형성 과정
하지만 이렇게 종교적인 인간인 나는 역설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종교에 회의적이고 혹은 배타적이기까지 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나 역시 종교를 의심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왔다. 이렇게 나는 종교적인 인간인데 반해, 기존 종교에 의존할 수 없는 환경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대신 나만의 믿고 의지하는 사물, 행동을 갖게 되었다. 나는 나의 종교성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으며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나는 이것을 ‘징크스’라고 부른다.
이것의 형성 과정을 밝히기 전, 우선 이것이 ‘징크스’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겠다. 일반적인 의미로 징크스는 선악을 불문하고 불길한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현상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일등을 말한다. 즉, ‘~하기만 하면 이렇게 좋지가 않다.’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넓게, 징크스란 말은 좋고 나쁨을 떠나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을 말할 때 쓰인다. 징크스는 일종의 미신이며 인과관계보다는 우연의 결과가 더 많다. 그러나 징크스가 미신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원인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력한 상황에서 자기가 결과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현상, 즉 ‘통제의 환상’에 빠지고 싶어 하는데 징크스는 그런 환상을 만들어 낸다. 나만의 사물이나 현상을 믿고 의지하는 이런 경향은 일반적인 징크스와 그 성격이 많이 닮았다. 보통 부정적인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더 많이 쓰이고, 운동선수의 상황에 대해서 더 많이 사용되는 징크스라는 용어보다 ‘미신’이라는 단어가 나의 사물이나 행위를 믿고 따르는 특징을 설명하기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처음 이러한 믿음이 생길 때부터 이것을 ‘징크스’라 불러왔고 이제 이 용어는 나에게 나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포함한 어휘가 되었다.
나의 많은 ‘징크스’들 중 노란 버스를 본 하루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징크스’, 시험 날 빨간 펜과 검은 펜을 꼭 여러 자루를 챙겨가야 시험을 잘 본다는 ‘징크스’가 있다. 이러한 ‘징크스’는 형성과정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징크스’들이다. 예를 들어 노란 버스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징크스는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노란 버스 ‘징크스’는 우연한 순간 누군가가 말해준 ‘징크스’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가볍게 흘려들어지지 않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것을 듣고 기억한 뒤 나도 모르게 그 ‘징크스’를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 거리에서 노란버스를 찾아 눈을 돌렸고 노란 버스를 일부러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징크스’에 맞게 행동 했을 때 좋은 일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노란 버스를 본 상황을 원인을 여겼으며 이러한 원인이 결과를 좋게 만들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징크스’는 누군가에게 듣고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의 것이 많다. 예를 들면 파란 살수차를 보면 운이 안 좋다든지 이름을 붉은 색으로 쓰면 안 된다든지 등의 것이 있다.
두 번째로 온전히 나만의 것인 ‘징크스’가 있다. 예를 들어 빨간 펜을 여러 자루 챙겨 가면 시험을 잘 본다는 ‘징크스’가 있다. 시험 기간 중 하루, 다른 날 보다 빨간 펜을 더 많이 챙기게 되었는데 그 날 우연히 다른 날 보다 시험을 더 잘 보게 되었다. 나는 다른 날과 달리 빨간 펜을 더 많이 챙겼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에도 이같이 하면 시험을 더 잘 볼 것이라 생각하며 이것을 새로운 ‘징크스’로 만든다. 이것은 누구에게 듣고서 그것을 시험해보고 그 결과가 확인되면 그것을 따르는 과정의 ‘징크스’와는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징크스’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의 ‘징크스’들이다. 시험기간에 꼭 빨대가 꽂힌 커피를 마셔야 하는 ‘징크스’, 왼손에는 반지, 오른손에는 머리 고무줄을 끼고 나가야 무사하다는 ‘징크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형성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위의 두 종류의 ‘징크스’는 내가 나의 상황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며 결국 내가 ‘징크스’를 철저하게 따르도록 한다. 그리고 ‘징크스’를 따르는 나의 행위는 이제 나의 몸에 완전히 배어버려, 중요한 일이 있거나 시험이 있는 날이 아니어도 항상 생각나고 신경 쓰게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3. ‘징크스’의 종교화
종교가 없는 나에게 ‘징크스’는 마치 종교인의 종교와 같은 존재이다. 나는 나의 주변 종교인을 보며 그들의 삶에서 종교가 어떤 정도의 영향을 주며, 어떠한 의미인가 알게 되었다. 내가 느끼고 들은 바에 따르면 종교는 그들에게 모든 일을 결정할 때 기준이 된다. 종교는 항상 그들의 삶에 관여하며 그들로 하여금 항상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따르게 한다. 나의 ‘징크스’ 역시 나의 결정에 항상 관여하며, 나 또한 나의 ‘징크스’를 매순간 생각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도로에 있게 된다면 항상 노란 버스를 찾게 되고 그것을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종교인에게 종교가 중요하고 가치 있는 만큼 나에게 나의 ‘징크스’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교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것으로 나의 징크스와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과 경전 같은 것이 있으며, 긴 역사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있는 넓은 범위의 것이다. 