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수묵 고유의 기법에 충실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병행하고 있는 안영나의 근작전은 작업에 대한 작가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전시장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두 점의 대형 작품은 <꽃인가, 꽃이 아닌가>란 명제가 지닌 의미에 대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꽃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표상하는 기호 간의 상사적(相似的) 관계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인 ‘그림이론’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사물과 이의 표상적 기호인 단어 사이에서 파생되는 유사성에 대한 의문과 같은 열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사상에서 ‘가족유사성’의 개념을 들어 초기의 그림이론을 수정한 바 있지만, 안영나의 경우 사물의 이미지와 단어 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에 개념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 하다. 즉, 커다랗게 꽃을 그린 종이의 바탕에 꽃을 의미하는 ‘花’자를 비롯하여 ‘火’, ‘化’ 등 다양한 동음이의어를 인쇄체로 실크 프린팅한 것이 그것이다.
안영나가 보이는 이러한 실험은 한국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상 1970년대의 개념미술 이후 이런 시도는 종종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안영나의 이번 시도가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화의 경우 이런 시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안영나는 이번에 선보인 입체작품과 함께 꽃이라고 하는 사물의 궁극적 실체에 관한 탐색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꽃이라는 소재를 화두로 작업을 전개해 가면서도 꽃을 부인하지 않는 그의 태도다. 이는 그가 선염에 기반을 둔 활달한 필치와 함께 끝내 꽃의 형상을 버리지 않는 이미지 중심의 작화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로서는 그가 기왕에 언어적 접근을 꾀할 바에는 좀더 치밀한 개념적 분석을 통해 사물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해체하길 기대하는 바지만, 작품이 시각적 스펙타클에 머물러 좀 아쉬운 감이 있다.
안영나가 보여준 언어적 실험은 따라서 꽃의 형태를 철망을 통해 구현한 설치작업의 실험에 있어서처럼 다소 치열성이 결여돼 있다. 나의 이러한 인상은 분방한 필획으로 꽃을 그린 작품들이 개념을 압도하고 있는 전시장 전체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청색을 주조로 한 안영나의 이번 근작들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사의(寫意)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발언하고자 한 핵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꽃이라는 소재를 둘러싼 표현의 상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사물이 주는 진리 구경(究竟)에 접근을 꾀한 안영나의 시각이 기존의 수묵화의 관례에 의문을 던지는 실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영나의 이러한 접근법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대다수의 작품에 반영되지 못했다. 언어적 문제를 다룬 두 작품을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사의적 표현에 머물고 만 듯한 느낌이 짙기 때문이다. 적묵과 파묵, 선염 등 수묵화 고유의 기법에 대한 천착은 먹을 비롯하여 적, 청, 황 등 제한된 색을 사용하는 안영나 고유의 색감과 어울려 특유의 호방한 화면을 구축하고 있다. 색과 형태는 매우 세련돼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는 필시 안영나의 수묵에 대한 기량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꽃이라는 소재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안영나의 수묵화는 색감과 운필에 있어서 이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안영나의 꽃 그림은 사실 소재가 꽃일 따름이지 어느 경우에는 굳이 꽃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추상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가 묻고자 했던 것도 실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파생되는 어떤 경계의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그가 형사(形寫)와 사의(寫意)의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번에 제시한 사물에 대한 언어적 접근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안영나가 이번에 보여준 언어적 접근은 기존의 수묵화에 저항하는 하나의 몸짓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 하다.
