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황선태전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전시 소개 


선, 그리고 빛-본질의 그림자, 감각의 덫.

민병직(미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평온하고 단조롭기만 일상 속에서도, 특정한 어떤 순간을 불현듯 조우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익히 알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조차 지극히 다른, 색다른 무엇들로 특별히 체험되는데 이런 내밀한 순간, 말없는 주변의 익숙한 사물들마저 각각의 고유한 차이를 지닌 사물들로 오롯이 펼쳐지는 것처럼, 각각의 사물들은 시공간의 마디를 벗어나 사물 저마다의 그 자체, 이를테면 각각의 존재성 자체를 현현시키게 된다. 사물 그 자체가 그 스스로를 발화시키는 동시에 역으로 우리가 그 사물성 자체를 주목케 하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상학적 현현이라 말하는 순간들이다. 황선태 작가의 작업도 우리에게 각각의 작업들이 담고 있는 이미지나 내용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물 그 자체 혹은 특정한 시간, 공간속의 어떤 순간을 주목케 한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작업은 늘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것들, 다시 말해 가시적인 것들로만 향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들로 우리를 이끌고 있고, 그런 면에서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들과 관계한다. 이를 사유의 영역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이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익숙한 일상적 사물들의 형상을 통해 간단치 않은 사유의 힘을 제기하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의 강도(强度)들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상의 저 깊은 존재성이란, 혹은 존재 그 자체도 어쩌면 그렇게 저 너머에 자리하는 우리와 상관없는 그 무엇들이 아니란 것을, 예술 또한 결국 그런 존재성 자체를 가녀리게 붙잡고 있는 계기들이란 것들을 살며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작가 역시 이를 위한 부단하기만 여러 시도들과 과정들을 겪어야 했던 것 같고, 어쩌면 작가의 계열화된 작업들 자체가 매번, 사물 하나하나의 존재성을 붙잡기 위한 진지한 시도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 역시 그런 산고의 산물들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작가의 작업들을 연결 짓는 계기들로 자리할 것이다. 그 동안 작가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사물들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을 펼쳐왔다. 첫 번째는 평면작업인 사진 드로잉이나 유리 드로잉을 통해 사물의 존재함에 대해 이야기 해왔고, 두 번째는 입체작업이나 설치작업들을 통해 사물의 형태, 주변과의 관계에 대한 세부 분석을 시도해 왔다. 이번 전시는 첫 번째 측면에 가깝지만 두 번째도 결합된 양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사물에 대한 태도들은 매 번 공존해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고, 이번 전시의 경우 그러한 절합에 더해 존재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공간의 구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나른한 일상의 어떤 순간을 연상케 하는 작업은 묘한 공간감을 가지고 있는데, 일상의 세부가 적당히 생략된 중성적인 실내 공간 속에는 가느다란 선이 빚어낸 최소한의 면과 색들로 실내 공간이 표현되어 있고, 여기에 은은하게 그런 실내를 관통하는 빛으로 작업이 마무리되어 있다. 지극히 절제된 선, 면, 색, 빛으로 일상의 어떤 순간을 드러내는, 공간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지만, 특정한 순간이라기보다는 순간이면서도 영원이기도 한 상응(correspondence)에 더 가깝기에 작업에서 조용하지만 범상치만은 않은 묘한 정조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을 관통하는 빛이어서 그것은 계시나 현현 같은 종교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있고, 일상의 특별한 순간, 그렇게 사물 그 자체가 스스로를 현현하는 순간에 더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평범하지만 간단치 만은 않은 일상의 특별한 여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느낌 때문인지, 작가의 작품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느껴지는 실내 풍경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창문으로부터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를 통해 사물과 공간 자체를 은근히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 때문인 듯싶다. 물론 기본적인 접근은 차이가 있겠지만, 창문으로부터 실내를 드리우는 빛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외부의 빛이 들어오는 창문의 설정은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다. 시대마다 달리하는 것이겠지만, 저 창문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 교유해 왔다. 다만 이전의 창문의 역할이 인간의 외부 세계 인식을 위한 메타포로 설정되는 일이 많았다면, 다시 말해 가시적인 세계를 향한 인식의 틀로 설정된 반면, 작가의 작업에서 창문은 사물 자체의 존재감을 간접적으로 드리우는 매개의 역할로 맥락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존재의 더 깊은 근원을 의미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원천으로서의 빛의 설정은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단순히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보다는 정신의 빛이라는 메타포라는 면에서 루멘(Lumen)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신의 현현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존재성을 발하게 한다는 면에서 구별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원으로 설정되어 있는 빛의 실체가 그저 평범한 형광등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신성(神性)과 연결 짓는 것이 무리였음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늘 상 우리 일상의 실내를 불 밝혀 왔던 형광등이 작품을 관통하는 그윽한 빛의 출처였다는 것도 자못 의미심장할 뿐이다. 하지만 공간과 사물을 전면으로 비추는 역할과는 거리가 있고, 적당히 그림자 지도록 사물들을 간접적으로 드리우는 식으로만 역할이 한정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는 분명함보다는 불명함이 가지는 간접적이고 은근함이 사물의 존재 자체를 깊게 발하게 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듯싶다. 빛이라는 설정도 사물의 형상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측면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물이 가진 존재감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이고, 유리라는 소재에 유난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유리가 가지는 (불)투명성 자체가 기능하는 독특한 방식 때문에서인 것 같다.  무언가를 (불)통하게 하는 유리는 그 앞에 놓인 사물들을, 직간접적인 매개의 정도를 통해 다른 식으로 존재케 할 수 있는 물질이다. 유리는 투명함의 정도에 따라 빛을 드리우고 명암과 색과 그림자를 조절케 함으로써, 사물을 다른 가시성의 형태로 존재케 할 수 있는 물질이고, 작가는 그런 유리의 매개의 정도를 조절함으로써 사물의 존재성 자체를 적절히 두드러지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유리라는 재료는 그 자체로도 딱딱하지만 쉽게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는데, 이런 면에서 사물의 존재 자체의 속성, 다시 말해 견고한 외형 못지않게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물의 본원적인 특성을 유비할 수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진 작업을 작업의 속 과정으로 병행하고 있는 작가에게 있어, 세상의 실물 같은 이미지를 담고 있는 사진이 갖고 있는 재현의 속성, 다시 말해 투명한 재현의 논리를 넘어 존재의 논리를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유리라는 매체였기에 효과적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작가의 말처럼 불투명한 유리를 통해 모호하게 보여 지는 사물의 사진들 또한 어떤 것도 투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는 물질들이기 때문이다. 유리는 투명한 세상의 재현 대신, 불투명한 사물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진 작가로서는 꽤나 적절했던 재료였고, 그렇게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은근히 내비치는 사물들과 공간의 표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작가의 사유, 곧 사물의 존재성 자체를 드러내는 철학적, 미학적 기획을 수행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힘들게 까다로운 작업공정을 가지고 있는 유리 작업에 공을 들여왔던 것인데, 예민할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는 다른 사물을 투영하면서 존재를 부각케 하는 유리의 성질 자체가 작가의 작업에 대한 태도와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서로를 닮아갔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까다로운 유리가 가진 여러 속성을 숙련시키면서, 그를 통해 더 근원적인 세상의 빛을 투영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불투명의 정도가 적당히 베여있는 비싸지 않은 유리를 선택한 것도, 유리라는 재료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유리의 본질적인 속성 혹은 유리가 가진 직간접적인 투영의 정도에 대한 조절을 통해, 일상의 사물, 혹은 공간 그 자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한 것에 더 많은 사유가 있었기 때문인 듯싶다. 작가는 이러한 유리의 속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명증한 가시적인 세계의 이면에 있는 사물들의 존재를 드리우려 하는, 이를테면 그림자의 고고학이라 할 만한 기획을 수행해 온 것이다.  


