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전시내용
정규옥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경험하는 개인적인 감성을 캔버스 위에 그려낸다. 비가 오면 비의 감성으로 눈이 오면 눈에서 느끼는 감성처럼, 수많은 것에 대한 상상력, 공간, 노동자, 도시, 망각, 사상의 자유, 현실, 두려움, 기억, 숨결, 폐허 속 박하 향기, 온전히 다른 것이면서 하나인, 소멸, 상실, 밤의 모습, 세상을 향한 사랑, 무관심, 공허. 비합리적인 감정, 권태, 폭식, 덜 구운 덩어리들, 위로 할 수 없는 망막 등등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삶의 편린들이 그 자신의 손을 통해 캔버스 위를 한바탕 퍼포먼스처럼 지나가면, 캔버스는 카타르시스의 장이 된다.
이번 정규옥전은 갤러리 담의 2011년 두 번째로 마련한 신진작가기획전이다. 작가는 동덕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에서 국립뭰헨조형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작가노트
우주, 자연, 사람, 밤, 대지, 어머니, 고독, 편지봉투, 나무, 바람, 자기확신, 상상력, 공간, 노동자, 도시, 망각, 과정, 사상의 자유, 현실, 진리......
두려움과 기억 사이, 숨결, (그리고 쉼표), 폐허 속에서 날리는 박하 향, 온전히 다른 것이면서 하나인, 밤의 선율, 삶의 정점, 깊은 고통(가까이에 있다), 어둠의 침투, (학살을 침식하는 생성의 평화); 사건의 도시, 읽기 어려운 불만의 낙서, 소멸, 한 인간이기에, 저 먼 곳의 세상, 마음의 상실, 밤의 모습들, 보상심리, 행복한 죽음, 세상을 행한 사랑(삶을 향한 애정), 길들여진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잠자리와 나비, 분류, 완벽한 무관심, 공허의 힘, 위험한 연인, 비합리적인 감정, 권태의 절정, 폭식, 온전한 무관심,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아주 다정하면서도 통제된, 덜 구워진 덩어리들, 위로 할 수 없는 망막.
슬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슬픔에 견줄만한 우주는 없다, _
말이 될 수 없는 마음과 글이 될 수 없는 마음
있음,
; 생겨나고 스러짐을 거듭하는 허망한 세계에서 모든 것의 근본 원리는 전혀 변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있음'이다. (단순하고 항구적인 것은 언제나 내가 소망하는 것)
환상이란,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꿈을 꿔야 한다!!)
; 삶의 도피이며 정면대결에의 회피라는 생각은 좁은 편견의 오류일 뿐이다. 삶과 정면 대결하여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들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들은 모두 어둡고 습습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추정되는, 환상 또는 허상에서 비롯되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양식이 비롯 되는 곳은 환상이다.
(내게 우상 같은 존재)기형도_
(사랑해 마지않는) 나무,
; 약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나무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무의 온순한 성질을 누군가 정의 내리거나 깨달을 수 있다면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적어도 사랑 받을 때의 인간의 몸에서도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글 귀를 기억해낸다. 비가 나무위로 떨어지고 있지만 바람 한 점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아직 한 잎도 흔들리지 않는다......
꿈과 실천, 꿈은 언제나 실천에 선행하고, 재료에 대한 지식은 현실과의 접촉을 이야기해주며, 불확실성은 하나의 미덕이다(너무 멋진 말 아닌가!)/ David Bayles &Ted Orland_
_ 눈을 반쯤 감은 채 중심을 똑바로 바라보면, 갑자기 입체감, 질량, 색채, 촉감, 거리, 시간을 무시하는 새로운 질서, 보는 사람의 모든 생식 욕구를 제거하고, 사람을 위축 시키고, 기계화하며, 반(反) 존재의 최초의 표지이기도 한 새로운 질서와 만나게 된다. 나의 소통방식이다.
_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현실에서 나(또는 내 작업의 방식)는 잊혀져 가고 있는 인간의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요, 힘없는 자아 현실 세계에 대한 무언의 항거다.