김백균
유난히 늦게 찾아온 올 봄 안영나의 작업실에 다녀왔다. 안영나의 작업실을 나서는 오후, 봄기운 가득한 대기의 온기 속에서 벚꽃과 목련의 꽃잎이 흩날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내 머리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안영나 작업이 빚어놓은 화면 속의 꽃과 눈앞에서 지는 봄꽃이 끊임없이 오버랩이 되어 그의 작업이 던지는 메시지가 계속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안영나는 꽃의 상징과 기호를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의 꽃은 우리가 삶 속에서 늘 마주하는 벚꽃이나 목련 혹은 장미와 같은 특정한 꽃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꽃은 꽃이라고 여겨지는 이미지 혹은 관념에 불과하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한 어떤 특정 꽃의 재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꽃이라 여길만한 꽃의 보편적 특성을 담고 있다. 보편적이기에 관념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념적 보편에 의해 보이는 꽃의 이미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어떠한 단서를 통해 읽어 나가야 할 것인가. 나에게 있어 그의 작업의 요체를 간략하게 집어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요즘 흔히 하는 말처럼 예술품 창작을 1차 창작이라 하고, 비평을 2차 창작이라 하며, 컬렉션을 3차 창작이라고 한다면 작가가 말하는 “꽃이 아름다워 꽃을 그린다”는 작가의 순박한 창작동기를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영악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속은 끊임없이 작가가 꽃에 천착하는 또 다른 이유, 즉 작가 자신조차 의식화 하지 못한 암시적 의미를 비평의 눈으로 찾고자하는 오만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오만한 의식이 벗겨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 조경으로 심어놓은 벚나무들조차 아직 어려서 그럴듯한 자태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들고 날 때마다 아스팔트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그 고달픈 삶과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삶이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끼곤 했다. 어느 날 나무의 크기에 비해 몇 송이 피지 않은 빈약한 이 벚나무의 꽃조차 꽃비로 쏟아져 내리는 그 모습을 본 그 한 순간, 아 꽃이 아름답다는 안영나의 한마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답다는 말은 수많은 가치를 지닌 말이다. 단지 형상이 아름답다는 형식적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말에는 형식과 내용, 즉 존재와 언어가 하나로 통하는 삶의 진정이 배어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진리가 서려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안영나의 작업이 진정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느껴지는 한 순간이 있었다. 보편적 관념으로서의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꽃과 현실의 꽃이 하나의 의미로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꽃은 우주의 한 진리를 함축한 메시지를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봄에 나는 나이를 먹는다. 봄에 나는 세월을 느낀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변화를 느끼는 나의 촉각은 거칠고 무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자연의 순차적 흐름 속에 있다. 그래서 그 시간의 흐름은 차츰 일상으로 여겨지고 나의 감각은 계절이 주는 자극에 무감각해진다. 그러나 겨울에서 봄으로의 전환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 속에서 온다. 그만큼 명확한 의식의 자각을 동반한다. 삶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 희망의 단서를 발견하는 기적과 같이 모든 것이 동토에 갇혔다고 생각되는 순간 새 생명의 순환이 준비되는 봄의 이치는 언제나 경이롭다.
누가 뭐래도 봄의 절정은 꽃이다. 나의 인식에 있어서 봄꽃이란 삶의 가장 극적인 경이의 표상이다.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은 마른 대지 거친 세상을 밝히는 등불처럼 온 몸으로 생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 곳에 붙박이로 살아가는 식물만큼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것이 있으랴. 식물은 꽃으로 반전의 계절, 모든 존재가 깨어나는 그 생명의 시간을 알린다. 식물의 투쟁은 꽃으로부터 시작한다. 꽃은 씨를 만들어 번식 기능을 수행하는 생식 기관이다. 삶을 위해 모든 유혹의 기술을 발산했던 꽃이 시드는 것은 화사한 유혹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양육의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전주곡과 같다. 봄이 끝나는 것이다. 그 이후의 여름은 열매를 맺기 위한 양육의 시간 즉 견디기 어려운 인고와 인내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봄을 알리는 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본질을 그리고 순간과 영원을 되돌아보게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봄에는 왜 모든 것이 소생하는가? 우리는 왜 그토록 처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왜 영원을 지향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답 안에 꽃이 ‘아름다운’ 의미가 스며있다. 