이번 전시는 전작들의 ‘저기, 저 사물이 존재한다.’에서 더 나아가 ‘여기 이 공간이 자리한다.’로의 확장을 꾀한 여정 속에 있고, 사물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특정한 공간의 드러냄을 통해, 일상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면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해 평범한 일상 공간의 이미지들을 채집하여, 그 각각의 구체적인 이야기와 정보들을 지우고, 최소한의 선과 면을 통해, 지극히 중성적인 공간을 표현한다. 아니, 어떤 공간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상의 공간 자체를 단지 존재하도록 한 것인데, 유리라는 소재를 통한 빛의 적절한 드리움은 이러한 작업의 화룡정점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빛의 조율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 정지되어 있지만 영속성마저 느끼게 하는 그런 순간을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공간의 드러냄은 이전 사물들이 가진 존재의 드러냄의 연장이며 확장이기도 한데, 결국 공간 또한 사물들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팝(pop)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무겁거나 진지하지만은 않은데, 대체로 작업들 속에 표현된 공간들이 동시대의 일반적인 풍경의 어법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아니라, 익숙함 속에 그저 자리하는, 일상적 존재 그 자체의 진지함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공간과 사물의 존재를 드리우는 빛 자체가 일상의 형광등이란 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 시대의 현상학은 결코 저 고색창연하고 심원한 곳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그런 소소한 우리 내 세상사의 한 복판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못내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일상의 속내를 그저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특정한 순간들을 주목케 하여, 사물들 그 자체가 스스로 발화하는, 우리를 둘러싼 저 얇고도 깊은 공간성 자체를 불현듯 조우케 한다. 그저 선과 빛으로 구축된 본질의 그림자, 감각의 덫일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