!! 이 세상에 동정이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리는 '어두움'은 사실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표상하진 않는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과 자연 속에 녹아있는 따뜻함, 온기 다정함과 사랑 등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일체의 추상적인 평면 속에. (일반적이겠지만) 본인의 경험에 의한 선과 색감 등으로 공간은 자신의 감각과 내면을 느끼게 하기도 할 것이다. 문명화 되어감에 따라 비인간적이고 인공적인 것들로 채워지는 이 동정 없는 세상에서 내가 그리는 그림들로 인해 되도록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 몸에 내재된 본능적, 직관적 감각들을 움직여 자신의 내면과 감각에 예민해진 가운데 그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전시평론
정규옥 전
김승호
단순하고, 경쾌하고, 평범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기호. 밝고, 어둡고, 화려하고, 거칠고, 나아가서는 견고하고, 채워지지 않은 화면들. 화면의 구조도 자그마한 사각의 면들이 드러나거나 은닉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김환기와 60년대 등장한 모노크롬 회화가 연상되지만, 정규옥 작품의 특징은 기호이미지와 추상화의 결합에 있다. 규칙적인 사각의 캔버스가 색과 기호, 그리고 불규칙적인 붓자국으로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은 완숙되지 않은 화가의 생명력이 견고하고 두터운 층의 화면에 배여 있다. 배치된 색과 수수께끼와 같은 기호가 우리에게 회화의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작가의 그리는 행위는 화가의 생명수(水)는 어디에 있으며 생명력(力)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에서 출발하여 그리는 즐거움을 붓으로 들어낸다. 기호는 간간이 짧거나 길고 혹은 두툼하고 가느다란 붓의 흐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석이 불가능한 기호의 크기와 방향도 가지각색이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다시금 어두운 곳으로 관객의 눈을 자유자재로 유도한다. 점묘적인 기호와 그려진 기호가 모노크롬으로 통일감을 조성한다. 춤을 추듯 스쳐 지나간 붓자국. 볼 수 있고 확인되는 선과 색면들이 붓터치와 함께 한 공간. 이렇듯 붓은 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기호도 그리는 행위로 가시화되어 자연스럽게 해석의 억압에서 벗어난다. 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붓놀림. 화면을 관찰하는 눈. 작품과 관객은 밝고 선명하고 단순한 공간에서 불규칙적이자 비정형화된 리듬을 따라 교류한다. 화가의 생명력은 어떠한 체계도 규칙도 없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는 기쁨과 보는 즐거움.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와 함께 미학적 경험의 세계가 확장된다. 유희의 미학을 향하여 말이다.
유희의 미학은 사진과 매체미술에서 시작되었다.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단점이 코드로 대체되어 유희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유희의 미학에 회화가 동반하여 회화의 내용은 그리는 즐거움으로 전환된다. 이는 정규옥만의 쾌거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스컬리, 유럽에서는 균터 푀륵(Guenther Foerg)과 헬무트 페덜래(Helmuth Federle)가 합세하여 유희의 미학은 다원주의 미술에서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한다. 정규옥은 그리는 즐거움이 보는 즐거움을 동반한 이러한 회화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정규옥의 지도교수인 스컬리(Scully)가 그녀의 작업과정을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선 상에서 이해하듯이, 그녀의 작품은 비정형화된 색면과 계산된 기호를 추구하는 서양의 전통과 함께 자유분방하고 불규칙적인 붓놀림으로 화면의 효과를 스스로 드러내는 동양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는 강하고 부드럽게 계류 중인 화면의 빛으로 증명된다. 그녀의 작품은 무엇을 그려야 할까 하는 고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너지의 생성이나 혹은 대칭과 비대칭의 대립에서 생기는 긴장감도 아니다. 오히려 기호와 색의 형태가 그리는 즐거움을 대변하여 현재=그림을 직시하게 한다.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픽션과 리얼리티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현재라는 것이다. 삶이 픽션이고 픽션이 삶이 되는 현실. 따라서 미적 가치는 리얼리티도, 그렇다고 알레고리도 아니다. 이렇듯 다원주의의 미학에 현실이 반영되어 회화는 진행형이 되고 이 진행형이 회화가 된다.