그 안에는 유혹과 생식, 투쟁이라는 자연의 법칙과 절정과 환희, 숭고의 인문적 가치가 담겨있다. 안영나의 작업은 꽃의 기호와 상징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언어는 존재를 담지 못한다. 가까이는 들뢰즈나 가타리 같은 현대의 철학자에서부터 멀리 그리스의 철학자까지 기호학이나 해석학에서 형이상학까지, 근대 오감도와 종생기를 남겼던 이상(李箱)의 고민에서 노자나 석가모니의 사유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각자들의 고민은 언어가 존재를 담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가 신의 말을 인간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 모습 속에 철학과 예술의 고민이 있다. 무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색을 어떻게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할 것인가. 철학과 예술의 근원적 문제는 결국 이 문제로 돌아서지 않겠는가. 안영나의 고민 역시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의 작업이 어떻게 하여도 표현되지 않는 존재를 ‘아릅답다’ 라는 말 속에 존재의 형식과 내용,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고 그것을 꽃이라는 관념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잡히지 않는 의미를 잡고자 하는 시도, 결국 그것을 하나의 예술행위로 본다면 관념적 꽃을 통해 안영나가 표현하려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그 반전, 모든 존재가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투쟁하는 삶의 경이, 일체 유혹의 기술로 생존을 모색하는 생명의 욕망, 즉 삶의 현상과 본질 같은 것이지 않나 싶다.
그의 꽃은 구체적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재현(representation)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는 이는 추상적 사유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의 꽃은 꽃의 보편적 관념에 기인하므로 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의 작품에서 꽃의 형상을 읽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꽃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이다. 꽃을 그렸지만 꽃은 아니다. 공간중심의 시각으로 그의 작업을 축소하여 미시적으로 보거나 이를 확대하여 거시적으로 본다면, 그의 작업은 꽃의 속성이 사라진 미세한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무질서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저 광대한 밤하늘 우주의 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시간중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순간과 영원이 공존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순간이다.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단지 스쳐가는 찰나이다. 꽃은 투쟁의 가장 치열한 순간 존재의 절정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간을 좀 더 미시적으로 혹은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절정이지 않은 순간이 어디에 있는가. 삶은 순간순간이 절정이다. 삶 속에서 어디 한 순간 의미 없는 순간이 있었던가. 그 의미의 체계는 인위적 체계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삶은 매 순간이 절정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우주와 절정에 가 닿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 속에 꽃은 어디에나 있다. 순간이지만 영원이 되고, 한 순간의 모습이지만 우주가 되는, 모든 존재와 합일이 되는 지점. 안영나의 꽃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다.
안영나는 꽃에 대한 관념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문자를 도입한다. 문자는 그 자체로 이미 강한 상징적 기호체계를 지닌다. 의미를 지닌 문자를 의미 없는 배열로 보여줌으로서 그 상징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을 위한 안영나의 배려이다. 동시에 문자는 그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단서이기도 하다. 논리화된 의식을 따라 그의 작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순간 서로 다른 상징들 속에서 어떠한 의미의 긴장을 읽도록 하는 장치인 셈이다. 그것은 관념과 실체를 명확히 구분하고자 하는 것으로, 안영나는 자신의 작품세계가 관념적 세계이며 관념화 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실체에 집착하고자 하는 의식을 차단하는 것이다. 안영나는 그동안 많은 작가들이 매달려 왔던 실체와 실재에 대한 환상을 허물고 관념을 관념으로 바라보자고 제시한다.
그의 작업 주제가 꽃에 관한 것이지는 하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꽃이나 우주 역시 인간의 의식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들이다. 그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 아니라, 꽃이라는 이미지에 투영된 인간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미시와 거시, 파괴와 창조, 구체와 추상, 순간과 영원, 불완전과 완전 같은 개념적 대비를 통하여 매 순간 우리의 삶이 삶의 절정임을 보여준다. 꽃의 절정은 우주의 절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꽃은 어디에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