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길
김기택이라는 작가와의 오랜 만남 및 그의 작품세계를 떠올리노라면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순박한 부끄러움이 수줍은 듯 숨박꼭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충청도에서 성장하면서 형성된 촌놈 특유의 순박함과 정직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내밀한 욕망의 분출에 대한 의식적인 절제 등이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인간관계 및 작품을 통해 치열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삶과 예술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태도는 우직하면서도 진지하다. 이러한 정서와 삶의 바탕 위에서 마련된 김기택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가식과 허위의식의 짙게 드리운 먹구름 속에 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처럼 맑고 상쾌하면서도 가슴이 찡하다. 바로 우리 모두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너무나도 영악하게 익숙해진 가식과 허위의식에 대해 거울처럼 되돌아보게 하는 작가의 말없는 가르침 때문이다.
김기택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현대예술의 정체성 부재 및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작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양의 조형기법과 한국적 정서와의 만남이라는 풀어내기 어려운 화두를 놓고 끈덕지게 씨름하는데 가치의 생산적 계승을 표방하는 전통과 시대적 요구의 역동적 수용을 표방하는 변혁의 논리로 조심스럽게 답을 찾아 나선다. 작가 김기택은 전통적 심미의식 및 정신적 가치의 표상으로 찾아낸 산업문명의 욕망에 짓눌려 잊혀져가는 자질구레한 낡은 추억의 사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에 맞춰 나무결의 무늬를 살린 무늬목 등을 활용하며 실험적 작업에 몰두한다. 이러한 모색으로부터 색채나 사물 표현의 자유로운 공간적 배합 및 무늬목 재료 등의 오브제적 사용 등을 통해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모나거나 튀지 않는 안온한 자연의 품속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에 익숙했던 심성을 드러내듯 현대적 삶의 메카니즘으로부터 소외된 자아와 자연에 대한 탐색과 발견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이것이 요즈음 작가 김기택이 작품 속에서 추구하는 바로 ‘사생의 정신과 사실의 기법을 통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정직한 삶 속에서 이루어진 진지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그려낸 작가의 사진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소외되고 분열된 채 시간과 공간 위를 외롭게 떠도는 현대인의 공허한 상실감을 자신의 모습 속에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고집스런 존재확인이 작지만 또렷하게 부각된 자연 속에서 발견한 꽃과 새 등의 이미지로 화면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성숙된 모습은 자신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원초적 외로움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면서 어느 날 문득 다가온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위안과 외로움을 함께 하던 자연에 대한 깨달음부터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관조와 자기성찰은 사생의 정신과 사실의 기법 사이에서 감춤과 드러내기의 숨박꼭질처럼 출몰하는 내밀한 욕망과 열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도록 이끈다.
예술은 모방과 재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예술가는 현실이나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통해 새롭게 변형시키는데, 이것이 시각적 정보의 단순화와 강조, 변형, 왜곡을 수반한 이미지 구성으로서의 예술적 표현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술가의 의식과 창작은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고 느끼며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마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작가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사물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인식을 형성하며 보다 승화된 미적 구현을 위한 예술적 창조의 바탕이 이룩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상에 대한 관계인식의 발견이며 예술적 창조를 위한 재해석인 것이다. <아침이슬>시리즈, <참새> <황금새>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 김기택이 추구하는 독특한 조형언어는 사생(寫生)과 사실(寫實)의 세계를 뛰어넘어 사의(寫意)를 추구하며 ‘물화(物化)’의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동양적 사유구조의 인식틀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 즉 장자(莊子)의 ‘물아일여(物我一如)’에 바탕을 둔 정경융합(情景融合)에 의해 표출된 이미지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치에 바탕을 둔 동양의 세계관 속에서는 도(道)를 모든 창조의 기본 동력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도의 본질을 체득하기 위한 인식의 출발점은 장자(莊子)의 말처럼 ‘지각에 의해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직관인 기(氣)에 의해 파악하는’ 순수한 본질적 직관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조화(花鳥畵)를 비롯한 동양의 예술에서는 객관적 실경과 주관적 의경이 하나로 녹아드는 정경융합을 추구하기 때문에 예술창작이 구체적인 도의 구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 김춘수님의 대표작 〈꽃〉의 전문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가 김기택의 <아침이슬>시리즈 등의 작품을 마주하노라면 문득 이 시가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꽃을 소재로 삶 속에서 치열하게 걸러낸 인식의 지평을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꽃은 김기택에게 아름다움이나 향기로움으로 다가오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쎙떽쥐뻬리의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물을 주고 가꾸면서 특별한 관계인식이 돋아난 것처럼 작가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꽃의 존재가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존재의 존재로서의 의미와 가치는 주체의 의식과 만나 관계를 맺을 때 이루어진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 앞에 놓인 존재 또는 대상은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며 스쳐 지나가는 몸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체의 의식이 존재나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만남이 이루어질 때 존재 또는 대상은 스스로 문을 열고 자신의 의미와 본질을 드러내며 주체와 서로 소통하게 된다. 김기택의 이러한 관계의식의 지향성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주변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작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상적이고 친근한 아름다운 이미지로 각인된 채 마음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피고 지는 것이 꽃이다. 그러나 김기택의 꽃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서정성을 뛰어넘어 자연의 질서와 변화 속에서 발현하는 기운생동한 에너지, 즉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이 감동적인 인식의 변화는 창작의 일과 일상적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평범한 진리의 자각으로 이어지면서, 꽃이라는 소재가 지닌 부귀와 복록 등의 전통적인 상징성을 뛰어넘어 그 생명력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탐구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환기된다. 아울러 이러한 관계인식을 통해 꽃과 하나가 된 장자(莊子)의 ‘물화(物化)’의 경지를 체험한 김기택은 꽃을 그리는 작업 속에 자신의 삶으로부터 촉발되는 내면의 의식들을 투사시켜 드러내고자 한다. 꽃과 함께 그려지는 참새와 황금새 및 고독한 유토피아 속에서 살며시 손짓하는 <참새> <황금새> 등의 작품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삶 속에서 창작의 보다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노력한 근래의 김기택의 의식의 흐름들이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을 일궈내고 있다.
