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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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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 관심을 흐르게 하는 명상적 회화
| 인사아트센터2F 2011. 4. 6 - 4. 12, opening 4. 6(수) 오후 6시 |


최 광 진 | 미술평론가



정선과 마그리트의 만남
17-8세기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진경산수화를 통해 미술계를 풍미했던 겸제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벨기에에서 태어나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에 섰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 이들이 만나 합작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일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동서고금의 자유로운 만남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선은 기존의 중국화첩에서만 보던 산수가 조선의 자연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조선의 산천에 알맞은 새로운 표현기법을 창안하여 정체성을 확립한 한국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반면에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낯설게 결합시키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통해 존재 내부에 있는 무의식적 신비를 시적인 환상으로 표현한 초현실주의의 거장이다. 김정자는 동양과 서양, 개성과 관심사, 양식과 주제 등 어느 것 하나도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정선과 마그리트를 한 작품 안에 섞어 놓았다.



21세기에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정자의 작품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결합이 나타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은 국제화의 물결 속에 인터넷과 각종 첨단 정보매체의 보급에 의해 급속도로 세계화가 이루어졌고, 여러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전통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정선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혈통적 뿌리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또한 일상적이고 친근한 것을 기묘한 것으로 전환시키며 지적으로 예술적 자유를 구현한 마그리트는 작가가 찾아 헤매는 현대성의 멘토이다. 한국적 정체성과 현대성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그녀에게 이 두 작가는 모두 필요한 정신적 스승들인 셈이다.

작가는 자신의 모델인 이 두 작가의 작품에서 부분들을 차용하여 화면에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마그리트 작품을 연상케 하는 공간구성에 난데없이 정선의 고요한 산수가 결합되고 여기에 연필, 우산, 총, 군함, 비행기, 망원경, 불도저 같은 오브제들이 임의적으로 결합된다. 닥종이의 섬세한 질감이나 모시에 물들인 천연염색 등 동양화 특유의 자연적 재료 위에 펼쳐지는 이러한 장면은 외양적으로 매우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작가의 숨은 메시지가 담겨있다.



현대 사회의 도구적 이성비판
출처가 다른 대상들이 텍스트처럼 짜여 현실성이 제거된 듯한 풍경 안에는 총이나 군함, 전투기 같은 무기들이 작은 크기로 숨겨져 있다. 그녀의 작가노트를 보면, 이것은 단지 데페이즈망을 위한 도구만은 아니다.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 향기로운 차와 느긋한 여유가 평화롭다. 이 평화는 진정 지켜질 수 있는가? 내 아들 둘은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 천안함의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연평도에서는 돌아올 수 있는가? … 총이 지켜야 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지고 아직도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재로 한국의 자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무것을 없을 것 같은 호젓하고 은밀한 장소 어딘가에 이런 무기들이 숨겨져 있는 현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은 요즘도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 등이 끊이지 않고, 전쟁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국제적으로 가장 위험한 국가이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무관심하다. 작가는 고요한 자연풍경에 평화를 위해 만들었다는 무기들을 장난감처럼 배치함으로써 무력으로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위정자들의 폭력적이고 위험한 장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불도저나 자동차, 숟가락과 젓가락 같은 오브제들도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또 그녀의 작가노트를 뒤져보자, “서울에서 제주 끝자락까지 발길 닫는 곳 따라 파헤쳐지는 들판, 굉음소리 요란하다. 하나님은 어째서 불도저에게만 응답하시는가! … 불도저의 욕망과 이기심에 순종하는 내 삶은 다른 생명처럼 위태롭다. 나는 자연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휘젓는다. 나이프를 휘두르고 포크질을 한다. 욕망과 이기심은 만족할 줄 모른다.”