다원주의 미술은 기술복제시대의 이미지에 그리는 즐거움을 합세하여 힘을 발한다. 작품의 존재방식이 다양한 다원주의. 탈진하고 쇄신한 회화의 역사에 현재의 허구와 회화의 유희가 합세하여 시각적 다원주의가 구체화된다. 다원주의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그녀는 해석의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를 담아낸다. 마치 건강하고 건전한 이성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표면에 들어난다고.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 해석=이성의 괴리감으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렇듯 해석이 불가능한 화면=현실은 내용이 설명되기 이전에 스스로 증명된다. 정규옥의 화면은 체계화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술사 담론의 가장자리에서 그 명목만 유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가벼운 제스처와 자연스러운 붓질이 화면을 구성하여 미적 가치를 가시화한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기호가 한 화면에 펼쳐진 것은 여러 개의 그림이 화면 속에서 조합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 이야기는 이내 허구라는 점이 드러난다. 곧 현실=허구, 해석=이성, 자아=현재, 화면=현실, 직시=그리기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이러한 공식이 기호와 붓으로 혼합되어 화면의 층이 두터워진다
정규옥의 유희미학은 추상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표현주의적인 성향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지의 이미지와 기호가 추상화의 기초이다. 거칠게 골고루 흐르는 붓놀림. 붓으로 추상을 번역하고 번역된 추상은 색으로 드러난다. 그녀가 서울에서 뮌헨으로 이주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갔는지,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불투명하다. 단지 그녀의 현재는 추상의 세계에 있고 이것을 우리는 밝고 선명한 화면에서 읽어낸다. 판독이 불가능한 색의 이미지는 추상화 역사의 저편에서 관찰자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밝은 대낮에 쏟아지는 은하수, 지하세계의 변화하는 지층들,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 혼자 있기 두려워 친구의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흩어진 과거의 추억들, 떨어지기 싫어 놓지 못하는 인연. 다양한 상상력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되어 하나 둘 포개진다. 이렇듯 그녀의 화면은 일정한 양식도, 평면이라는 한계의 극복도, 그렇다고 독백의 장소도 아니다. 확실한 것은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와 추상적인 이미지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간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후에 생겨난 자유로움이 그 자태를 드러낼 뿐이다. 그녀는 자유로운 손짓을 잊혀진 먼 과거에서 끌어온다. 가까운 과거에서 출발한 추상화가 여기서는 아주 먼 과거로 향하여 추상의 역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난다.
형식주의 미학에서 해방된 그녀의 손길은 자유롭다. 역사의 노정에서 이탈한 그녀의 손놀림. 그러다 보니 의례히 작품제작의 원리와 철학적 성찰 등 해석의 전제조건이 필수적이지 않다. 초기와 냉전시대의 추상과는 역행한다. 그녀는 추상화를 이해하는 기준을 세우지도, 규정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각의 캔버스에 춤을 추듯 가볍게 지나간 붓 자국이 크고 작은 기호와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이다. 힘이 넘쳐나는 젊음이 지나간 흔적에는 탈진하고 쇄신한 육체가 어둠을 찾아 휴식을 취한다. 숭고미도, 형식미도, 신추상도 아닌 단지, 충전과 탈진이라는 과정의 연속이다. 아주 보편적인 사각의 우주에서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추상적인 이론도 체계도 거부당한다. 보편 타당한 캔버스의 우주. 이 우주에 조용하고 다정다감한 사건이 발생한다. 주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신화의 세계가 해석 불가능한 기호와 이미지로 전환되는 사건이다. 혼돈과 순응이 분배와 배치로 전환된다. 추상에 대한 판단이 유보된 색의 논리가 수평과 수직, 원과 면, 번짐과 지움의 논리가 칠하고 그리는 행위로 가시화 되어 밝고 어두운 화면에 정착한다. 따라서 추상의 논리는 색에 있고 색은 그리는 행위로 설명되고 설명된 행위는 캔버스에 담긴다. 관객은 그리기와 색, 그리고 캔버스에서 추상화의 논리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 받는다. 그리는 행위와 화가의 생명력은 해석 이전의 단계로서 가장 원초적이다. 해석을 거부하는 색의 이미지가 이를 대변한다. 역사의 노정에서 잊혀져 간 인간의 행위에서 추상의 뿌리가 찾아지고 생명의 근원이 뿌리를 내린다
정규옥은 화가의 생명력을 보존하는 방법을 해석의 불가능성에서 찾는다. 추상의 역사가 지나간 후에 남는 것은 판독이 불가능한 기호와 행위가 된다. 위기와 허탈을 경험한 역사의 노정에서 마지막 남아있는 그리는 즐거움. 자유로운 손놀림. 바닥에서 출발하는 겸허함. 자아에서 출발하는 희망. 허구와 실재가 공존하는 현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현실. 기술과 예술이 결합하는 동시대 미술. 계류 중인 우리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는 여유를 보여준다. 기호의 배치와 색의 이미지는 경계가 모호한 꿈과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회화의 본질이 이러한 배치에 자리하여 설득력이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