나의 징크스는 긴 역사를 갖거나 성경이나 경전과 같은 믿음의 근거가 되는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없으며 나 혼자 믿는 것이므로 이런 점은 종교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종교와 나의 ‘징크스’를 같다고 말하는 부분은 종교인 개인에게서의 종교를 의미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종교가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되며 항상 그 종교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이 내가 나의 ‘징크스’를 믿고 따르는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다. 즉, 용어를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의 ‘신앙생활’이 내가 ‘징크스’를 따르는 행위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징크스’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나의 ‘징크스’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을 이용한다. 종교인들은 종교적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닌, 종교적 대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신이나 뜻을 믿는다. 그들은 교회의 십자가가 달린 교회 첨탑, 불상과 같은 그 조형물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닌 그것을 통해 경외심 같은 감정을 느끼며 신이나 절대적 존재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신의 존재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그들이 신 대신 숭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종교를 알리며 감화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도 ‘노란 버스를 보면 그 날 하루 좋은 일이 생긴다.’는 징크스에서 나의 노란 버스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닌, 노란 버스를 통해 행운을 가져다 줄 어떤 존재 혹은 현상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노란 버스를 대표하여 표현함으로써 내가 기대고 의지하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게 한다. 물론 나는 기존의 종교와는 다르게 나의 노란 버스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노란 버스를 믿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의 노란 버스를 보고 내가 노란 버스에 ‘징크스’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에 의지하고 기댄다는 것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4. ‘징크스’에 대한 나만의 종교적 표현
나의 징크스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우선 이전의 방법, 즉 기존 종교미술, 종교적 조형물 등에 나의 징크스 사물을 대입하는 방법을 떠나 나만의 종교적 표현 방법을 시도했다. 우선 기존의 종교미술에 나의 ‘징크스’ 사물을 대입하는 방법은 나의 ‘징크스’가 다른 종교에 종속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종교, ‘징크스’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 종교와는 다른 나만의 화면 구성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영험함이나 숭고함과 같은 종교적인 느낌을 가장 많이 받았던 상황을 떠올리거나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1) 하늘 높이 있는 형상 2) 한 가지 종류의 사물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상 이 두 가지였다.
1) 하늘 높이 있는 형상에서 종교적임을 느꼈던 계기는 교회 첨탑을 본 경험에서이다. 교회 건물에서 가장 높게 짓는 것은 첨탑이고 그 첨탑 위로 십자가가 있다. 나는 항상 그것을 볼 때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다봐야 했고 첨탑은 항상 하늘과 함께 보였다. 그리고 하늘이 흐리고 구름이 많던 어느 날 교회 첨탑을 올려다보았는데 첨탑의 색은 붉었고 그것 바로 옆으로 구름 속에 해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광경에서 첨탑은 하늘의 해와 동등해 보이면서 영험한 존재같이 느껴졌다. 나는 높이 있고 또한 하늘과 가까이 있는 것을 보며 종교성을 느낀다.
2) 한 가지 종류의 사물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상에서 종교성을 느끼기 시작한건, 나의 종교적인 경험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작년 여름 경주의 불국사를 방문 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화려함도 아닌, 대웅전의 웅장함도 아닌, 절 뒤편에 놓인 수많은 돌탑들이었다. 그 돌들은 화려한 색으로도 이루어져있지 않고, 생긴 모양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회색, 울퉁불퉁한 모양으로만 이루어진 돌이 반복적으로 쌓여있는 모습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무언가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함, 절실함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고, 그것은 불국사의 탑, 불화, 불상 그 어느 것보다도 종교적임을 느꼈다.
그리고 돌탑에서 본 ‘쌓는 행위’는 그 종교적인 분위기 외에도 나의 징크스와 어딘가 닮아있었다. 사람들이 돌탑을 쌓는 행위는 그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종교적 행위를 모방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쌓은 돌탑을 보고 나도 자연스레 돌탑을 쌓게 되고, 이러한 돌탑은 경주 불국사에 특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느 절, 어느 산에서나 쉬이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습관적 행위’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습관적인 종교적 행위’가 나의 ‘징크스’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징크스’가 만들어지는 과정 중 하나로 나는 누군가의 ‘징크스’를 모방하여 시험하고 확인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징크스’는 어느새 나에게 배어버려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쌓는 행위’는 ‘모방적인 종교적 행위’를 상징하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징크스’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종교적인 경험에 의거하여 징크스 사물들을 하늘로 띄우고 징크스 사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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