작가는 주말마다 한국의 자연을 여행하며 개발열풍에 온 국토가 신음하는 오늘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오늘날 한국은 한국전쟁이후 가장 빨리 도시화와 선진화를 이룩한 나라이지만, 그러한 발전논리 이면에는 도구적 이성과 서구로부터 유입된 인간중심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계몽과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자행되는 인간의 이기적 탐욕과 욕망을 비판하며 작가는 인간과 자연이 동화되는 물아일체의 상태를 꿈꿨던 한국인의 미의식을 복원코자 한다.

현실적 관심과 초월적 무관심의 변증법
이러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작가의 관심사이지만, 이것이 곧 작품세계의 본령은 아니다. 사회적 비판의식이 들어있는 오브제들은 작품에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면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삽입되어 단지 예술적 구성을 위한 요소로서 활용된다. 또 어떤 오브제들은 자신의 애장품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을 간접적으로 개입시키기도 한다.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연필이나 우산은 그런 의도로 차용된 오브제들이다. 또한 간혹 등장하는 목각 인형 같은 인간은 화면에 전개된 현실과 상상, 그리고 동서고금의 시공을 넘나드는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로 보인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 개인과 사회, 동양과 서양, 현실과 상상 같은 이질적 주제와 다양한 관심사가 모여 있는 종합세트 같은 공간이 된다. 그것은 시각적 진실이 아니라 꿈과 이상, 그리고 사회적 관심과 비판이 혼합적으로 공존하는 ‘두뇌적 진실’이다. 이러한 미술과 개인, 미술과 사회의 절묘한 고리는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던 미술의 해체주의와는 달리 모호하게 현실을 재구축하는 방식이다. 데이비드 살레 같은 포스트모던 작가가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을 한 화면에 충돌시켜 예술에서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시키고자 했다면, 김정자의 작품은 해체적 성격보다 구축적 성격이 강하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다양한 차원과 관련을 맺으면서도 의미를 고착시키지 않고 흐르게 함으로써 명료한 계몽성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작품이 사회적 리얼리즘이나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을 차단하는 작가 특유의 예술적 전략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러한 양식은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매우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변화이다. 작가의 초기 작품들은 자연염색과 자연염료를 사용한 동양화 재료들이 주는 물성을 토대로 자연을 향한 자신의 꿈과 아우라를 실현코자 하였다.



즉 한국적 정서에 어울리는 소재와 색채로 고요하게 정화된 자신의 맑은 기운과 원초적 자연의 소리와 싱그러운 숨결을 조화시켜 참선을 하듯 통일된 화면 속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과거 작품들이 자연과 인간의 동화라는 총체성의 꿈을 노래한 것이라면, 최근 작품들은 부조리하고 이질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현실의 모습과 자신의 불안한 의식상황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부조화와 내적 불안은 자연스럽게 화면의 부조화를 수용하게 되었고, 코드화된 이미지의 도입으로 인해 아우라를 상실하는 희생을 치루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용기 있는 변화를 모색했다.

과거의 방식이 잡념과 부조화 제거하면서 무(無)에 이르는 선(禪)의 방식이라면, 최근의 변모된 양식은 제거하고자 해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현실의 난제들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관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잡념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떠오르는 잡념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방식이다. 마치 영화 제작자가 이미지의 단편들을 몽타주하듯이 그녀는 자신의 두뇌에 각인되어 있는 파편적 이미지들에 집착하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결합시킨다. 그럼으로써 칸트가 말한 결과로서의 무관심적인 만족이 아니라 현실적 관심과 초월적 무관심의 변증법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정선이나 마그리트의 이미지, 그리고 사회적 현실이나 개인을 상징하는 오브제들은 모두 작가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관심의 요소들이다. 이런 코드화된 이미지들을 몽타주처럼 구성함으로써 작가는 관조적 거리와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때 지켜보는 자가 된 주체는 스스로 에고에서 분리되고, 특정한 집착에서 벗어나 경직된 사고를 자연처럼 흐르게 함으로써 초월적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여전히 명상적이고 자연의 생리를 따르고 있으며, 마치 장자의 호접몽에서처럼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다양한 동서고금과 현재의 다양한 관심사를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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