‘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만이 볼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발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아침이슬>시리즈 작품들의 꽃망울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우리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대상들과의 만남 및 그 관계로부터 형성된 이미지가 소중한 의미를 지니며 내 의식 속에서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때 진정한 아름다움도 내 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과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작품세계에서는 의욕과 열정이 앞선 나머지 관념과 의식의 설명적 표현이 곳곳에서 배어나고 있어 지나치게 산문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면 화가로서의 영원한 화두일 수도 있겠지만 ‘꽃은 웃어도 웃음소리 들리지 않고, 새는 울어도 눈물 흘리지 않는다.’는 동양적 시적 정취나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동양적 사유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응축시키는 시적 변모와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김기택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과 의식의 우물 속에서 체험하며 느낀 정체성의 근원, 삶의 본질 등을 꽃과 새 등 자연 속 사물들의 발견을 통한 자신과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두레박질하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통해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러한 늘 변화를 꿈꾸는 새로운 자신과의 만남과 깨달음이 작가의 손길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창작 작품 속에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자아실현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시지프스의 고행과도 같은 김기택의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이번 전시에서 우리들에게 그림다운 그림이란 과연 어떤 그림인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보내는데, 결국 회화의 본질은 작가의 의식과 대상의 만남을 통한 관계의 이미지일 따름임을 확인하며 회화의 조형적 본질 속에 숨어 있는 은유적 내용들을 회화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동양의 전통회화에서 추구하는 작품의 이상적인 형식은 회화의 기초적 토대인 형사(形似)를 바탕으로 대상의 본질에 해당하는 신사(神似)를 구현하고 작가의 사의(寫意)를 펼쳐낼 것을 요구한다.
작가 김기택은 오랜 세월 담금질한 리얼리즘 표현기법을 바탕으로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자연의 이치인 도가 깃들어 있다.’는 동양의 전통적 사유구조를 되새김질하듯 묵묵히 익히면서 그 방법론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예술창작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새로운 탐색과 시도는 하나의 나침반으로서 작가에게 선택과 책임을 요구하는 동시에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으로 다가온다. 즉 대상의 정신과 본질을 닮게 그려낸다는 의미인 ‘신사’에는 대상과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의 관점과 태도가 표명되기 마련으로, 예로부터 이 ‘형사’와 ‘신사’의 관계는 화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며 씨름하는 화두였는데, 작가 김기택은 이 화두를 ‘사생의 정신과 사실의 기법을 통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현대적 해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작가 나름대로의 경험과 숙달을 통해 이러한 관계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작가는 자신이 인식하여 표현하는 대상에 자신의 의식과 정감이 녹아든 작품을 통해 현대라는 시대정신의 가치와 의미를 반영한 정체성의 새로운 모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김기택의 이번 전시는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희망찬 봄의 전령이며 고매한 인간 정신의 상징인 매화를 핵심 주제로 창작한 <아침이슬> 시리즈 작품들은 정교한 기법의 유화 작품이면서도 동양적 정서 물씬 풍기는 새로운 교감과 통섭의 물꼬를 트려는 탐색과 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양적 정서는 아스라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포착 스냅사진처럼 제시된 <참새> <황금새> 등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부각되어 잔잔한 미소 속에 추억으로 젖어들게 한다. 물론 한 화면 속의 꽃과 새의 비례라든가 면 분할을 통한 공간 배치 등에서 서양화의 형식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도 눈에 띄지만, 전통 화조화가 지닌 여백이나 구도 등의 구성요소들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창조적인 융합으로 발전시킨다면 동서양을 아우르는 참신한 현대적 화조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품들은 동양적 정신과 서양적 기법을 교묘하게 접목시킨 현대적 감각의 새로운 조형표현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근래 새롭게 느끼기 시작한 긍정적인 세계관과 작가로서의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욕적인 이러한 시도에는 전체적인 구도나 구성면에서 아직 정제되지 않은 조형적 표현과 설명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묻어나는 가운데 동어반복적인 경향도 엿보이는데, 바로 이 점이 작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과도기로서 하나의 과정 속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표현대상의 겉으로 드러나는 정교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표현을 넘어 그 내면에 감춰진 본질과 상징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아낼 때 작가 자신과 대상과의 공감 및 관객과의 소통이 한층 깊어질 수 있는 법이다. 작가의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 작가 김기택이 떠나는 ‘사생의 정신과 사실의 기법을 통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행복한 여행의 결과물들은 우리에게 은밀한 속삭임으로 다가와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맛보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